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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한 권의 책

종교의 미래 The future of faith

by 북앤라떼 2020. 9. 9.

종교의 미래 The future of faith

Harvey cox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본다' 는 부제의 책 <종교의 미래>는 원제목이 <The future of Faith>이므로 '신앙의 미래'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하비 콕스는 바야흐로 성령의 시대가 오고 있으며, 이 흐름을 막으려는 적대세력으로 '근본주의'를 지목한다.

하비 콕스는 신앙(faith)과 믿음(belief)을 구별한다. 신앙은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확신"이며, 믿음은 '견해'와 같은 것으로 훨씬 명제적인 것이라고 한다.

하비 콕스는 그리스도교 역사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시작한 '신앙의 시대'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믿음의 시대', 그리고 최근에 나타나기 시작한 '성령의 시대'로 나눈다. 하비 콕스는 초기 신앙의 시대와 현재의 움직임이 더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며 처음에 없었던 신조와 성직 계급의 중요성이 약회 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수많은 세기 동안 신학자들에게 잘못 인도를 받아왔다. 이들은 ‘신앙’이란 그들이 만들어낸 무수한 신조들의 하나에 들어 있는 신학적 조항들을 충실하게 믿는 데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다. 어린 시절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의 말씀 속에서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몸부림치고 있을 때에도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세월이 지난 후 이런 통찰을 종교 연구와 신학에 대한 나의 사유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p35

우주의 신비는 경외심에서 비롯된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은 옳다.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의 배후에는 우리의 지력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으며 이것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오직 간접적으로만 우리에게 미친다.”

인간이란 호모 쿠아에렌스(homo quaerens질문하는 인간)다. “왜”라고 묻기를 멈출 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위대한 신비와 조우하는 세 가지 길은 우주, 자아, 타인 모두 우리에게 불안감, 불충분감, 불만감을 남겨준다. 신앙이란 신비 그 자체가 아니다. 신비를 향한 하나의 기본적 자세다. 그래서 그것은 다양성의 형태로 임한다.

신앙은 신비에 직면하여 느끼는 경외심과 더불어 시작한다. 그러나 경외심은 그다음 단계를 취할 때에만 신앙이 된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볼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자마다 우리는 이미 출항한 배에 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잔인한 박해 속에서도 신조도 성직 제도도 필요로 하지 않는 친교 관계 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살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될 때까지 그들의 원래의 삶의 형식은 이미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성직 계급 제도가 친교 관계를 대치하기 시작했고 믿음이 신앙을 대치하기 시작했다.

초대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근 연구에 의해 드러나는 첫 번째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다면적이었나 하는 것이다. 안디오크에서부터 골에 이르기까지 전 로마 제국에 걸쳐서 표준화된 신학이란 것도 없었고 단일한 관리 형태란 것도 없었고 일률적인 제의란 것도 없었고 공동으로 읽히는 성서라는 것도 없었다. 신앙에서 모두 예수에게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성직자 계급은 없었다. 예배 의식에는 모든 사람이 포도주와 빵과 공동식사, 기도, 성서 읽기에 참여했다. 그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침례를 받았다. 그들은 강력한 하나의 통일감을 느꼈다. 조직이나 위계질서, 신조가 아니었다. 그들이 같은 성령을 나누어 가졌으면 세상에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모두 하나가 되었다.

예수의 사후 몇십 년 이내에 시작해서 3세기 말과 4세기 초에 영구적인 형태로 굳어졌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성직 계급 제도를 세우기 시작했고 신조들을 제작해서 신도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했다. 신조들은 시대의 산물이다. 신조들은 그리스도 역사에서 중요 점들을 표시해 놓은 도로 표지판이다. 신조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이 직면했던 역사적 도전들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과 우리들의 상황은 같지 않다. 권력과 돈의 유혹과 마찬가지로 성직 계급과 신조들의 씨앗은 그리스도교 운동을 아주 일찍부터 부패시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의지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풍조가 득세하게 된 시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포용하고 후에 그의 후계자들이 4세기 말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승격시켰을 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길을 가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닌 교회적 제국이 되었으며 믿음의 조항들이 신앙을 압축하였다.

어떤 성서를 믿는가?

루터는 야고보서를 떼어내고 싶어 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루터는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임을 증언하는데 사람들이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오도하는 것이 두려웠다.

우리가 성서라고 일컫는 것이 신학적 기후에 따라 다양한 책들이 포함되기도 하고 배제되기도 하면서 세기마다 변하고 있기 때문에 성서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상상적 실험을 해보는 것이 유용하다. 그들이 서기 2세기에 성서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성서는 구약성서였다. 만일 그들이 <클레멘트의 첫째 편지>와 <바울 묵시록>과 같은 책들이 다양한 바울 서신들과 나란히 읽히고 있는 때에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책들은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서에 포함시키기를 원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15세기에 “경외서”로 분류되는 책들이 여전히 성서로 읽혔지만 몇십 년 뒤 사라진 시대였다면 또 어땠을까?

또 하나의 질문은 그들은 어떤 번역본을 믿는가이다.

아무도, 어디에도, 성서의 어떤 책의 원본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사본들의 사본들이다.

‘현대인을 위한 성서 Good as News’라 불리는 어느 길거리 화법체 번역은 이렇다. 록키(베드로), 매기(막달라 마리아), 배리(바나바)

지금은 우리가 자신 있게 성서라고 부를 수 있고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단 하나의 그러한 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사실에 승복할 때다. P250

사본들은 과오와 삽입이 생길 수 있다. 번역본은 그 제작된 시대와 그 제작자의 신학적 편견의 속내를 나타내는 표지를 달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본문들 너머로 본문들을 꿰뚫고서 그 본문들을 쓴 사람들과 그들이 지시하는 신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 대신에 상자를 씹어 먹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P251

그러면 성서를 믿어야 하는가?

성서를 신앙의 장애물이 아니라 신앙의 진정한 지지물로 다시 한번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처해있는 막다른 골목에 어떻게 빠지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는 학생들에게 선입견을 제쳐놓고 마음을 끄는 소설이나 좋은 영화에 뛰어드는 식으로 성서에 뛰어들라고 조언한다.(....) 우리는 성서가 어디에서 생겨났으며 남들이 그것을 해석하려고 어떻게 몸부림쳤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성서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 나는 성서가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듣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과거에 실제로 무엇이었으며 현재에는 실제로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신앙의 본래적 의미의 회복

처음 출발할 때에는 ‘신앙’은 역동적인 생활 양식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성직 계급이 단속하는 규정된 믿음 조항들과 제의적 의무조항들의 정교한 법전으로 팽창하게 되었을 때에 ‘신앙’의 의미는 비틀어졌다. 원래 신앙은 기본적인 삶의 길잡이를 의미했다.


짧게나마 책을 그대로 발췌하며 책의 미리 보기 정도로 해 두면 좋을듯하여 적어보았다. 책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어떤 부분들은 한번 읽고 소화하기 어렵기에 내가 이해되는 부분만 짧게 적어보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 엄마의 태에서부터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다. 단 한 번도 나의 신앙의 굴곡이라는 게 없었는데.. 그것은 주일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도 교회를 찾아가서 다 알아듣지 못하는 설교를 들어야 할 정도였으니) 언제나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이 나에겐 즐겁고 행복하다. 나를 지금까지 인도한 유일한 나침반이고 지도이고 정말 말 그래도 나 개인의 역사이고 삶이다. 한 번도 회의를 느껴본 적도 의심을 한 적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 이상의 큰 세계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교회(사람이 규정해 놓은) 밖의 세계나 학문을 대할 때 나의 신앙이 붕괴되거나 흔들릴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실제로 하비 콕스의 말처럼 신앙은 더 견고해진다. 다방면에서. 그 모든 것 위에 내가 믿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자칫하다 보면 자유주의 신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을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채택한 번역본의 성경과 목사님의 주요 믿음관으로 정의 내리는 누군가에게 이 책은 매우 경건하지 못하거나 혼란스러움을 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의심을 가득히 하며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확신한 것은 하비 콕스의 중심이 나는 확고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 역사와 함께 존재하며 지금도 하나님, 성령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냥 믿으세요" 보다, 또 번역본에만 의지하여 내가 늘 들어왔던 몇 가지 말씀만 요리조리 써먹는 것보다, 그래서 기복 신앙처럼 나의 안녕과 건강의 편의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보다, 역사를 공부하며 최초의 성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걸음은 건강한 신앙생활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과정 가운데 불안전한 사람들의 약속으로 번역된 성경과 교회를 의지하며 지나고 있는 순례자이다. 사람의 완전하지 않음 가운데 더 빛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함이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고 하비 콕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것은 공감하고 또 반대로 이견을 갖는 것도 매우 바람직하다 생각된다. 내가 세운 장벽을 허물고 틀을 벗어나 그분의 음성을 새롭게 듣는 마음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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