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미술 만나기!
미술 하면 고상하고,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예술가의 작품 탄생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방구석에서 낄낄대며 만나고 그 과정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아닌 예술가의 삶에서 ‘왜 그런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가슴으로 공감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유명한 작품들은 보면 누구의 작품인지 맞출 수 있지만 자세한 배경과 숨은 이야기를 듣고서 다시 보니 그 작품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처음 리디북스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다운로드를 받아 놓았던 책인데 침대에서 한 편씩 보다가 오늘에서야 정리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미술품이야 직접 감상하는 것이 훨씬 낫고 전자책이 아니었다면 굳이 정리를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나중을 위해서 간략하게 메모를 해 놓는다.
에드바르트 뭉크
1863년 12월 12일~1944년 1월 23일, 노르웨이
사조: 표현주의
대표작: <절규>, <사춘기>, <마돈나>, <생명의 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뭉크
뭉크는 선천적으로 류머티즘을 앓아 평생 관절염과 열병에 시달렸다.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고 누나마저 사망하면서 아버지는 우울증으로 그렇게 죽음은 병약했던 뭉크를 평생 쫓아다니는 망령이 된다. ‘Memento Mori!’
<절규>와 <병든아이>
뭉크는 <병든 아이>를 시작으로 자신의 삶을 둘러싼 죽음에 느끼는 감정들을 그림 위해 쏟아내기 시작한다.
“예술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개인과 그의 삶이며, 우리는 죽어버린 자연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화류계의 팜므파탈 마성을 가진 연상의 여인과의 첫사랑에서 실패한 뭉크는 이후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피해 망상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흡혈귀>다.
<흡혈귀>
두 번째 사랑의 실패로 나온 <마돈나>
<마돈나>
이제 뭉크에게 여성은 상처를 주는 존재다. 사랑의 운이 없는 뭉크는 세 번째 사랑에도 실패하며 <마라의 죽음>으로 사랑의 죽음을 표현한다.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
세 번의 사랑으로 질투와 좌절 그리고 죽음의 공포까지 모두 넘긴 뭉크는 마흔여섯부터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에서 은둔하며 중년의 삶을 살아간다.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은 죽음을 기다리는 쓸쓸한 예술인 뭉크를 보게 된다.
프리다 칼로
1907년 7월 6일~1954년 7월 13일
국적:멕시코
대표작: <두 명의 프리다>, <떠 있는 침대>, < 우주와 대지, 나, 디에고, 그리고 애견 세뇨르 솔로들의 사랑의 포옹>
미술계 막장 드라마의 원조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다. 멕시코의 500페소 지폐에 새겨진 두 사람의 이야기
프리다 칼로는 소아마비로 여섯 살부터 오른발의 성장이 멈춘다.(오른발은 평생 그녀를 괴롭혔고 죽기 전에 절단까지 하게 된다.) 아픈 발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멕시코 국립대학에 입학한 18살 프리다는 타고 있던 버스가 경전철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뼈가 으스러지고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프리다는 이 고통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나는 원래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안에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고는 무언가 다른 걸 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림을 시작했다.”
발 사이즈 차이가!
프리다가 당시 국민화가로 멕시코 공산당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디에고를 찾아가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으면서 둘의 인연으로 프리다도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는 21살에 취미가 불륜인 43세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식을 올린다. 사고로 불임판정을 받았지만 강인한 프리다는 미술도 놓은 채 아이 갖기에 주력하지만 첫아이도 유산, 두 번째 아이도 유산으로 고통의 늪에 빠진다. 그때 디에고가 그녀에게 준 것이 종이와 연필이다.
<떠 있는 침대>
이때 그린 그림이 <떠 있는 침대>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두 번째 유산을 하던 시기에 그녀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른다.
“나는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프리다는 이런 나의 역겨운 성격으로 인한 희생양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여인일 뿐이었다.”-디에고
막장 드라마의 서막을 올린 디에고에 대한 맞바람으로 프리다는 불륜 퍼레이드를 시작한다. 상대는 일본 조각 이사무 노구치를 비롯하여 러시아 혁명가로 남편이 존경하던 레온 트로츠키 그리고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로 이어졌다.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1935
그러나 역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예술의 복수다.
1938년 첫 작품 전시회를 연 프리다는 이후 루브르가 선택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화가로 기록될 정도로 이름을 알린다. 무명이던 프리다가 유명해지는 데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의 힘이 컸음을 부인할 순 없다.
드가는 귀족 집안의 꽃미남 외모를 가졌지만 독신남으로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졸업만 하면 앞길이 창창한 법대를 그만두고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스무 살의 드가는 파리에서 사랑과 결혼을 포기하고 예술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는 평생 여성을 그린 것으로 여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실내(강간)> 1868~1869
서른여섯의 드가는 시력의 기능을 점차적으로 상실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경마, 발레 등 동시대의 일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드가는 왜 발레리나에 집착한 것일까? 무대 위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발레리나는 사실상 오페라에 들어오고 나면 창녀로 운명이 결정되던 시기였다.
<주연이 된 발레리나>
<무대 뒤 발레 리허설>,<발레교실>
<무대 위 발레 리허설>은 드가의 유명한 걸작이다.
65세 노인이 된 드가는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에서 시를 쓴다. 역시나 발레리나에 대한 시다.
낮이나 밤이나 연습에 몰두하는 그녀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즐거움이 밀려오네
아직 빈민가의 흔적을 떼버리지 못한 그녀
-<어린 무용수>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3월 30일~1890년 7월 29일, 네덜란드
사조:후기 인상주의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새로운 예술을 발견하고자 무작정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상경한 33세 반 고흐
그가 먼저 파리에서 접수한 것은 ‘녹색 요정’이라 불리는 술 압생트다. 1805년에 나온 이 술은 알코올 도수가 40~70인 독주로 이 시기 파리에 이 압생트 냄새가 진동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푸른빛이 도는 술이 가져다주는 취기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요”-시인 랭보
좌 <해바라기>, 우 아를의 밤의 카페>
이미 알코올 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고흐의 그림에서는 노란색이 등장한다. 녹색 요정이 품은 산토닌(Santonin)은 압생트 향쑥의 주성분으로 과다 복용 시 ‘황시증’이 나타나서 세상을 모두 노랗게 보게 된다.
색을 표현해야 하는 화가가 색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저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흐는 그것을 영감의 원천으로 받아들여 자신이 부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음의 노랑을 찾아낸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 1889
귀를 자르고 붕대를 감은 뒤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을 그린 고흐는 그 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다시 색을 찾아 <붓꽃>, <별이 빛나는 밤>등을 그린다. 고흐의 마지막 작품은 <까마귀가 있는 밀밭>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1862년 7월 14일~1918년 2월 6일, 오스트리아
사조:표현주의
대표작: <키스>, <유디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스토클레 프리즈>, <베토벤 프리즈>
매우 가난하게 태어난 클림트는 성공에 대한 끈기와 열정 그리고 귀금속 세공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14세의 나이에 오스트리아 최고 명문 미술 공예 학교에 입학하여 천재적 재능을 다진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주문을 받아 예술 작품을 만들어주는 ‘예술가 컴퍼니’를 창업한다. 그는 국가 기념비를 맡아서 제작하고 황제로부터 상금과 훈장을 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 구 부르크 극장의 내부> 1888
그러나 사업 파트너 친동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사업도 폐업한 그는 자신의 삶과 예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1897년 서른다섯 살 클림트는 당시 협회의 구미에 맞춰 그림을 그려야 했던 빈 미술 권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시대의 반항아로 다시 태어난다.
<팔라스 아테나>1898
<팔라스 아테나>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을 쟁취하겠다는 분리주의의 정신이 담겨있다. 반항의 서막을 알린 클림트는 <누다 베리타스>를 통해 노골적인 누드라는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된다. 누드는 자고로 이상적인 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화폭에서 튀어나올 듯 사실적인 묘사가 고정관념이었던 시대에 이것이 진짜 누드라고 클림트는 미술계에 반항을 일으켰다.
그 투쟁의 과정에서 <키스>, <다나에>, <유디트> 같은 걸작이 탄생하였다. 그 후 클림트는 작품으로 이성과 학문의 한계와 법의 부조리를 고발했다. 안타까운 것은 1945년 히틀러가 그의 작품을 퇴폐 미술로 낙인찍어 모두 불태웠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참 많은 일을 했구나.
<아기(요람)>
시대의 반항아 클림트가 사망 직전에 그린 그림은 <아기(요람)>이다.
에곤 실레
1890년 6월 12일~1918년 10월 31일, 오스트리아
사조:표현주의
대표작: <앉아있는 남성 누드>, <죽음과 소녀>, <포옹>,< 바람 속의 가을 나무>,< 죽음의 고통>
그림에도 19금이 있다. 19금 드로잉의 대가 에곤 실레
연필을 쥘 수 있게 된 두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린 그는 태어날 때부터 화가였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그림만 그렸다는 그는 재능과 열정을 타고났다.
그러나 당시 성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감염되어 선천성 매독을 앓던 누나의 사망과 아버지의 사망은 그에게 ‘성에 대한 두려움’ 성 트라우마를 주었다. 1907년 빈 화단에서 45세의 클림트를 만난 에골 실레는 클림트의 <다나에>를 묘사하면서 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봉인 해제된다.
또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오스카 코코슈카다. 적나라한 누드 드로잉은 오스카 코코슈카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자기신뢰야말로 용기의 초석이고 자기신뢰는 위험이란 요소와 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기란 고뇌하면 위험에 맞서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삶은 거센 물결과 고통을 헤치고 나아가는 투쟁이자 끝없이 밀려드는 적들과의 투쟁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누구나 자연이 각자에게 선사한 것을 즐기기 위해 홀로 투쟁해야 합니다”
그는 평생 100여 점 이상의 자기 자화상 일기를 그렸다. <앉아있는 남성 누드>나 <검은 스타킹을 입은 여자>, <뒤엉켜 누운 두 소녀>
그는 노골적인 성기 묘사에 이어, 자위행위, 동성애 장면까지 금기시되고 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예술인가? 외설인가?
실레는 승승장구하며 빈을 이끄는 최고의 화가로 군림하다가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스물여덟 살에 생을 마감한다.
폴 고갱
1848년 6월 7일~1903년 5월 8일, 프랑스
사조: 후기 인상주의
대표작:<황색의 그리스도><브르타뉴의 시골 여인들><마리아를 경배하며><타히티의 여인들><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갱은 원래 잘나가는 증권맨이었다. 그를 증권맨으로 만들어준 귀스타브 아로사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사진가, 작품 컬렉터였다. ‘아마추어 회화 붐’이 일던 당시 파리에서 고갱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갱의 은밀한 2중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증권맨의 옷을 입었지만 이미 화가의 정신을 가진 고갱의 마음이 <파리 카르셀 거리, 화가의 가정>에 잘 드러나 있다. 1882년의 경기 불황으로 해고를 당한 고갱은 33세에 화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 나는 용기도 재능도 부족하다. 곡물 창고로 가서 목을 매는 게 낫지 않은가 매일 자문한다. 그림만이 나를 지탱해 준다.”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에서 그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제2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는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갔다..
고갱은 실재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색을 쓰기 시작한 선구자다. <예배 뒤의 환상>과 <모자를 쓴 여인>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색채를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전에 선원으로 원시와 야생의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고갱은 원시의 자연 속에 들어가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펼친다.<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고갱의 질문이 들린다. 150년 전의 퇴사 선배 고갱은 진짜 자신의 삶을 발견했던 사람이다. 가슴을 따라 살 것인가?
에두아르 마네
1832년 1월 23일~1883년 4월 30일, 프랑스
대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올랭피아>,<피리 부는 소년>,<폴리 베르 제르 바>
마네는 전통을 고수하는 살롱전 신봉자였다. 살롱전은 1667년 루이 14세 때 시작된 국가가 주최하는 미술 공모전으로 화가들의 성공을 보장하는 등용문이었다. 마네가 깊이 존경하며 사상적 스승으로 여긴 사람이 보들레르다. ’현대의 생활, 즉 동시대 사람들과 생활상을 그려라’ 이것이 보들레르의 생각이었다.
과거의 신화나 역사가 아닌 동시대 사람들과 생활상을 그린 마네는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당연히 탈락하여 낙선 스타가 된다. 그리고 <올랭피아>를 폭탄 투척하듯 살롱전에 다시 출품한다. 평론가들은 르네상스 이후 절대 진리로 여긴 원근법을 폐기 처분한 마네의 작품을 비난했다. 그는 44세에 성병 임질에 걸렸는데 의사가 관절염으로 오진하는 바람에 병세가 악화되어 다리부터 시작한 마비가 온몸에 퍼져 결국 51세에 생을 마감한다. 마네는 갔지만 150년이 지난 지금도 마네가 그린 단순미는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숨 쉬고 있다.
<폴리베르제르 바>1882
최후의 걸작은 <폴리베르제르 바>다. 매춘과 불륜의 장소였던 그곳에서 그는 그렇게 마지막 작품으로 세상에 고별인사를 했다.
클로드 모네
1840년 11월 14일~1926년 12월 5일, 프랑스
사조:인상주의
대표작:<인상, 해돋이>,<생-라자르 역><건초더미> <수련> <지베르니 부근의 센 강변>
현재는 반 고흐와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 모네 그러나 당시에는 쓰레기라는 욕을 먹었다는 사실.
1826년 프랑스 화학자 니엡스에 의해 최초의 사진이 탄생하면서 카메라는 19세기 화가들의 생존을 위협했고 화가들은 새로운 ‘미술 대륙’을 찾아야 하는 사명을 갖게 해 주었다.
천성적으로 반항아 기질이 많은 모네는 수업 시간을 감옥으로 여기며 틈나는 대로 인물 캐리커처를 그렸다. 주변에 그림을 판 돈으로 파리 여행까지 갔을 정도니 타고난 화가에 수완도 좋다. 18세 모네는 외젠 부댕을 만나 자신의 평생 주제를 ‘자연’으로 삼게 된다. 첫 그림은 <루엘 풍경>이고 이후 <운하 위 달빛>으로 모더니즘의 첫 항해를 시작한다.
<운하 위 달빛>
그리고 젊은 예술가들이 바티뇰 거리에 있는 마네의 집에서 미술 토론을 하는데 거기서 모네는 새로운 회화의 코드를 전수받는다.
모네는 18세에 미술에 입문했지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빚쟁이에 쫓겨 다녔고 너무 가난해서 친구가 사용했던 캔버스를 긁어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내 그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젠 명성을 기대하지 않아. 모든 것이 암담한 지경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여전히 빈털터리야. 좌절과 치욕, 기대 그리고 더 큰 좌절.”-1868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1874년 모네는 보수적인 살롱전을 거부하는 화가들과 제1회 무명 협동 협회전을 개최한다. 그때 모네는 12점을 출품하는데 <인상, 해돋이>가 미술사에 빛나는 보물로 남은 작품이다.
<인상, 해돋이>
‘빛’은 모네의 인생 주제였다. 1873년 그는 작은 배를 개조해 수상 화실을 만들고 센 강 위에 띄워놓고 해가 뜨고 질 때까지의 수면 위에 나타나는 빛을 그렸다고 한다.
우와 너무 낭만적인 모네~
폴 세잔
1839년 1월 19일~1906년 10월 22일,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대표작: <사과는 오렌지>,<생트 빅투아르 산>, <목욕하는 사람들>,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19세기 중반 이후 마네는 미래의 회화로 가는 문을 발견하고 모네가 그 문을 열었다면 세잔은 모네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인상주의를 세잔식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 공부를 하던 세잔은 1861년 화가의 꿈을 품고 파리에 상경한다. 모네에게 부댕, 용킨트, 마네라는 스승이 있었듯 세잔에게는 피사로라는 스승이 있었다.
피사로는 맨땅에 헤딩하듯 독학하는 폴 세잔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자연과 소통하며 그림을 그렸다. 피사로는 세잔이 ‘너그러운 신 같은 사람’라고 추앙할 정도였으니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스승을 만나것이 폴 세잔의 큰 복이다.
“나는 견고하고 영원한 인상주의를 만들고 싶었다. 박물관의 예술처럼”
인정받지 못했던 세잔은 38세에 파리를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사망하기까지 29년을 홀로 은둔하며 ‘세잔식 인상주의’를 향한 그림을 그렸다.
<사과와 오렌지>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고 싶다”
보고 또 보고 탐구하는 세잔은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는 일화를 남겼다.
그래서 그런가? 사과가 예사롭지 않다. 그의 작품 <사과와 오렌지>에는 그런 형태의 엑기스가 담겨 있다. 모네의 인상주의에서 부족하다고 느낀 자연의 속살을 세잔은 겉모습이 아닌 속을 통찰하고자 했다.
< 생트 빅투아르 산>
세잔의 대표작 < 생트 빅투아르 산>
세잔은 완벽한 구성을 가진 단 하나의 컷만을 작품이라 생각하여 완벽하다 느끼지 않으면 모두 찢어버렸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자연에 불어넣는 풍부하고 멋진 색이 내 그림에는 부족하다.”-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보낸 편지
누구보다 앞서 20세기 회화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걸어갔지만 그의 마지막 편지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붓을 놓지않았던 화가의 고뇌가 담겨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1866년 12월 16일~1944년 12월 13일, 러시아
추상주의
대표작: <즉흥>시리즈, <인상>시리즈, <구성>시리즈
최초 추상미술의 창조자 칸딘스키는 요즘 표현대로 ‘엄친아’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미술을 사랑했다. 러시아 제일 명문 모스크바 대학 졸업과 동시에 법률 고시를 패스한 뇌색남은 사촌 안냐 치미아킨과 결혼한다.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에서 모네의 <건초더미>를 만난 뒤 그는 법학과 교수직을 뿌리치고 뮌헨으로 달려간다.
칸딘스키가 세운 팔랑크스 미술학교는 당시 여학생 입학을 금지하던 다른 미술 대학과 달리 성별에 관계없이 학생을 받는데 그때 뮌터가 입학하게 되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은 작업을 하면서 호감을 갖게 되고 밀애를 하게 된다. 둘은 5년 동안 사랑의 유랑을 떠나 각국의 미술작품을 보며 함께 토론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때까지도 아내와 별거 상태였던 그는 그제야 이혼을 하지만 뮌터와도 결혼하지를 않는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칸딘스키는 그렇게 훌쩍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6년간 연락없던 사람이 대리인을 통해서 연락하여 자신의 물건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니 그렇게 둘은 오래된 물건을 놓고 4년간 싸움을 하다가 결국 뮌터가 물건을 보내주고 끝이 난다.
미술에는 완전무결해 보이는 그는 연애에 있어서는 찌질남이었다.
67세의 노인 칸딘스키는 뮌터와 헤어진 뒤 그때처럼 다시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며 그 시절을 최고의 시기로 회상했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그의 작품은 이후차가워진다. 그러나 뮌터는 50세에 요하네스 아이히너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 1957년 80세에 뮌터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100점의 작품을 모두 기증하는데 거기에는 칸딘스키의 작품을 비롯하여 청기사파 화가들의 걸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에는 청기사파 작품은 모두 불태워지는데 그 상황에서 청기사의 수호신이 된 그녀. 그 덕분에 후대에 우리가 많은 작품들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예술가의 사랑과 삶은 독특하기도 하고 천재적인 자질과 열정뿐 아니라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지 않나 그래서 예술을 하는 거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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