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리디 셀렉트에서 이다혜를 검색했더니 세 권의 책이 뜬다. 이다혜 작가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김중혁 작가와 함께 알게 되었다. 책과 여행을 아주 많이 즐긴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김중혁 작가의 책은 만나보았지만 이다혜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여행 애호가들은 시간만 나면 그냥 떠난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게 되면서 명절 때면 언제나 여행을 갔다
-책 속에서
지금껏 잡지사에서 경력을 이어온 그녀는 박봉이고 마감이 버겁지만 가장 큰 장점이 휴가를 아무 때나 갈 수 있다는 것과 휴가 사용 보장으로 꼽는다. 보통 부산 국제 영화제가 끝난 뒤 연말 특대호를 만들기 전, 11월이 그녀의 정기휴가. 이때는 비수기라서 싸게 여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녀의 책을 한 단어로 축약하면 ‘자유’다.
여행에서 추구하는 것도 ‘자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여행지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은 그곳 스타일의 옷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는 법과 타인의 스타일에 간섭하지 않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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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여행 같고 여행이 일상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남편과 같은 취향이다
그런 사람들은 같은 여행지를 자주 가서 현지인처럼 생활하고 먹고 쉬고 오는 여행을 추구한다.
나는 새로운 행선지를 원하고 일단 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남들이 보는 것 다 보고 할 수만 있다면 남들이 보지 못한 것까지도 보고 싶어 한다.
자주 할 수 없는 여행은 원래 그렇게 ‘뽕뽑는 여행’이 된다.
그녀는 독서광답게 여행지에서 꼭 서점 주로 헌책방을 들린다. 그 나라말로 된 책을 사기도 하고 여행이 끝날 땐 다시 다른 책으로 교환하거나 버리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을 가장 많이 갔고 일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영어와 다른 언어도 잘 하는 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자유여행의 뒷심이다.
김민식 PD의 책<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와 같이 읽었는데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짠 내 투어를 즐겨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을 많이 한 이다혜 작가도 돈 없어서 고생했던 여행의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여행을 떠날 때 잊지 않는 물건이 ‘책’이라는 공통점.
특별히 명절은 덮어놓고 여행, 여행이 취미이자 삶이지만 한편 여행을 다녀와서 하는 ‘글쓰기’를 하기에 직업과도 무관하진 않다는 점.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성별과 결혼의 유무인데 사실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차이점을 만드는 조건이다.
여자에게 여행이란
한때 유럽 배낭여행이니 어학연수니 하는 것들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를 이야기할 때 언니가 대학생 때 그런 여행들을 다 즐겼던 기억이 난다. 여자들은 여행에서 하나같이 살이 찌고 남자들은 핼쑥해져서 돌아온다는 말에 왜 그렇게 공감이 되던지.
한국 여자들은 외국 생활을 하면 체중을 포함한 몸매에 대한 근심이 한국에서 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 시선이 날카로워 입지 못하던 옷을 마음 편하게 입을 수 있고, 밤잠 설쳤다고 “너 얼굴 엄청 커졌다”같은 말을 하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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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이태리에서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하루가 지날수록 얼굴이 점점 커지는 것을 사진을 보고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EAT PRAY LOVE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이태리에서 맛있는 음식 때문에 새로운 사이즈의 옷을 사야 하는 것이 딱 공감된다.
혹시나 여성의 생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를 남성들을 위해 생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여행 중에 생리를 하면 “왜 진작 알아서 처리하지 않았느냐"라는 원망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어서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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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시 여행 때마다 고민하는 여자들만이 아는 고민이리라. 나 역시 그것 때문에 난데없이 계획이 차질이 생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뭐 이렇게까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하면서도(그녀는 10대부터 환갑에 이를 때까지 여자들이 매달 겪는 일이라고 썼다) 공감이 된다.
건축일(궁궐이나 절집을 고치는 일)을 하신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한국의 정원들을 보며 자랐다. 사람 없는 비원을 구경한 일은 꿈처럼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잉카의 유적지, 페루 마추픽추를 가고 싶어 하셨고 초등학생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여행의 꿈을 키워온 셈이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일본어에 능통했다. 가끔 두 분이서 일본어로 대화를 하셨다고 한다. 그녀가 일본을 가장 많이 가는 것도 그런 영향이 있을까.
수많은 여행지 속에서 그녀가 뽑은 최애 여행지는
영국의 에든버러 Edinburgh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날씨의 주인공은 11월의 영국 에든버러다. 한낮에도 춥고, 비가 하루에 몇 번이나 내린다. 한 시간쯤 있으면 손이 얼어붙는다. 너무 추워서 늘 설사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신발을 더 잘 신고 왔어야 했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그 싸늘한 공기가 나를 언제나 행복하게 했다. 지금도 떠올리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대단한 철학이 있는 것처럼 한참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비 오는 날씨도 좋아한다는 말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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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혼자 갔고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왔는데 그 11월 말 날씨에 매일 비가 추적거리고 오는 것 같은 그 날씨가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한다. 해만 지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그 골목길을 다람쥐처럼 쌩쌩 오가는 기분이 그녀를 자꾸 끌어당긴다.
그곳 사람들에겐 이상한 유머감각이 있다. 한 번은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고 와이파이를 물어보려는데 오른쪽 바에서 술을 마시던 아저씨가 친절하게 칠판을 보여 준 곳에 “wifi password: ask at the bar”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 그녀는 이것이 웃으라는 포인트라는 것을 캐치했다.
또 스코틀랜드는 유령, 마녀, 요정 이야기의 천국이다. 어딜 가나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위스키도 빼놓을 수 없는 화제다.
영국을 좋아하는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무지 사랑한다. 작가 쥘 베른이 스코틀랜드 여행을 경험으로 쓴 <녹생 광선>,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캐슬린 제이미의 <시선들> 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한다.
걷는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하는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할머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걷기의 역사>같은 책들의 이야기도 흥미가 생긴다.
1931년 도쿄에서 출발한 하야시 후미코는 시모노세키 항을 거쳐 부산, 서울을 거쳐 러시아를 통해 유럽으로 향했다. 그녀의 여행 이야기가 <삼등여행기>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출간된 책 <방랑기>를 보면 도쿄에 상경해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미코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인 한 사람이 일본 전체를 대변할 수 없음에도 그 시절 여행을 했다는 일본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매일 남은 돈을 세고 쓸 돈을 센다. 눈앞의 것을 즐기는 기분과 거기에 드는 비용을 버거워하는 기분이 교차해 마음을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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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때로는 행복의 가면을 쓰고서 유혹적으로 다가오듯이, 행복의 짓궂은 점은 이따금 감쪽같이 불행으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책 속에서 이야기하는 책 <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 중에서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의 장점 중 하나가 자신의 돈 쓰는 습관을 점검할 기회가 된다. 여행이야말로 우아하게 가난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녀는 한 도시 당 최소한 5일은 시간을 들여 보는 편이다. 도착한 날은 종일 걸어 다니며 도시 지리를 대략 익힌다. 그렇게 며칠 머물다 보면 걷기 좋은 구역이 금방 보인다.
한 바퀴 돌면 기분이 좋아지는 산책길은 서울 시내에서는 경복궁역에서 부암동 주민센터까지 가는 길과 부근의 골목을 에두르는 가희동 길, 시청역에서 정동길을 걸어 도착하는 경향신문사까지의 길이다.
나도 걷는 것을 좋아했었고 그녀가 걸었던 길들 주변에서 맴돌던 기억이 나서 그런지 눈가에 그 길들이 금세 그려지는 기분이다.
배가 고플 정도로 걷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살아있음은 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서울 다음 편하게 느끼는 도시는 교토. 교토에 머물 때는 언제나 시조카라스마의 비즈니스호텔 체인, 그곳에서부터 가모강을 건너 야사카진자로 걷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조깅을 했다는 가모강.
처음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할 땐 창가 마니아였고 일부러 비행기 환승 표까지 끊어서 오래 타기도 했었다는데 지금은 장거리일수록 복도 자리에 앉으며 3시간만 타도 고통스럽다고 한다. 나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비행시간에 지쳐서 애매한 자리보다는 가능하면 맨 앞쪽으로 자리는 일어서서 다니기 좋은 자리로 선택한다. 비행기 타는 것 자체가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갈수록 비행기 이동시간은 두렵기도 하다.
그녀의 여행지 일본과 중국 여행에서 나도 여행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일본어는 그래도 좀 배웠다고 용감하게 언니를 끌고 신칸센을 타고 여행을 했던 기억도 난다. 베이징 여행에선 자금성 옆에서 북한 식당에서 평양냉면을 먹은 기억도 난다.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스타일의 한복을 입었던 젊고 예쁜 종업원들의 얼굴. 맛은 어땠었지? 그건 왜 잘 기억이 안 나나 몰라. 엄마랑 추석에 여행을 갔었는데 암튼 음식이 너무 맞지 않아서 호텔 조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번이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마신 기억만 난다.
돌아보면 가족들과 했던 여행이 언제나 좋았던 기억이 나서 그때 하길 정말 잘했지 싶다.오늘이 지나면 언제나 '그 때'가 된다. 또 다시 올 그 때를 기다리며..
키스도 여행도 직접 해 봐야 느낌을 안단다.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낯선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되살리며 이야기를 생각한다. 또 미래에 만들고 싶은 여행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유여행이냐 패키지여행이냐를 고민하면 때때마다 다르다고 한다. 보통은 자유여행을 선호하지만 바티칸 여행에서 현지 당일 투어를 했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돈 3만 원 들여서 한 일 중 가장 잘 한 일로 기억된다고 이야기한다. 미술관 같은 경우는 스토리텔링이 상당히 흥미를 더해 줄 것 같다. 지난여름에 고궁 투어란 걸 처음 해 봤는데 역시나 스토리텔링 효과가 상당함을 느꼈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음식 이야기.
음식의 대부분이 귀한 것들이라지만. 소의 내장, 닭똥집, 선짓국, 수육, 말 대창, 양대창 같은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 음식들이 많았다. 언제나 내가 골고루 잘 먹는다는 생각을 하는데 새삼 내가 못 먹는 음식이 많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야사이산도(야채 샌드위치) 라던가, 단팥을 두른 밥이라는 것은 머릿속에 음식처럼 상상이 된다. 관심사가 비슷해서 개인적으로는 괜찮았다. 역시 여행은 싱글에 해야 돼. 그나마 결혼 전에 여행을 조금이라도 했으니 다행이라고 종종 말하곤 한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의 꿈은 물이 건너 가 버린 일이라 특히 올여름 영국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그녀의 영국 사랑 이야기에 그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니 타이밍이 참 중요하다. 언제 그 타이밍이 또 올지 모른다.
지금은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여행에 관해서라면 악몽에 가까웠던 많은 것들이 웃음과 함께 좋은 기억으로 남곤 한다. 실제 경험과 기억 사이에 발생하는 왜곡은, 밥벌이가 매일의 고민인 사람들의 발버둥 아닐까. 그런 뻔한 것들을, 일상의 영역에서보다 더 즐겁고 덜 아프게 배우는 게 내게는 오랫동안 여행이었다….. 여행이라는 환상에 돈을 지불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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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남은 돈을 세고, 쓸 돈을 센다. 눈앞의 것을 즐기는 기분과 거기에 드는 비용을 버거워하는 기분이 교차해 마음을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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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말로 우아하게 가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집에서 가난한 것보다는, 여행지에서 가난하면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는 자위라도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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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가족이 함께 ‘고립’되는 경험이다. 매일 아침 몇 시에 일어날지부터 맥주를 몇 잔 마실지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지내며 대화해야 한다.
좋은 마음으로 왔지만 당신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인 것이 많을 것이다. 이틀째까지는 참았는데 사흘째다 되자 ‘내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모드에 빠져버린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안 싸우는 경우가 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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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것은, 우울 치료제로 여행을 복용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더없이 넓은 동굴이고 또한 가장 작은 동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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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나 의미 있는 일.
그래. 그걸 인생이라고 부르더라고, 보통의 인생.
나에게나 의미 있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