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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한 권의 책

김훈 <공터에서>

by 북앤라떼 2020. 9. 22.

공터에서

김훈

칼의 노래, 남한산성 이후로 오랜만에 김훈의 책을 만났다.

김훈의 문체를 닮고 싶은 사람이 최근에만 <골든아워>이국종 교수,< 쓰기의 말들> 은유 작가뿐이겠는가 단언컨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김훈 작가의 필력을 담고자 어디선가 그의 글을 필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에 빨려 들듯 한번 들면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김훈의 책.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다.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써 서로 복되다.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중에서 김훈

그는 소년 시절에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서 무협지 원고를 대필해야 했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큰 문학 공부가 되었다.

소설은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현대사 100년의 굵직한 사건들을 무대로 한다. 작가의 아버지 김광주는 그 시대에 태어나 70년대에 사망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겪은 세월을 알 수 없지만 그의 글은 언제나 지독하게 외롭고 치열한 몸부림을 하는 사내들이 존재한다. 48년생인 김훈도 소설 속 어딘가에 존재한다.

사실 이 책의 리뷰는 마지막 장의 짧은 작가의 후기로 대신해도 충분하다.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그 기억과 인상들은 오랫동안 내 속에 서식하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치고 싸웠다. 사소한 것들의 싸움을 말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쥐고 쓸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현실에서 발붙일 수 없었던 내 선대 인물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그들의 기록, 언행, 체취, 몸짓, 그들이 남긴 사진을 떠올리면서 겨우 글을 이어나갔다. 이 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나는 그 기억과 인상들이 이제는 내 속에서 소멸하기를 바란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p286 2017년 김훈 

 

첫 시작은 이 책의 모든 것을 암시한다. 건조한 언어로 알리는 아버지의 죽음. 그 생의 배경이 그가 겪었을 인생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김훈의 문체를 그대로 담고 싶다.

마동수는 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 18번지에서 죽었다.(...)

마동수는 만주의 길림, 장춘, 상해를 떠돌았고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서 6.25전쟁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를 살고 69세로 죽었다. 마동수가 죽던 해에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박정희는 5,6,7,8,9대 대통령을 지냈다. 박정희는 심장에 총알을 맞고 쓰러져서, ‘괜찮다, 나는 괜찮아….’라고 중얼거렸다. 마동수의 죽음과 박정희의 죽음은 ‘죽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관련이 없다. 마동수의 생애에 특기할 만한 것은 없다.

책의 시작 페이지

아버지 마동수가 죽었다. 군 복무 중인 차남 마차세가 휴가 나와서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 사이에 홀로 죽었다. 암 투병 3년째로 이미 쇠약해지고 간병인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몸이었다. 어머니 이도순은 고관절에 금이 가서 시립 병원에 입원 중이고 치매도 있다. 장남인 형 마장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역해서 괌에서 사업을 하며 지낸다. 멀지 않은 곳에 살지만 항공편을 이유로 형은 장례를 동생에게 부탁한다.

죽기 전 마동수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식민지의 서울 남산 경찰서의 일을 회상한다. 형 남수는 미국 국회의원단의 행렬을 구경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매를 맞고 다음날 풀려났다. 경찰서 담장 밖 해장국집골목에서 기다리는 그에게 들렸던 고문에 쓰러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피투성이로 나와서 국밥을 먹으면서도 괜찮다고 하던 형을 보며 그가 느낀 세상의 공포는 죽음 앞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피난지 부산의 바다에서 피난민들과 뒤섞여 있는 그 파도가 마동수의 마지막 이승에서의 의식이었다.

59년 전 그날 새벽, 남산 경찰서 뒷골목 해장국집의 누린내 나는 김 속에서 국밥을 먹던 피투성이 사내들의 허기와 괜찮다, 너 돈 가졌냐, 밥 먹자. 배고프다던 형의 목소리가 자리에 누워서 마지막 며칠을 견디는 마동수의 뿌연 의식 속에 떠올랐다. 그때,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기억은 바래어져서 아무런 현실감이 없었지만 임박한 죽음보다 더 절박하게 마동수를 옥죄었다. 비닐 장판에 누워서 마동수는 그날의 새벽을 응시했다. 세상은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49쪽

경찰서에서 나온 형 남수는 오촌 당숙 집에서 몸을 보신하고 잠적했다. 동수는 10년 뒤 형 남수가 만주에서 한의원을 내고 초청하여 대륙으로 가게 된다.

동수도 형의 강권으로 한의학 공부를 하려고 입학했지만 낙제하다 퇴학을 당하고 하춘파의 하숙방에 얹혀 지내면서 여객선 청소 일을 하면 지낸다. 하춘파 밑에서 그가 시키는 일을 했다. 하춘파는 아편 밀매상을 죽이거나 돈을 털었는데 그에게 살인은 ‘정리’였다. 수배에 쫓기는 하춘파와 헤어지고 만주지방을 떠돌며 아편에 절어 살다가 해방되던 해 가을에 서울로 돌아왔다 1950년 인민군대가 서울로 들어올 때 그는 인공기를 흔들며 혁명 만세를 불렀다. 다시 피난길에 오른 동수는 부산에서 빨래꾼이 되어 피에 젖은 군복을 빨았다. 거기서 흥남항에서 놓친 아내를 다시 만났다. 그 전쟁통에 두 아이가 다 생겼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하러 병원에 갔지만 이미 아이가 커서 긁어낼 수 없고 집게로 집어내야 된다는 말에 포기하고 돌아왔다.

아버지 부음을 듣고도 한국에 오지 않는 마장세는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작전 중 부상당한 병사 김정팔과 함께 후퇴하는 것이 어려워 직접 사살하고 살아남은 자들과 본부로 돌아왔다. 상부에는 김정팔이 적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보고했고 장세와 김정팔은 훈장을 받았다. 그 뒤로 장세는 한국에 오는 것을 꺼려 하게 됐다. 한국은 아버지 마동수가 헤매는 나라이고 마장세의 총에 맞아 죽은 김정팔이 훈장을 달고 국립묘지에 묻혀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 괌에서 퍼시픽 파라다이스 회사를 차리고 비밀리에 성매매로 시작하여 고철 무역을 하고 있다. 그에게 아버지 죽음은 먼 길 가는 짐승 한 마리가 세상의 가장자리에 얼씬거리다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차세는 여자친구 상희와 결혼했고 대학교 중퇴로 번번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동생에게 근근이 돈을 보내주는 형의 도움과 부인이 번 돈으로 생활하다가 우연히 형이 새롭게 파트너로 선정한 군대 동기 오장춘 밑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 사이 차세는 딸 누니를 낳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이번에도 장세는 돈만 보내왔다. 장세는 바다에 철근을 불법으로 버리다 체포되었다. 사기와 배임 마약 거래 혐의였다. 장세가 바다에 버린 고철이 5천 톤이 넘었다. 한국으로 오기 싫어하던 장세는 그렇게 범죄인이 되어 귀향했다. 동업자 오장춘은 잠적했다 사체로 발견되었고 차세는 형의 면회를 갔다가 형의 걸음걸이에서 아버지의 환영을 느꼈다. 아버지를 피해 다니다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형. 면회를 다녀오고 차세는 새로운 회사에 지원서를 넣고 물류 회사에 임시직으로 들어가면서 끝이 난다.

책을 덮고 이제야 숨을 내쉰다. 두해 전 돌아가신 증조할머니는 가시기 전 일제시대와 6.25사변을 오가셨다. 하루는 일본 놈들때문에 잠을 못 주무셨다고 욕을 하셨고 또 다른 날은 피난을 가야해서 짐을 쌌다고 했다. 그러다 멀쩡하게 증손의 이름을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가 치매를 앓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할머니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지독하게 힘들었던 시기를 헤매고 다니는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일제시대, 한국 전쟁, 가난속에서 격동의 세월을 다 버티며 억척같이 살아내시고 100세를 앞두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한국의 역사였다. 거기에 이민생활을 하시다 말년에는 말이 안통하다고 가슴을 치며 답답하다 하셨던 할머니. 한국 사람 한 명도 없는 요양병원에서 끝까지 한국말만 뱉어내시다 가신 할머니를 보내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소설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서울에서 흥남으로 또 만주와 베트남으로 어느 곳 하나 집처럼 느껴지는 곳 없이 헤매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어쩌면 죽는 것 보다 못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비루하고 힘겹다. 무능하게 헤매던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은 아들도 그래서 부러 외면하고 죽은 아버지조차 마주하기를 거부해보지만 결국 아버지의 환영처럼 닮은 모습으로 아버지의 자리에 서 있게 된다.

김훈은 부러 마동수의 죽음을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2달 뒤로 설정했다. 그 비극적인 시대에 박정희를 떠올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한번도 바뀌지 않는 시절에 성장했던 이들의 기억 속에 그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해결되지 아픔으로 살아간다. 박정희는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을 파병했다. 급속하게 발전하여 근대화를 이루고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지만 우리의 해결되지 않는 100년의 역사는 여전히 아픈 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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