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허은실
1975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라디오 오락·시사 프로그램의 작가로 10년 넘게 활동했으며 2010년 《실천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작가로 알려져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들었을 때 오프닝이 참 좋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만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이렇게 100회 동안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문을 열어온 오프닝 에세이 모음집이 묶여 나온것을 보면 말이다. 시그널 음악과 함께 이동진 작가가 잔잔하게 읽어주는 빨간책방에 감성의 주파수를 맞추고 아침 산책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읽어주는 그 남자가 없어서 그런가 에세이만으로는 그 느낌이 안난다. 다시 듣고 싶은데~~~
한 알의 사과를 천천히 베어 먹듯이
책은 냄새입니다.
모든 책은 태생적으로 나무의 냄새를 지니고 있지요.
갓 구운 빵이나 금방 볶은 커피가 그렇듯이
막 인쇄된 책은 특유의 신선한 냄새로 당신을 유혹합니다.
좀 오래된 책이라면 숙성된 와인의 향기가 나지요.
포도알 같은 글자들이 발효되면서 내는 시간의 맛입니다.
책은 소리입니다.
책과 책 사이를 자박이며 걷는 조용한 발소리,
사락사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연필이 종이의 살을 스치는 소리.
그 소리는 사과 깎는 소리를 닮았습니다.
당신은 사과 한 알을 천천히 베어 먹듯이
과즙과 육질을 음미하며 한 권의 책을 맛있게 먹습니다.
문장을 읽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손으로 만지고, 맛을 보는 행위.
책을 읽는다는 일은 그렇지요.
생활에 무뎌진 이런 모든 감각들이 살아나는 시간.
공감각적 공감의 순간을 책은 선물해줍니다.
그런 것이고 싶습니다.
이 글들이 당신에게 무엇일 수 있다면.
프롤로그
목차
1부 사이, 기울어 기대다
9, 당신의 무렵 / 혈관 속에 열이 떠다닐 때 / 기울이다 / 비, 빗소리 / 사랑의 온도는 / 기적은 그러니까, / 사람, 사이의 존재 / 당신, 이라는 말 / 두 사람 / 당신을 봅니다 / 사랑, 살도록 / 물집과 굳은살 / 지음, 나의 소리를 가려들어주는 이여 / 아서라 사랑아 / 우리의 마음이 등온선에 있을 때 / 조율과 다스름 / 사랑, 당신을 번역하려는 노력 / 달이 멀어진 만큼 우리는 / 기다린다는 것 / 나의 손이, 우리의 입이 / 당신에게는 일부러 / 잘라야 더욱 자라는 것들 / 멈춰서 귀를 기울이면
2부 마음, 잃고 앓다
소멸에 대한 예감 속에서 / 흔적들, 우리를 흔드는 / 감수성, 물의 화법 / 당신의 여름은 / 서늘한 마루가 되어 / 여름, 생의 한가운데 / 상처에서 비롯하다 / 목소리, 목소리 / 눈물의 온도에 기대어 / 한 시절이 /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달 / 잘 우는 자를 빌려 곡하고 싶을 때 / 나 혼자서 몰래 / 소슬바람이 불면 / 숨비소리 / 마음의 빠르기 / 그리운, 돌아갈 곳 / 손톱이 가장 빨리 자라는 달에는 / 단풍의 이유, 당신의 이유 / 작은 주머니쯤이면 / 눈물에 대해 묻는 것은 / 빈 곳이 있어 / 간즈럼나무 아래서 / 나의 가슴 위에는 / 무의미의 아름다움 / 물기를 버리는 일
3부 책, 머물러 머금다
이 고독한 세계에서 책은 / 타인의 흔적 속에 잠시 / 나를 누설하는 말들 / 책의 그늘 / 나라는 도서관의 서가에 / 글자가 여무는 계절 / 다시 첫 페이지를 펼치며 / 알아듣고 다가가려 / 암전과 침묵으로부터 / 그리고 어느 날 서귀포시 서쪽에 / 여러 겹의 생을 읽는 오후 / 책내 몸내 / 나무에 대한 채무 / 첫 문장을 쓰는 것처럼 / 패딱지를 맹글더라도 / 내 삶에 개입한 밑줄들 / 오늘 내가 지은 것은 / 손.글.씨
4부 독서, 흘러 닿다
지문들이 이루는 무늬 / 어쩌면 오늘 우리는 편지를 / 말이라는 세계 / 독서, 몸을 섞는 일 / 깊고 오래고 내밀한 기억의 방식 / 소음의 세계에서 소리의 세계로 / 필사, 몸으로 읽는 일 / 책 속으로의 삼투 / 공감의 지대 / 오독오독 토독토독, 꽃 피는 오독 / 축하합니다 오늘 / 홀로 고요히 서늘함 / 이기려고, 가 아니라 읽으려고 / 난독증의 시대에 / 견딤의 서사 / 느림에 참여하는 일 / 취한 말들의 시간 / 독에 이른다는 것
5부 삶, 빚고 짓다
당신의 시선 때문에 / 물음 하나를 쥐고서 / 봄은 / 리듬, 당신의 내재율 / 한데서 겨울을 건너온 것들은 / Why not / 매일 스무 줄의 양파를 파는 일 / 아름다움-사람다움 / 일어나봐, 봄이 왔어 / 소용없는 일을 하는 무용한 사람이 되어서 / 반복이라는 기술 / 낙법, 삶의 기본기 / 당신의 장식 깃털 / 사람을 이루는 것, 사람이 이루는 것 / 마음의 활줄을 풀어놓는 시간 / 문득, 꽃 / 달과 장미의 시간 / 당신의 화단에는 / 당신의 먼 곳 / 동안거, 봄을 준비하는 웅크림 / 너무 지치고 힘이 들 때는 / 당신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 돌아본다는 것
목차
혈관 속에 열이 떠다닐 때
우리는 모두 한때 미열의 계절을 통과합니다.
청춘이란 몸이 뜨거운 시기일 텐데요.
그게 사랑이었는지, 비상의 욕망이었는지,
아무튼 알 수 없는 어떤 것들로 마음을 앓았을 때
우리의 혈관 속엔 열이 떠다녔습니다.
살면서 가끔 마음의 수은주가 내려거나 할 땐
그 열이 그리워지기도 하지요.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열보존의 법칙’ 같은 게 있다면,
그래서 내가 잃어버린 그 열들이 영영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잠시, 덥히고 있는 중이라면 좋겠습니다.
지음, 나의 소리를 가려들어주는 이여
누군가를 사랑해버리는 일,
어딘가로 갑자기 떠나버리는 일,
오래 지니고 있던 물건을 버리는 일….
나이 들수록 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중 가장 어려운 일은
친구를 사귀는 일입니다.
살아갈수록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우정이라는 단어가 더 미덥습니다.
우정은 뜨겁다기보다는 더운 것,
그래서 금방 식어버리는 게 아니라
은근히 뭉근히 오래가는 것,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건 아무래도
그런 사람을 얻는 일 같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한 친구를 ‘지음知音’ 이라고 하죠
자신의 거문고 소리에 담긴 뜻을 이해해준 친구를 잃고 난 뒤
이제 그 소리를 아는 이가 없다며 현을 끊어버린
춘추시대의 어떤 우정.
거기서 나온 말인데요.
지음이란 말에는
‘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듣는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지인들 중에서 나만의 소리를 가려들어주는 사람.
목소리만으로
눈물의 기미를 눈치챌 수 있는 사람.
‘지인’은 많아도
‘지음’은 드문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는 일부러
‘지름길 반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되도록 지름길을 걸어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하는 노력을 말한다고 하네요.
우리 삶의 방식도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성공의 지름길, 행복의 지름길, 합격의 지름길, 취업의 지름길.
지름길이 붙는 단어들은 어째서 이런 것들뿐일까요.
그런데 우리말엔 질러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일 이름이 훨씬 많습니다.
에움길, 엔길, 돌길, 돌림길, 두름길…
이런 말들이죠.
또 큰길처럼 넓고 걷기 쉬운 길보단
좁고 어려운 길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뒤안길, 오솔길, 고샅길 같은 게 그런 말들인데요.
인생길이 바로 그렇기 때문 아닐까요.
상처에서 비롯하다
창조, 창작의 ‘창 創’ 자에는
‘만들다, 비롯되다’란 뜻만이 아니라
‘다치다, 상처입다, 슬프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한 글자가 품은 두 가지 의미, 그저 우연이기만 할까요
내가 올 때 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달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발음할 때 가장 시적인 달은
역시 10월입니다.
10월, 하고 불러보면
이맘때 부는 바람처럼 마음이 좀 시리기도 하고,
뜨거운 시절을 버텨온 뼈마디 어딘가가
시큰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무의미의
아름다움
어떤 때는 모르는 언어를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가령 타밀어나 희랍어로 쓰인 문장들을 볼 때가 그런데요.
그때 느끼는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형태적으로 문자가 예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단 너무 멀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요.
먼 언어는 너무나 요령부득이고 해독 불가라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그 어떤 의미의 간섭과 내용의 개입도 없기 때문이죠
이 고독한 세계에서 책은
달리 보면 ‘冊’이라는 한자는
‘멀 경(?)’자 둘이 엮여 있는 모양이기도 합니다.
멀고 먼 것들이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만납니다.
이곳과 저곳, 먼 존재들을 연결하는 끈.
그게 바로 책이 아닐까요.
당신과 나, 우리는 이렇게 서로 멀리 있습니다.
동시에 나와 당신, 우리는 이렇게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책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 고독한 세계에서
책이든
무엇이든
연인이든
타인이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누군가, 무언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입니다.
내 삶에 개입한
밑줄들
좋아하는 사람한테 책을 빌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가 그어놓은 밑줄을 만나서 가슴 뛴 기억 말이에요
그게 내가 좋아하는 구절일 때,
밑줄은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영혼의 전류처럼 느껴집니다.
물결 같은 밑줄을 타고 그의 기슭에라도 가닿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연애를 시작할 때 잠깐이지만요.
헌책에 그어진 밑줄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일순간 사라지기도 하죠.
내가 공감하는 부분과 같은 데 밑줄이 그어져 있을 때
책의 전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밑줄은 미지의 그와 나를 연결하는 희미한 선이 됩니다.
별 생각 없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들춰볼 때도 있어요.
책을 뒤척이다 보면 10대, 20대의 나를 만납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여기다 줄을 친 걸까’
그때 그 마음이 지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죠.
하지만 밑줄 위의 그 문장들은 몰래몰래 내 삶에 개입해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겁니다.
공감의 지대
식구라는 말은 먹을 ‘식食’자에 입 ‘구口’자를 씁니다.
같이 밥을 먹는 게 식구이고 가족이라는 거죠.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면,
같은 책을 읽는 것으로도
느슨한 의미의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면서
각자 다른 시간을 삽니다
하지만 같은 책을 읽는 순간,
같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각자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생기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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