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저자 :하비 콕스: 1929년에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대학과 예일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이후 하버드 신학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다. 1965년 출간한 《세속 도시》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14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10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으며, 1988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세기 10대 영향력 있는 신학자가 되었다. 《세속 도시》 이후 콕스는 교회가 교회 체제보다 사람들의 신앙과 실천에 중심을 두어야 하며 사회 변화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비 콕스는 해방신학과 같은 제3세계 기독교 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종교 간 대화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학자이자 실천가인 하비 콕스 자신의 신앙생활과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와 미래 전망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지적인 탁월함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종교 분야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다. (출처:갓 피플)
성서는 초청이고 결말이 열려 있는 역사의 살아 있는 기록이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존경받는 종교학자 하비 콕스가 성경을 읽는 세 가지 방법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적절한 시기에 정말 유익한 책을 만나서 기쁘다.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해도 가까이하려고 노력하는 나로서 늘 느끼는 것이 ‘책과 나와의 타이밍’이다.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했던 책이다. 참 흥미로웠고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깊은 단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서를 문자주의로 읽던 것에서 역사적 이해를 거치고 영적 이해에 이르기까지 마치 가시로 뒤덮인 사막을 통과한 것 과 같은 과정을 겪으며 개인적인 성서에 대한 시각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읽고 더 깊은 이해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종종 의문을 갖게 되는 부분을 만나기도 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때때로 그런 의문을 갖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방어적 문자주의의 태도다. 세상의 학문도 공부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많은 투자를 하는데 내가 믿는 것을 그냥 무턱대고 믿는다(?) 는 것도 조금은 위험해 보인다. 이런 의문과 노력을 성서의 진리에 치명적인 위협이나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오히려 종교적 힘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 강화시킨다고.
성서고고학은 구약 책들 중 다수가 기록 편찬된 시기가 책들 속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수 세기 뒤라는 점을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작업을 한 사람들은 다채로운 디테일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이런 자그마한 흠들이 책의 영적 메시지-그리고 때론 책의 전반적인 역사적 가치 또한- 손상시킨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로
역사적으로
영적으로
그는 성서를 읽을 때 최소 번역본 둘 이상을 비교하며 읽는 것을 제안한다. 같은 히브리어 원문이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번역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번역만 열중하다 원문에서 멀어지는 경우도 가끔 있다는 것이다. 챕터마다 더 깊은 공부를 위한 팁도 준다. 성서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면서 읽기 되면 이해가 더 깊어진다.
성서의 영웅들은 반신이나 완전한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유혹 받고 똑같이 약점을 지닌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다.
-랍비 나훔 사르나
*목차*
1장 뱀, 홍수, 악의 신비 / 창세기
2장 모세의 발자취를 따라 / 출애굽기
3장 가나안 정복의 전투들과 단막극들 / 여호수아기
4장 쓰레기 더미 속에서 하나님께 대꾸하기 / 욥기
5장 목소리 잃은 자들의 목소리 듣기 / 아모스와 예언자들
6장 최후의 네 권으로 / 간직된 복음서, 버려진 복음서
7장 저자들의 어깨너머로 보기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8장 타르수스의 바울과 함께 여행하기 / 서신서들
9장 난기류 속 여행에서 살아남기 / 요한계시록
10장 오늘날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오늘날 성서를 읽기 위해서는 상상의 도약이 필요하다. 적절히 거리를 두고 성서를 연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본문 속에’ 자신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경우 우리의 상상의 도약이 시작되는 곳이 기원전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말하는 소소한 즐거움에서여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 책이 쓰인 7세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 위협의 시대를 살아간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느껴 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의미를 불어넣기 위해 그 옛 시대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재사용하고 재창조하였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다.
102쪽
우리가 이야기체 역사를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묘사하는 사건들에 관한 자료를 읽는 것이 아니다. 사건들로 대변되는 저자(들)와 공동체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를 읽는 것이다.
-Mario Liverani 108쪽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소름 끼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고통스럽지만 꼭 알아야만 하는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다-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십자군은 사라센 사람들을 죽이려고 질주할 때 안장 위에 오르면서 "하나님이 원하신다”라고 외쳤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군인들이 진군할 때 허리에 찬 버클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p120
욥기는 아랍어와 아람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촘촘히 박혀있어서 노련한 언어학자들도 차 곤란하게 만든다.
우리가 예언서를 읽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역사의 어느 한순간에 그들의 말이 그들의 시대에만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고통이라는 역겨운 불의를 고스란히 맞닦드리게끔 한다.
최근에 발견된 도마복음서는 성서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느 책을 넣고 어느 책을 뺄지 합의에 이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종교 개학의 시대에도 루터는 야고보서가 신약에 있지 말아야 한다는 느낌을 가졌고 계시록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었다.
복음서가 한 권이 아니라 네 권이 있다는 것이 대단히 유익하다. 각 복음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특정 청중을 염두에 두고 썼는데 이 독자층은 지리적 위치와 문화적 맥락과 종교적 배경에 따라 다양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기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중심이 예수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했지만 예수의 의의에 대해서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견해를 지녔다. p237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마태가 마태복음을 쓰고 있던 당시가 기원후 70년 로마가 수천을 죽이면서 유대 반란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했던 기억이 여전히 사람들 마음에 간직돼 있는 때였다는 점이다. p244
→ tip 책과 어울리지 않는 조언 하나: 성서를 닫고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들어보라. 그것을 ‘제5의 복음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21qlB0K-Bs&list=PLEi0wgn3k0_daETuKvRdpsanis1jnxeaW
내 신학적 사상들과 그것들이 도달하는 결론들에 자네가 놀라고, 어쩌면 걱정할 수도 있겠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네가 가장 그리운 이유일세. 내 생각을 명확하게 만들기 위해 그것들을 함께 논의할 다른 적격자가 나한텐 없기 때문이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질문은 이걸세. 기독교란 정말 무엇인가? 또는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정말 누구인가?
1944년 감옥에서 쓴 본회퍼의 편지 중에서
본회퍼의 질문은 개인적으로 각자 질문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기독교란 무엇인가?
1945년 12월 이집트의 나그함마디 근처 광야 동굴에서 52개의 본문을 간직한 고대의 도서관이 발견된 이래. 이제 학자들은 한때 그런 복음서와 편지들이 수십 개, 어쩌면 수백 개까지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초기 기독교의 학자들과 주교들이 무엇을 넣고 배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하는 중이다. 어떤 기준을 그들이 사용했겠는가? 그 기준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가? 어떤 책이 정경에 포함됐다고 해서 꼭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거나 출처가 분명하다거나 심지어 영적으로 가치가 있음을 뜻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그것의 의미는 단지 그 본문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에 대해 당시 발전하던 합의를 충분히 대표했고 그래서 공적 예배에서 읽힐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표준을 고려해볼 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비공식적인 ‘정경화’작업에 사실상 계속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숙고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성서의 페이지들을 찢어내지 않는다. 그러나 공적 예배에서 거의 한 번도 읽히지 않는 서서의 책들이 있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은 일종의 ‘톱 20’에 들어서 우리가 늘 듣기도 한다. 성서 일과를 따르더라도 이런 편애를 막지 못한다. p306
요한이 다루는 딜레마-곧 하나님께 최고의 충성을 두는 이들이 그들의 충성을 동일하게 기대하는 국가의 요구에 어떻게 응답하는가-는 기독교인들이 결코 벗어나지도 다 풀지도 못한 딜레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고 기독교가 완전히 합법적이 되었을 때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6세기 종교 개혁 운동가들 중에는 칼을 들지 말라고 한 예수의 명령을 따를 것을 주장하면서 군대에서 싸우기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칼뱅이나 루터 같은 보다 유력한 종교 개혁가들에게 지탄을 받고 처형당했다. …. 요한은 그것을 붙잡고 씨름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요한의 방식을 따랐는지 알 수 없다…... 이제 황제의 호의와 편의를 누리는 제국화된 교회는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순교당한 첫 기독교인은 아빌라의 프리스킬리안이라는 사람이다. 주교였던 그는 제자들과 참수당했다. 그 후 300년간 교회 관리들과 긴밀히 협력하던 제국의 권력자들은 신앙 고백의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약 이만 오천 명의 기독교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개혁 전통의 기초를 세운 존경 받는 칼뱅조차 세르베투스의 견해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1553년 10월 제네바에서 그를 처형할 것에 동의했다. 세르베투스는 화형을 당했다. p321
오늘날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계시록의 마지막 절에 다다르고 난 후에도 아직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이 내포하는 질문을 매듭짓지 못했다.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에 관해 생각해보
고자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위해,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찾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성서를 읽는 이들에 대한 것이다. 그 모든 눈부신 다양함에 성서가 한 가지 이야기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드라마틱 한 상호작용에 관한 책이다. 그 이야기는 불완전한 때로 큰 결함을 지닌, 인간의 언어와 지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그러나 그 드라마는 계속 이어지는 플롯과 방향을 지닌다. 그리고 성서의 목소리는 독자들에게 그 사건의 일부가 되라고 초청한다. 성서 자체가 답을 준다. 전체 66권을 관통하는 중심 줄기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다. 핵심은 성서가 바라는 바를 향해 순수하게 열린 마음을 갖고서 그 속에서-발견하는 것 때문에 어쩌면 당황하고 흔들리기까지 하면서 - 성서를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메시지를 놓치게 될 것이다. p329
내 관점과 다른 관점으로 성서를 읽고 생각하기 위한 자료가 너무나 많다. 신나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는 일이다. 그러나 선별적으로 성서 읽기를 검토하고 대조함으로써 보다 든든하게 서고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성서는 위험하다. 성서의 몇몇 부분을 오늘 우리를 향한 명령으로 이해하면서 성서를 읽는 것은 사실 위험하다. 성서는 역사다. 그 역사를 마주하는 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성서는 서구 문명의 제도들과 가치관들과 세계관뿐 아니라 최근 역사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형성해왔다. 성서는 우리 언어와 문학, 우리 예술과 음악 전체를 통해 울려 퍼진다.
성서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고전의 정신 분석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우선은 정신의 표층에 있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다음 층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서 밑에 숨어 있던 것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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