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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한 권의 책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by 북앤라떼 2020. 7. 29.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처음엔 책의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사회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견에 대한 권리와 존중은 필요하다.

지난 리뷰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 201쪽에는 신념의 도구라는 소 제목으로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로 시작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유시민이번 주에 지인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고 없이도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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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 신념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저마다 옳다고 믿는 삶의 원칙이 있다. 신념의 역할은 인생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신념은 때로 삶 그 자체가 된다. 사람은 신념을 위해 살기도 하며 신념을 위해 죽기도 한다. 우리는 신념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안다. (...) 신념에 따른 삶과 죽음이 훌륭하려면 먼저 그 신념이 훌륭해야 한다, 신념 자체가 훌륭하지 않으면 그 신념을 따르는 삶도 훌륭할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 책 203쪽

신념에 의해 죽은 사람으로 이 책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의 세르베투스를 이야기한다. 오늘 리뷰에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 부분은 남겨 두었다.

특별히 유시민 작가는 군부독재의 긴 터널을 지나온 사람으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를 살아봤다. 금서로 지정된 책만 소유해도 감옥에 가는 시대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이 책은 16세기로 돌아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공포정치에 분노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무신론자로 이 책을 만났기에 특별히 독재라는 것을 주목한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이 책을 만난다. 지난 봄에 리뷰를 썼던 책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도 이 내용은 등장한다.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저자 :하비 콕스: 1929년에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대학과 예일대학에서 신학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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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 개혁 운동가들 중에는 칼을 들지 말라고 한 예수의 명령을 따를 것을 주장하면서 군대에서 싸우기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칼뱅이나 루터 같은 보다 유력한 종교 개혁가들에게 지탄을 받고 처형당했다. …. 요한은 그것을 붙잡고 씨름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요한의 방식을 따랐는지 알 수 없다…... 이제 황제의 호의와 편의를 누리는 제국화된 교회는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순교당한 첫 기독교인은 아빌라의 프리스킬리안이라는 사람이다. 주교였던 그는 제자들과 참수당했다. 그 후 300년간 교회 관리들과 긴밀히 협력하던 제국의 권력자들은 신앙 고백의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약 이만 오천 명의 기독교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개혁 전통의 기초를 세운 존경 받는 칼뱅조차 세르베투스의 견해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1553년 10월 제네바에서 그를 처형할 것에 동의했다. 세르베투스는 화형을 당했다.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책 321쪽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때로는 쉽지 않아서 어떤 사건은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지는 것도 있다. 일부러 이런 책들을 찾아 읽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그 다음 책을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느낌으로 ‘책의 꼬리 잡기 놀이'의 재미를 누리고 있다. 읽고 싶은 책들과 여전히 필독으로 나의 간택만을 기다리는 책들 사이에서 큰 고민없이 책을 고르기에 나 나름의 합리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최근 리뷰를 쓴 책에서만도 몇 번 거론된 이 책을 더 미룰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많이 힘들었다. 울분없이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것인가.

특별히 역사에 대한 책을 읽을 때 가장 주의할 점은 보는 이에 따라서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똑같은 인물과 사건도 정반대의 평가를 내놓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에 가능하면 다양한 시선으로 책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짧은 지식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검색창을 이용해서 찾아보며 다양하게 사건을 조명한 평가들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지 않은 과거의 일이기에 이 책은 평소 원칙대로 '츠바이크의 눈으로 본 이야기'로만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 지금은 칼빈 개혁교단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의 뿌리가 칼빈의 개혁교회의 뿌리와 사상을 두고 있다는 점들을 볼 때 칼빈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하다. 기독교가 이니어도 종교개혁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빈을 모르기 어려울 정도로 16세기 종교개혁은 세계사의 큰 사건이다.

영국의 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역사학자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고 최태성의 <역사의 쓸모>에서도 “역사 공부야말로 세상을 공부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부하는 것이다. 종교를 가진 신앙인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질문은 이걸세. 기독교란 정말 무엇인가? 또는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정말 누구인가?”

-1944년 감옥에서 쓴 본회퍼의 편지 중에서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카스텔리오 <의심의 기술> 1562

슈테판 츠바이크는 히틀러 독재가 자리를 잡던 시절인 1935~1936에 이 책을 썼다. 독일을 떠나 영국에 머물며 20세기에서 16세기를 바라보았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그의 눈에는 닮은 꼴의 독재로 보인 사람 칼뱅(칼빈이라고 하는 게 더 익숙하지만 책의 표기에 따라 칼뱅으로 한다)은 정치 지도자였지만 그 시대는 정치 지도자가 실세였다. 츠바이크가 주목한 역사의 인물은 카스텔리오다. 그는 칼뱅이 장악한 제네바가 아닌 인근의 바젤에서 제한된 행동권 안에서 독재체제에 맞서 항변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글들은 차분하면서도 따뜻하며 저항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시대를 바로 알아야 그 책이 제대로 읽힌다. 히틀러 독재 시대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시간.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저자슈테판 츠바이크출판바오출판사발매2009.05.04.

칼뱅에 도전하는 글을 쓰면서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n)는 <코끼리 앞에 모기>라는 제목을 사용한다. 과장되게 보이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항변서를 쓰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붓을 들고 그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학자였고 번역과 가정교사 일을 해서 처자식을 돌보는 망명자였다. 그가 싸움을 시작한 것은 ‘세르베투스 살해 사건’에서 시작됐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에게 그것은 종교가 아닌 살인적 행위였다. 자신의 비유대로 그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기고 싶은 것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에게 기억될만한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도시와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것은 모두 칼뱅에게 종속되었다. 시 당국, 대학, 재판소, 재정, 도덕, 목사, 학교, 형리, 감옥, 기록과 대화 심지어 속삭이는 말까지도 장악했다. 그 권력은 제네바 성벽을 넘어 스위스 연방 도시들까지 세계의 개신교는 이 과격한 기독교도를 정신적인 야전 사령관으로 선택했다. 칼뱅이 알지 못한 채 이루어진 시대의 사건은 없었고 그의 의지에 반해 일어난 사건도 없었다. p13

사람들은 세계를 현혹시키는 사람들을 경탄하고 찬양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사람들은 자유를 던져버리고 저항 없이 구원자의 노예 상태로 빠져들며 자신을 후려치는 채찍을 찬양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하지만 양심에 따른 반대자들은 언제나 인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 정치가 완벽하게 체계화된 역사가 없었다. 16세기에도 그랬고 20세기에도 그랬다. 그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유린되지 않은 영혼들이 있었다.

칼뱅은 카스텔리오의 질문에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답변하지 않았다. 오직 그를 침묵시키려고만 했을 뿐이다. 그의 책들을 찢고 금지하고 불태우고 압류했다. 정치적인 압력 수단을 동원해 그가 다른 지역에 머물러 있어도 집필 금지령을 내렸다. 그가 대답할 수 없고 보고도 할 수 없게 되자마자, 칼뱅의 패거리는 그를 향해 온갖 험담을 퍼부어댔다. 그것은 더 이상 싸움이 아니라 방책 없는 자에 대한 유린이었을 뿐이다. p26

조직적인 억압은 이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당대의 활동만을 목졸라 죽인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이나 그의 사후의 명성까지도 죽였다. 오늘날에도 어떤 지식인이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의 이름을 읽은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해도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수십수백 년 동안 검열에 의해 인쇄 금지를 당했는데 어떻게 그를 알겠는가! p27

교과서에서는 영국의 철학자들인 흄(David Hume 1711~1776)과 로크(John Locke 1632~1704)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관용의 이념을 주장했다고 나오지만 사실은 카스텔리오가 먼저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다!

1536년 5월 21일, 제네바 시민들은 중앙 광장에 모여 모두 손을 높이 들고 선언했다.

“이제부터는 오직 복음서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습니다.”

가톨릭 주교의 도시였던 제네바에 과격한 기독교가 자리 잡게 된 것은 설교자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의 힘이다. 그는 혁명을 이루었지만 새로운 질서를 세울 인물이 아니었다. 그때 파렐은 우연히 여행 중에 있던 장 칼뱅(Jean Calvin1509~1564)의 숙소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성직자로 법률가로 훈련받은 칼뱅은 루터파를 편들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쫓겨나 바젤로 도망쳐 온 때였다. 당시 유럽의 교통지인 바젤은 수많은 형태의 개신교가 서로 만나고 다투는 장소였다. 그때 그는 <기독교강요 1535>를 내놓아 최초로 개신교 교리의 기반을 닦게 된다. <기독교강요>는 나폴레옹 법전이 프랑스 혁명을 매듭지은 것처럼 종교혁명을 종결지은 작업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프랑스 망명객에게 도시과 국가의 지배자가 되도록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칼뱅은 타고난 질서의 인간이었다. 불규칙한 것, 체계 없는 것은 모두 수학적으로 정확한 그의 천성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칼뱅은 3개월 만에 개신교의 기본 원칙 21개 조항의 <교리 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했고 동의를 받았다. 이것은 신앙의 노선이 아닌 국가법이었고 이 맹세를 거부한 사람은 바로 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칼뱅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나바에서 살 수 없었기에 시민으로의 생존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역사의 전무후무한 권력이었다.

루터나 츠빙글리(Zwingli1484~1531)가 바란 것은 가톨릭교회의 정화였다. 잊혀졌던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개선하고 정화하는 종교개혁이었다. 그러나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역사상 거의 모든 민족 영웅들은 망명을 통해 자기 국민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감정의 힘을 얻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가리발디는 남아메리카에, 레니는 우랄에 머무는 동안 부재를 통해 오히려 자기 자리에 있었것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칼뱅의 경우도 그랬다. p56

칼뱅은 초기에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서 1차적으로 퇴보하였다. 그리고 다시 더 큰 권한을 갖고 등장하게 된다.

모든 독재정치는 하나의 이념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모든 이념은 그것을 실현하는 인간에게서 비로소 형태와 색깔을 얻게 된다. p65

광신주의 주지주의사로서 그는 완전히 말씀과 정신으로만 살았다. 논리적으로 명료한 것만이 그에게 참된 것이며 올바른 것만을 이해하고 견디었고 정상에서 벗어난 것은 한 번도 참아본 적이 없었다. 이 광신적이고 무미건조한 인물은 여자나 예술처럼 취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서 지상에 내린 어떤 선물로도 기쁨을 찾거나 누려본 적이 없었다. p69

칼뱅의 편지를 보면 그는 위통, 두통, 치질, 산통, 감기, 신경발작, 각혈, 담석증, 부스럼, 간헐열, 오한, 류머티즘, 방광염 등 정말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금욕생활로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가두었고 그것은 각종 스트레스와 질병으로 나타났다. 나는 무엇보다 그의 삶에 기쁨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믿는 그분은 인간이 행복하길 바라신다. 그 행복의 근원은 물질도 소유도 아니다. 하나님과 진리 안에서 참 자유롭고 평안함을 누리면서 오는 행복이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과도 다르며 세상의 가치를 초월한 것이다. 쉼은 게으름이 아니며 죄가 아니라 선물이다. 기쁨도 선물이고 쉼도 선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예배가 엄숙함만을 포커스로 맞추다 보면 그 기쁨까지도 제한된다. 오직 경건과 복종만이 숨 쉰다. 칼뱅은 부활절과 성탄절까지도 절기에서 지웠다.

칼뱅에겐 오직 ‘정의’라는 이름의 잣대로 개인이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기라도 하듯 내 방식대로 심판하고 정죄하고 형벌을 내렸다. 설교자는 옳고 그름을 말하고 인도하는 자리다. 그가 절제된 삶을 살며 매일같이 고행하듯 충직하게 자신의 일을 했음은 높이 평가하는 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빠진 공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안에 절대반지가 있는가?

종교 안에서 인간에게 규율과 엄격함이 기초가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고 그 폭력이 공포스럽고 두렵다면 그것은 성경의 말씀과 맞지 않는다. 분명 그것은 사람에 의해 변질된 것이다.

여기서 여러 종파가 나뉘는 것, 이단의 문제는 현재도 논란이 많아 따로 이야기해도 너무 많기에 책을 벗어난 종교 문제는 생략하고자 하는데 특별히 칼뱅은 삼위일체와 유아세례에 대한 문제도 어떤 이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때 교회 계율과 도덕 경찰관이 등장한다. 종교국의 형리인 장로들은 모든 개인의 생활을 감독할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제네바에서 개인의 사생활이 없어졌다.

경찰관은 여자들의 옷을 살펴보고 너무 길거나 짧지는 않은지 지나치게 주름을 많이 잡지는 않았는지 위험스럽게 파이지는 않았는지를 검사했다. 또 여자들이 머리를 너무 인공적으로 들어 올리지는 않았는지 검사하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몇 개나 꼈는지, 신발장에는 구두가 몇 켤레나 있는지 세어보았다. 화장실에서 부엌으로 넘어가서는 수프나 고기 조각을 검사해서 허락된 요리 이외의 것을 먹었는지, 혹은 어디에 맛있는 주전부리나 잼을 감추어 두지는 않았는지를 검사했다. p80

나는 보편적인 악덕과 싸우기 위해 엄격성을 연마했다.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일이라면 너무 온화한 것보다 차라리 지나치게 냉혹한 쪽이 낫다고 칼뱅은 주장했다.

칼뱅의 독재에 대한 비판-모든 죄에서 가장 무거운 범죄였다.-이 금지되었다. 조직화된 공포정치는 언제나 기적을 이루어낼 수 있다. 칼뱅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에 비교적 작은 이 도시에서 열세 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열 명의 목이 잘리고, 서른다섯 명이 화형 당하고, 일흔여섯 명이 추방당했다.

칼뱅의 예정설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 발언을 한 어떤 남자는 도시의 모든 교차로에서 피가 날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고 난 뒤에 화형 당했다. 술에 취해 칼뱅을 욕한 어떤 출판업자는 불타는 쇠꼬챙이로 혀를 찔린 다음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자크 그뤼에는 칼뱅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 p86~p90

도시 전체가 잿빛으로 어두워진 거리에 검은 옷을 입은 사제들이 감시자의 얼굴로 서 있는 장면이 그려진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때 마치 교회에 가거나 장례식에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니.

 

이런 엄격한 통제 속에 칼뱅이 죽은 지 200년이 지나도록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단 한 명의 화가나 음악가, 예술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평범한 것을 위해 평범하지 않은 것을 희생시키고 모순 없는 노예근성을 위해 창조적인 자유를 희생시킨 것이다.

당시 페스트가 3년 동안( 1542~1545) 제네바에서 기승을 부렸다. 보통 때 성직자들은 모든 환자는 사흘 이내에 성직자를 불러야 한다는 엄격한 원칙을 내세웠지만 성직자 한 명이 감염되면서 환자들은 그냥 페스트 병원에서 종교적 위안 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p97

그들은 페스트 병원에 들어갈 용기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겐 최고의 희생을 요구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카스텔리오는 1515년에 스위스와 프랑스 사부아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태어났다. 당시 리옹 대학생으로 인문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은 그를 당시에 가장 뛰어난 학생으로 꼽았다. 16세기 유럽의 모든 젊이들은 당대의 종교적인 이념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동참하고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리옹에서 처음 이단자 화형식을 보았을 때 그는 칼뱅이 잘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은 곧 칼뱅에게 간파당하고 앞으로 제네바에서 설교자가 된다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직 두 가지 신학 상의 가벼운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카스텔리오는 목사로 임명되지 않았다…. 이전에 그는 우리가 그를 목사의 지위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정도로 일을 잘 해냈다. 그런데도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은 그의 태도에 그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앞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바젤 도서관 문서에 보관 중인 칼뱅의 편지

그는 자신의 필생의 작업, 성서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옮기는 일을 계속했으며 간간이 기고문이나 논쟁문, 주석, 대화 등을 썼다. 카스텔리오가 일하지 않고 보낸 낮이나 밤은 없었다. 이 영원한 막일꾼은 여행의 즐거움이나 휴식의 은총을 한 번도 갖지 못했고 위대한 명성이나 부유함이라는 감각적인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자유로운 정신은 기꺼이 영원한 빈곤의 하인이 되었고 자신의 거침없는 양심을 배신하기보다는 차라리 밤잠을 줄였다. 그는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망각의 어둠 속에서도 자신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일을 위해 싸움을 계속하는 은밀한 정신적 영웅들의 위대한 모범이었고 언어의 불가침성과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모범이었다. p124

미겔 세르베투스 (Miguel Servetus)는 끔찍한 종말로 기억할 만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는 정당성을 갖지 못하며 삼위의 영원한 본체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본질인 통일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런 생각들을 주장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은 저술 ‘기독교 재건’을 만들었을 때 그는 이미 사탄이 뽑은 사절로 간주되었다. 그는 의사로서 벌은 전 재산을 쏟아부으며 책을 인쇄했다.

그는 체포됐고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인 산 채로 천천히 화형 되는 벌을 받았다.

외국인인 세르베투스 체포는 물론 명백한 법률 위반이었고 사실 죄를 지은 적도 없었다. 당시 제네바의 법에서는 범죄자로 고소한 사람도 피고자의 범죄 사실이 입증될 때까지 함께 구금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칼뱅은 권력자로서 그런 모든 일에선 나서지 않았다. 칼뱅은 누가 봐도 그가 미친 사람으로 보이도록 그를 감옥에서 미쳐가도록 만들었다. 옴이 오르고 벼룩에게 물어뜯기도 자신의 배설물조차 치우지 못하여 질식하며 천천히 마지막 때를 기다려야 했다.

“지상의 판결문은 절대로 어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죽이는 것은 확신이 아니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나를 질식시키려고만 할 뿐이다” p172

세르베투스는 화형으로 잿더미가 될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거나 생을 구걸하지 않고 기꺼이 죽는 길을 택해 양심과 신앙을 지켰다.

1553년 10월 27일에 에스파냐 사람 미겔 세르베투스는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제네바에서 그곳 목사인 칼뱅의 명령에 따라 화형당했다.

그것을 지켜보고 폭력을 고발한 자가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다. 그의 책 <이단자에 대하여>에 보면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말도 아닌 돼지였다 하더라도 모든 영주는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하나의 희생이 종교재판의 화형대에서 사라져간 수천 명보다도 더 나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는 칼뱅에게 반문한다. 칼뱅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죽이거나 죽이라고 명령해도 되는가? 그는 모든 다른 의견들에 대한 관용을 가르쳤다.

누가 이단자인가? 카스텔리오는 자신과 독자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참된 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란 어떤 것인가? 진정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해석이 가능한가?

카스텔리오는 겸손하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세르베투스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칼뱅의 잘못된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그 이념들은 완전히 배제한다. 원칙적인 의견 차이와 무관한,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만 나는 칼뱅의 오류를 지적할 것이다. 피를 혼란케 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두가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세르베투스에게 했듯이 그에게 하지 않을 것이다. P228

칼뱅 그는 과연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츠바이크의 견해가 아닌 또 기록으로서 존경받는 그가 아닌 진짜 그가 누구였는지 나는 궁금하다.)

삭제되고 수정된 역사는 정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원래 기독교강요에서는 이단자를 죽이는 것은 범죄행위라고 칼뱅은 명시해 두고 있다. 자신도 한때는 박해받는 이단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 부분을 바꾸었다.

역사 속에서 불행하게도 카스텔리오는 아무 일도 일어나게 하지 못했다. 그는 <칼뱅의 글에 반대함>이라는 책을 썼고 확고하게 투쟁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어떤 미미한 작용도 없었다. 어떤 구원도 없었다. 단지 1563년 12월 29일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적들의 발톱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그렇게 칼뱅주의가 뿌리내렸지만 지나친 억압은 한 세대 이후로는 없었다. 물론 장 자크 루소의 시대에도 극장을 허용할 것인가는 계속 논의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거대한 역사 속에서 독재는 잠깐 동안의 과정일 뿐이다. 삶의 박자를 방해해서 뒤쪽으로 끌어가려는 힘은 그 박자가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더욱 힘차게 앞으로 나가도록 만들 뿐이다. P297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 했던 칼뱅주의 체계는 정치적 자유의 이념이 되었다. 네덜란드, 크롬웰이 통치하던 영국, 미국은 가장 너그럽게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국가 이념을 받아들인 나라들이다. 바로 그곳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책을 펴냈다. 제네바는 모든 나라에서 사상으로 억압받는 자들이 도망쳐 오는 곳이 되었다.

참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사는 참 신비스럽다. 관용과 종교의 꽃이 이렇게 화합하여 실현되다니 그들이 뿌린 씨들이 열매 맺었다고 해야 할까.

카스텔리오의 이념은 자기 시대를 넘어서 살아남았다. 네덜란드에서 카스텔리오의 책들은 다시 번역 출간되었고 주목받고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역사는 그 알 수 없는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해 때때로 우리에게 알 수 없는 퇴행을 마련해 놓는다. 그리고 폭풍우에 가장 튼튼한 댐과 지붕틀이 무너지듯이 유산으로 물여받은 권리의 담도 무너져내린다.

책을 읽는 부담이 있었지만 리뷰를 쓰면서 나는 역사를 다시 보게 된다. 내가 처음에 본 것은 사라져버리는 승리였고 폭력 통치였다. 하지만 나는 곧이어 절대로 패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깊은 자유함을 느낀다. 인류는 양심과 함께 끊임없이 싸우며 새 역사를 만들어 왔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또 다른 이름의 칼뱅으로 또 다른 카스텔리오가 다시 나타나서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때때로 후퇴하는 듯 보여도 그렇게 역사는 흐르고 진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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