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ssage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
2018년도 10월에 소천하신 유진피터슨 목사님은 생전에 35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책을 The Message 라고 한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유족들에게 “Let’s Go”라는 말을 남기도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Let’s Go”!
우리 시대의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 유진 피터슨의 책 메시지!
읽는것이 먼저다. 일단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새로운 말의 세계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게 된다. 하나님께서 시작과 끝을 쥐고 계신 그 대화에 우리도 참여하고 있음을 곧 알게 된다. 성경의 독특성은 ‘계시’에 있다. 우선은 그냥 읽는 것이 중요하다. 서두르지 말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읽다보면 우리는 알아듣기 시작한다. 성경은 우리가 읽는 책이지만 우리를 읽는 책이기도 하다.
오늘의 언어로 된 이 <메시지> 성경은 요즘 사람들이 쓰는 참신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에 맞춘 것이다.그리스어를 축자적으로 직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고 말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메시지’작업은 그가 35년간 목사로서 성경 원어와 일상의 언어라는 두 언어 사이에서 번역자 노릇을 했던 평생 해 온 일이었다.
성경의 요체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우리 삶을 가장 잘 묘사해 주는 단어이기도 하다.우리 삶에 맥락을 제공하고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다.성경은 모든 부분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성경을 이해하자면, 우리는 그 등장인물을 파악하고 배경을 이해하고 줄거리를 따라가야 한다.
창조-타락-이스라엘-예수-하나님의 새 백성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먼저 이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것이다. 4000페이지가 넘는 성경 전체의 길이지만 성경을 읽을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66권의 포인트만 밑줄을 그어본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함께 해 줄 안내서가 되어주었으면 싶다.
메시지 S저자유진 피터슨출판복있는사람발매2017.12.04.
<모세오경>
창세기
가장 먼저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삶을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삶의 기초시다. 창세기는 우리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할 수 있도록 돕는 언어를 제공한다. 창세기는 이 언어를 활용하여 견고하고 참된 기초를 세운다.
출애굽기
인류는 곤경에 처해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곤경 속에서 살아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곤경에서 우리를 건져 내기 위해, 엉망인 이 세상을 말끔히 치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담고 있는 감동적이고 극적인 실화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진리나 엄밀한 정의나 주의를 끄는 구호가 아닌 ‘이야기’로 구원을 제시하신다. 이 출애굽기 이야기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역사의 혼란으로부터 건져 내어 구원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 사용하시는 주요 수단이다.
레위기
인류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습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길들이겠다는 고집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길들이겠다고 결심한다. 우리의 계획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방법을 생각해 낸다.우리의 계획과 야망과 기호에 들어맞는 크기로 하나님을 축소시키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럴 수 없다고 훨씬 더 고집스럽게 말한다. 우리는 소원성취라는 우리의 환상이나 세상의 명성을 얻으려는 이상적인 계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한다. 우리의 그러한 시도로부터 하나님을 구별해 주는 단어가 다른 아닌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대로 살아 계시며 우리의 경험과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살아계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중심이시며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께 응답하며 살기 위해서는 많은 가르침과 훈련이 필요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민수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성장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일이다. 민수기는 그처럼 녹록치 않은 성장 과정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우리는 조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지낼 때는, 업무를 분담하고 지도자를 임명하고 물품 목록을 갖추어 두어야 한다. 수를 세고 목록을 작성하고 명부를 갖추는 것은 기도와 가르침과 정의만큼이나 하나님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다. 우리는 관계의 측면에서도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는 사려 깊은 훈련이 필요하다. 수를 세는 일과 다툼이 민수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신명기
신명기는 설교, 성경에서 가장 긴 설교다.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온 이스라엘 자손 앞에 설교하는 모습을 제시한다. 신명기는 그의 마지막 설교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죽음의 위협을 받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성경의 구원이야기에 등장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여전히 눈이 맑고 발걸음이 활기찬 모습으로 이 장대한 설교를 전하고 죽는다. 여전히 말씀과 생명으로 충만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모압평야는 이집트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종의 상태에서 자유인의 상태로 나아가는 사십 년 여정의 마지막 정거장이다. 요단 강을 건너 새 땅을 차지할 준비가 된 지금, 모세는 모압 평야에서 이 위대한 설교를 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과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을 하나라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한다.
<역사서: 여호수아~에스더>
성경 안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토론하는 추상적 관념도, 제사장들이 다루는 괴이한 능력도 아니었다. 창조의 일부가 아닌 하나님은 사람의 연구대상, 관찰 대상, 관리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아울러 하나님은 인격체시다. 이 책들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 속에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개입되는 그런 역사 읽기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여호수아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거룩한 땅, 가나안 땅, 그 땅! 그곳은 유구한 역사의 거대한 문명들 사이에 낀 보잘것없는 지역이었다. 그 협소한 지역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두 위대한 문화권과 경제권 사이에 놓은 다리라는 점을 제외하면 하등의 중요성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의 오백 년 동안을 땅 없이 살았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열두 아들은 모두 가나안 땅을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그후 400년도 넘도록 이집트에서 종으로 살았고 모세의 인도로 자유민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아래 사십 년간 훈련을 받았다.여호수아서를 열 때 우리가 만나는 그들, 그날 요단에 진 친 무리는 불과 얼마전에야 자유의 몸이 된 초라한 유랑민이었다. 여호수아서를 읽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거룩한 전쟁’이라 불리는 군사행동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목적은 언제나 혼란, 위기와 죄, 파탄,일상적 노동, 평범한 꿈 같은 것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힘을 내어라.!용기를 내어라!
사사기
성경을 펴는 독자들은 응당 성경에서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될 만한 선하고 고귀하며 존경스러운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사사기의 각 장마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적나라한 폭력행위들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선한 일에 반드시 선한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도덕적.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든 우리를 사용해 일하신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그러나 사사기를 읽는 우리는 이스라엘에 왕이 있었음을 안다. 바로 하나님께서 왕이셨다.
룻기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방식들로 짜인 거대한 융단이다. 시내 산에서 절정에 달하는 줄거리에 등장하는 큰 이름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또 그 후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큰 이름들(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솔로몬)을 보면 “거기는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올라가 배역을 맡을 수 있는 무대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부이자 가난한 이방인이었던 룻의 이야기는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보잘것없는 이방인이었던 룻, 그러나 그녀의 삶은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했고 그녀는 오벳을 낳았는데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였고 다윗의 할아버지였다”.
사무엘상하
한나, 사무엘, 사울 그리고 다윗
주전 1000년어간의 일들인데 천여년 전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고 천 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인생경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경험하기에는 너무도 좁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네 인물이 보여주는 삶의 전형이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를 기도하며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얻게 되는 바가 있다. 바로 인생의 참 의미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한나, 사무엘, 사울, 다윗의 삶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읽는’법을 배울 때 우리 모습을 긍정하고 자유를 누리는 반가운 결과가 따라온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기에 맞춰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초대한다. “이 안으로 들어오라.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살아라. 이것이 인간의 삶이다. 한 인간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것이다.”
열왕기상하
마음을 다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에서 열왕기서는 주권적 통치 아래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한 필수자료를 제공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을 달라고 했고 오백년에 걸쳐 사십명이 넘는 왕들이 나타났지만 내세울 만한 성과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인간이 제아무리 좋은 의도와 재능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일에는 턱없이 부족한 존재였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해 이 실패의 역사를 가차없이 폭로한 책이 바로 열왕기서다. 오백 년 역사를 들추어 “왕을 갖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떼썼던 히브리 사람들의 요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밝혀 낸 혹독한 증명서인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혼란의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쉼 없이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 오셨고 그 일에 그들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이다. 열왕기서를 읽는 유익은 실로 엄청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통치는 힘있고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된다고 생각했던 억측이 무너지면서 그분의 주권을 한층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게 된다.
역대상하
같은 이야기라도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는 먼저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등장했다. 그로부터 백여년 후 같은 이야기를 다른 목소리,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한 책이 바로 역대기다. 이제도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은 외세에 저당 잡힌 상황이고, 내부적으로도 잡다한 종교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때 한 저자가 팔을 걷고 나서서 이미 익숙해진 오래된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들려준다.그의 임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백성임을 다시금 확신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이끌어내는 일었다. 이 사람은 동족의 외면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의 핵심 정체성은 다윗 전통에 입각한 예배 공동체에 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는 이 일을 이제 우리가 읽게 될 이 책을 쓰는 것으로 완수했다. 이 이야기는 이름으로 시작한다. 이름 없이는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없고 이 이름들의 바다에 잠길 때 우리는 개인적이고 유일하고 인격적인 고유의 영적 차원에 눈뜨게 된다. 역대기는 종교의 탈인격화를 막아주는 강력한 방어물이다. 역대기는 또 인간의 삶에서 바른 예배가 차지하는 핵심적 위치를 증언하는 책이다. 역대기 서술의 중추는 예배다. 예배 장소(예루살렘 성전), 예배 사역자들(제사장과 레위인들), 예배 음악(성악과 기악), 그리고 예배의 장인이자 예배의 충실한 수호자인 다윗 왕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전 생애에 걸쳐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은, 죽기 얼마 전 백성의 넉넉한 마음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정체성을 기르고 정체성을 기르고 지키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예배다. 올바르고 충실한 예배다.
에스라
초강대국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와 그들의 성읍과 성전을 초토화시켰고 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그로부터 128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소수의 유대인들은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운 상황에 에스라가 등장한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 에스라의 구원 사역을 실질적이고 결정적으로 도우셨다. 그로인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보존된 것이다. 에스라는 예배와 성경으로 이 일을 해냈다. 먼저 그는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했다. 성경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도록 인도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따를 때에야 비로소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
타국 왕에게 고용되어 정부 일을 하는 관료했던 느헤미야는 후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맡게 된다. 학자이자 선생인 에스라가 그의 일을 도왔다. 에스라는 성경을 가지고 일했고 느헤미야는 돌과 회반죽을 가지고 일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엮이면서 하나의 거룩한 일을 이루었다. 두 일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거룩하거나 덜 중요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두 사람의 일이 모두 필요했다. 우리에게도 그렇다.
에스더
인류의 역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거나 대변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에스더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공공연히 혹은 암암리에 가해지는 이러한 폭력을 보여주는 창문이다. 주전 5세기 대제국 페르시아에서 포로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학살하려는 흉악한 음모가 있었다. 줄거리를 이끄는 인물은 셋이다. 먼저, 이야기 속에서 통상 ‘그 유대인’으로 등장하는 모르드개인데 사건의 뼈대 역할을 하는 그는 견실하고 신실하며 지각 있고 경건한 인물이다. 이런 그와 극명한 대립을 보이는 인물로 대학살 음모의 주모자인 오만한 악인 하만이 있다. 또 부모를 잃고 난 뒤 사촌 오라버니 모르드개의 집에서 자란 여인 에스더다. 거의 모든 시대, 모든 사회마다 하만 같은 자들이 나타나서 없애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를 멸절시킬 수 없다.
<시가서>
성경안에는 인간 경험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독특한 계열의 책들이 있다. 이 책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을 다루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지혜”라는 명칭이 따라붙는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는 성경의 지혜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꿈꾸던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하는 기쁨과 관계가 있고,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무엇이지?’하고 물으며 끊임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일과도 관계가 있다. 이 시가서의 기자들은 우리가 인간 경험 전체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욥기
욥은 정직하고 무죄한 사람이었지만 고난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묵묵히 감내하거나 경건하게 감수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나님 앞에 버티고 서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또 항의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다. “억울한 “고난이다. 욥은 고난에 직면하여 의문을 제기하다 고난을 존중하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더 큰 신비, 곧 하나님의 신비 안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고난의 가장 큰 신비는 고난에 처한 사람이 넘치는 경이감과 사랑과 찬양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예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 혼자만 고난받는 것 같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욥이 앞서 간 길을 뒤따르는 일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그런 캄캄한 순간에는 폭풍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 따져 묻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자리임을 알게 된다.
시편
오랜 세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몇 세기 전부터 기도하고 예배해 온 유대인들에게서 이 기도책을 물려받았다. 이 책에 담긴 언어를 우리 것으로 삼을 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응답할 수 있다.
잠언
“지혜’는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가장 선한 일을 행하는” 일상의 삶을 가리키는 성경적 용어다. 지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 안에서 잘 살아가는 삶의 기술이다. 잠언은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전도서
전도서는 허무함의 경험을 증언하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 아닐까 싶다. 전도서가 성경에 반드시 들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인생에서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 보려는 사람들의 갖가지 헛된 시도를 멈추게 하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방법과 뜻에 따라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아둥바둥 애쓴다. 전도서는 우리 힘으로 우리 식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온갖 오만과 무지한 태도를 까발리고 버리게 만든다.
아가
아가를 조금만 읽어보면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절묘한 사랑 노래와 노골적인 성애표현이다. 아가는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 감정적, 영적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음을 설득력있게 증언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아가는 서로 다른 두 인격체가 이루는 사랑의 연합을 노래함으로써 창세기의 그 대목을 상세히 설명한다. 아가를 읽으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목표와 이상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리는 정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아가가 노래하는 황홀감과 충족감을 보면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임을 알게 된다.
<예언서>
예언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 삶에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 큰 존재다. 예언자들의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싶다면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맞추어야 한다. 예언자들은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를 어마어마한 신비 속에 풍덩 빠뜨려 넣고 만다. 그들의 메시지와 환상은 우리가 실재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쳐 놓은 온갖 허상을 모조리 꿰뚫고 들어온다.인간에게는 진실을 부인하고 자신을 기만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우리는 죄의 결과를 감수하는 능력을 스스로 거세하며 심판을 직시할 수도, 진실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런 때에 예언자들이 나선다. 그들은 우리를 도와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삶을 알아보게 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예언자들은 편협한 사고와 좀스런 종교생활에 틀어박혀 있던 우리를 흔들어 경이와 순종과 경배가 약동하는 공간으로 나오게 해준다.
이사야
이사야에게 말이란, 참된 것과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을 만들어내는 물감이요 멜로디요 조각칼이라 할 수 있다. 이사야는 히브리 민족이 낳은 최고의 예언자요 시인이다. 이사야의 말은 ‘거룩’에 대한 우리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거룩, 거룩, 거룩’은 장식용으로 수놓은 레이스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깃발이다. 진정한 혁명이다. 이사야서는 실로 광범위한 책이다. 이 지구 행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포함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이사야서는 ‘구원 교향곡’이다(이사야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주된 주제 셋은 심판, 위로, 희망이다.
예레미야
어려운 시기를 맞는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그 시기를 헤쳐 나갈지에 관해 도움을 얻고자 할 때, 가장 많이 찾는 예언자가 예레미야다. 예레미야의 험난했던 인생살이는 히브리 역사상 가장 험난했던 시기 중 하나와 겹친다. 그는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가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참되고 정직하며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는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은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임을 알고 평안할 수 있다.
예레미야 애가
히브리 역사의 중추를 이루는 두 사건은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생활’이다. 이 두 사건은 구원이 가져오는 기쁨으로부터 심판에 따르는 고통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광범위한 경험들의 좌표를 정해주는 두 개의 축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 애가는 상실과 고통을 다루는 형식과 어휘를 신앙 공동체에 제공한다. 개인과 국가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고통 속에 친히 들어오시며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증언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고통에 존엄을 부여한다.
에스겔
성경 저자들 가운데, 에스겔은 재난을 만난 이들의 스승이다. 닥쳐온 재난, 곧 주전 6세기 바벨론의 침공 앞에서 이스라엘이 보인 주된 반응은 부정이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재난 가운데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의 일하심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에스겔은 폐허와 잔해 더미 위에서 일하셨던 하나님과, 그 재난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여 그분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다니엘
다니엘서는 이야기 부분과 환상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야기 부분에는,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는 영혼들이 등장한다. 환상 부분에서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사는 민족들에게까지 미치는 그분의 주권적 다스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다니엘서는 영혼에 관한 여섯 이야기와 하나님의 주원을 알리는 네 가지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과 생존을 다룬 여섯 가지 이야기는 우리가 하루하루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살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다니엘서의 네 가지 환상은 하나님을 가릴만큼 어지러운 세계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늘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라고 용기를 북돋운다.
호세아
호세아는 사랑의 예언자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비유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행하신 사랑을 비유로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가 최악일 때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얻기까지 끊임없이 구애하시고 참된 사랑을 몰랐던 우리를 마침내 사랑의 사람들로 변화시키신다. 이 이야기와 이 안의 언어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감상적이고 신경증적인 형태의 사랑들로부터 치유받기 시작한다.
요엘
요엘의 예언자적 설교는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힌다. 동시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믿음과 순종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한다. 요엘서는 임종 전,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남아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임종의 참회’를 할 수 있도록 이끄는 책이다.
아모스
다른 어떤 방식보다도 종교를 명분으로 해서 더 많은 착취와 학대가 행해진다. 세계적으로 종교에 기반을 둔 증오와 살인과 압제의 역사는 가히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아모스는 짓밟히는 가난한 자들의 대변자요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 자기들의 죄를 정당화하는 힘 있는 부자들의 고발자였다. 우리 자신의 종교가 제 잇속만 챙기는 행위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모든 언행을 예언자들의 불꽃같은 눈에 비추어 점검해야 한다.
오바댜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읽을 때에는 전체 맥락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오바댜가 맡은 임무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되었고 에서는 에돔 백성의 조상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주로 요단 강과 사해 서쪽에 자리잡았고, 에돔은 남동쪽에 자리잡았다. 이웃하는 두 민족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오랜 전쟁과 반목의 세월을 보냈다.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포로로 붙잡혀 가자 에돔을 피를 나누는 친족이 당하는 참사를 즐거워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나 보복과 독설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받은 통치권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시행하게 될 것이다.
요나
요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요나 이야기가 믿음의 삶을 격려하는 이야기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것은 그가 지고하고 위대한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나는 어리석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요나의 어리석음을 재료 삼아 일하시고 결국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내신다.
미가
예언자는 말을 사용하여 세상을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하는 법을 배운 이들이다. 미가는 주전 8세기에 해성같이 등장하여 예언자로 활동하고 문서를 남긴 기라성 같은 ‘문서 예언자’ 4인방(이사야, 호세아,아모스,미가) 의 마지막 멤버다. 그 역시 은유의 귀재다. 그는 언어를 사용해 우리를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세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사랑과 자비, 정의와 믿음, 죄악과 악같은 실재가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계신 세계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나훔
주전7세기, 앗시리아로 인해 온 세상이 공포에 떨던 시절 나훔이 예언의 말씀을 전했다. 나훔의 임무는 하나님의 백성이 앗시리아 공포증에서 벗어나 주권자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한껏 부풀려진 앗시리아의 실체를 드러내고 니느웨의 소란을 정리해 줌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상황의 본질에 주목하게 한다. 적들의 죄 못지않게 이스라엘의 죄 역시 혹독한 고발을 당한다.
하박국
믿음의 삶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예측 불허인 모험의 여정이다. 그 여정 가운데 만나게 되는 반가운 길동무 중 하나가 하박국이다. 하박국은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 해주는 예언자다. 그는 말하고 기다리고 귀 기울여 듣는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보다 큰 세상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한결같이 신뢰하는 삶이 유일하고 참된 삶임을 깨닫는다. 하박국은 우리와 출발점이 같았고 혼란에 빠져서 하나님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삶 속의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는 세상에 도달하게 되었다.
스바냐
우리는 자신에게 하나님을 이용할 권리를 주면서도 우리의 인간관계는 건드리지 않는 종교를 찾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잘 팔리는 종교들은 이런 유였다. 견실한 영적 삶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뿌리를 내린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우리는 모든 것이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관계들 안에서 어떤 결과가 생겨나고 최종 결산의 날이 온다. 스바냐는 우리를 향해 그 중대성과 긴급성을 외치고 있다.
학개
하나님께서 학개를 보내시자 총독과 대제사장도 그를 주목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임으로써 하나님을 높였다. 학개의 임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하여 하나님의 성전을(70년 전에 파괴된 성전) 재건하는 일이었다.
스가랴
동시대인인 학개와 더불어 유다 백성이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도록 독려하는 일을 맡은 예언자다. 당시 백성들이 직면한 문제는 무너진 성전과 도성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무너져 버린 상태였고 한 세기 동안 조롱과 멸시, 배신과 학대를 당해 온 그들이었다. 스가랴는 오랜 포로생활이 허물어뜨린 그 존엄한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일에 중심 역할을 감당했던 예언자다. 그의 환상과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뚜렷이 각인시켰고 유다 백성들이 오랜 오욕과 굴욕의 세월을 이겨 낼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다.
말라기
말하기는 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게 한다. 지금 우리에게 오고 계신 하나님을 기대하고 맞이하며 그분께 늘 응답할 태세를 갖추고 살아가게 한다.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는 메시지의 마지막 몇 문장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 세움으로써 ‘하나님과 영혼’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우리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신약전서
마태복음
“성취된다”는 말은 마태가 유독 많이 쓰는 동사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은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와 구원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에수 안에서 완성되는 것을 보게 된다.
마가복음
마가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도입은 한 문장으로 끝내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곁길로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거의 모든 문장에 숨 가쁜 흥분의 기운이 묻어난다. 메시지를 빨리 받을수록 우리한테 좋은 것이다. 그 메시지란 하나님이 여기 계시며, 그분이 우리 편이시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누가는 바깥 사람, 소외된 사람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한 사람이다. 그 자신이 바깥 사람이었던-신약성경 기자들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누가는 당대의 기성 종교가 흔히 바깥 사람으로 취급하며 소외시키던 사람들을 예수께서 어떻게 끌어안아 안으로 포함시켜 주시는지를 보여준다.
요한복음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세계를 존재하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요한의 창세기의 여는 말과 유사하게 말씀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의 인격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입고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 예수 그 분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요한은 기록한 이유를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예수의 구경꾼이 되거나 메시지의 팬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누가의 과제다. 네 명의 저자 가운데 누가만이 사도들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준다. 예수의 이야기는 예수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구경꾼이 아니었음을 누가는 분명히 밝힌다.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일하셨으며 우리안에서도 그렇게 하심을 의미한다.
로마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약 30년 전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 로마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로마 작가들이 쓴 책들 전부를 다 합쳐 놓은 것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이 편지는 왕성하고 열정적인 사고가 낳은 작품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징집된 지성의 영광스런 삶이 여기 나타나있다. 바울은 유연하고 폭넓은 사고를 가진 지성인이었다. 그가 논리와 논증, 시와 상상력, 성경과 기도, 창조와 역사와 경험을 짜 넣어 써 내려간 이 편지는 기독교 신학의 으뜸작으로 꼽히는 저술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고대시대에서 고린도 사람들은 제멋대로 굴고 독주를 마시고 성적으로 문란한 무리라는 평판을 받았다.바울은 그들의 목회자 자격으로 1년 6개월을 그들과 함께 보내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자세히 전하고 그들이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구원과 거룩함의 새 삶을 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그런 다음 그는 길을 떠나 다른 도시와 다른 교회로 갔고 고린도의 소식을 듣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 교우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는 목회적 대응의 고전이나 다름없다. 그의 대응은 다감하고, 확고하고, 명쾌하고, 어긋남이 없다. 바울은 그들이 사태를 혼란스럽게 하기는 했지만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들 삶의 중심 주제가 되셨다고 확신한다.
고린도후서
바울이 두 번째 편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바울의 지도력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지도력이갖는 진정한 본질을 면밀히 파헤쳤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과 동역자가 되어 그들과 함께 힘을 모아 일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원했다. 그것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임을 알았다.지도력을 행사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은 이 편지를 쓴 바울과 고린도 교회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
갈라디아서
다소의 바울은 예수를 만난 뒤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 곧 하나님 안에서 자유의 삶을 사는 존재로 변화되어 자기가 만나는 누구에게나 그 삶으로 초대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그 교회들이 처음 가졌던 자유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그의 편지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친다.
에베소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삶에서 따로 놀 때가 있다. 에베소 교우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죄로 난파된 세상에서 깨어진 모든 것을 두루 봉합한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바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하나님의 계획 “ 광대한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시키고 종합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에 이바지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꾸준히 이 일에 참여해야만 한다.
빌립보서
빌립보서는 바울이 행복에 가득 차서 보낸 편지다. 그는 감옥에서 편지를 썼고 그의 활동은 경쟁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예수를 섬기며 스무 해가 넘도록 혹독한 여행을 한 끝에 지쳐 있었다. 그가 행복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그가 처한 상황과 무관한 것이었다. 그의 행복은 넘쳐흐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어느 한 사람 안에 가두어 둘 수 없는 넘쳐흐르는 것이다.
골로새서
골로새라는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선호하는 많은 인물들 중의 하나가 아닌 그들 삶의 중심으로 예수를 돌려놓으라고 촉구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와 구원의 중심에 계시며 그분과 견줄자가 없음을 확신하면서도 겸손한 자세로 논증한다. 그의 편지에는 가장 사려깊은 사랑의 에너지가 담겨 있다. 명석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지성과 따뜻하고 놀라울 정도로 친절한 마음의 결합을 우리는 보게 된다.
데살로니가전후서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믿음을 붙들고 산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끝없는 게으름을 조장하는 수간이 되기도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무엇보다도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 안에서 이루실 일을 확신하면서 팽팽한 긴장감과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격려한다.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세워진 영적 공동체에서 최선의 지도력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도 믿음과 확신의 길에 있는 그 무엇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바울이 젊은 두 동, 에베소의 디모데와 크레타의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그런 지도력을 계발하도록 격려하고 지도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빌레몬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은 가정과 이웃과 친구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오네시모의 주인이자 동료 그리스도인인 빌레몬에게 도망쳤던 종 오네시모를 돌려받는 것에 그치지 말고 맞아 주라고 부탁한다.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자신들을 급진적인 사회 변혁으로 이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 편지를 통해 맺어지면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히브리서
우리의 핵심 임무는 예수께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일에 응답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의 역할은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지금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쓴 이 편지를 다시 읽고 기도하며 우리의 길을 점검할 때다. 이 편지는 ‘지나치게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 “예수에다 이러저러한 것을 덧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편지다.
야고보서
일반적으로 교회는 선한 행실로 넘쳐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인간의 나쁜 행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직면해서 처리하는 곳이다. 야고보서에는 초대교회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자기가 맡고 있는 공동체 안에 그릇된 믿음과 잘못된 행실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것들을 마주해 진단하고 능숙하게 조치를 취한다. 깊이 있고 살아있는 지혜 흔히 볼 수 없는 본질적인 지혜가 여기서 드러난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여러 해 동안 작정하고 기도한 나머지 무릎에 굳은살이 두텁게 박혀서 “늙은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기도는 지혜의 기초다. 야고보는 그가 편지에 쓴 대로 살았다.
베드로전후서
베드로는 순수한 인격의 힘으로 동료들의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타고난 지도자였던것 같다. 그의 성품은 골목대장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베드로가 영향력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처신한 방식은 그의 영향력보다 인상적이다. 그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면 한결같이 순종했다. 베드로가 쓴 두 통의 편지는 성령께서 베드로 안에 빚으신 예수의 성품을 드러내 보여준다.
요한일이삼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려면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익혀야한다. 제대로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과 사랑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사랑안에서 삶을 경영하라”.요한이 보낸 세 통의 편지는 그 일을 제대로 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그 초점은 메시아 예수다.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풍성하고도 참된 이해를 제공하신다. 하나님과 사랑은 예수 안에서 빈틈없이 연결되고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람들은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가 하나님과 사랑의 긴밀한 일치를 다시 회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유다서
유다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보낸 편지는 영적 공동체 안에 침투한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진단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자세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는 것”이다. 유다는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한가운데 머물라”고 격려한다.
요한계시록
1세기 후반 목회자였던 밧모 섬의 요한은 예배에 마음을 둔 사람으로 그의 최고 관심은 예배였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그의 환상은 그가 밧모라는 지중해의 한 섬에서 어느 일요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찾아왔다. 그는 육지에 있는 일곱 교회를 순회하며 돌보는 목회자로서 그의 주된 임무는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었다. 예배는 예배를 드리기 힘든 상황에서도 수행할 수 밖에 없는 임무다. 요한계시록은 수월하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목사일뿐 아니라 시인이기도 한 요한은 은유와 상징, 이미지와 암시등을 즐겨 사용했다. 요한과 벗이 되어 함께 예배드릴 때 우리의 예배는 더 긴박하고 기쁜 가득한 예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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