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 더불어 독일 문학계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875년 12월 4일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육군병과학교에서 군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적성 문제로 자퇴했고 고등학교를 마친 후 20대 초에는 프라하와 독일에서 공부를 했다. 릴케는 평생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시를 썼다.
릴케는 열세 살, 열네 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여덟 살이던 1894년에 이미 <인생과 노래>라는 시집을 냈다.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를 위한 연애 시였다. 이후 1896년, 1897년, 1898년에 시집을 내고 1899년에 다섯 번째 시집< 나의 축제에>을 출간한다. 릴케 스스로 “나 자신의 최초의 책”이라고 말하는 시집인 것을 보니 이제야 그 자신의 마음이 인정할 수 있는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1905년 <시도서>부터 릴케의 독자적인 풍격이 나타난다.
저의 수많은 책 중에서 <시도서>는 저에게 견고하고 조용한 장소를 만들어주며,
저 이상의 무엇처럼 앞으로 저를 도와줄 유일한 책입니다.
올해는 여름에 괴테의 시를 만나고 가을부터 겨울까지 릴케의 시를 만나보았다. 올 해의 끝자락에서 시집을 덮는다. 시를 하루에 한 편씩 음미하듯 읽다 보보면 시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시작했다.
한 편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시가 주는 솔직함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시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릴케의 시를 읽다 보면 시라는 것은 그냥 내 마음을 압축하여 담아내는 글이라는 느낌이 든다.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글을 쓰고 시처럼 짧게 끊어 보면 시가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들 쓴 것 같았다. 그렇게 읽어지니 시가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고뇌와 성찰이 고스란이 담긴 시는 읽을수록 마음에 깊이 와닿고 지혜를 준다.
'윤동주가 좋아했던 시인 릴케'라는 문구를 보았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에는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인들은 릴케 이외에도 폴 발레리, 샤를 보들레르, 프랑시스 잠, 장 콕토, 정지용, 김영랑, 이상 등 많은 시인들이 있다. 이 문구를 읽기 전에도 윤동주 시인에 대한 생각은 했기 때문에 반가웠다. '서시'의 제목에도 윤동주를 생각한다.
서시
네가 누구이든 좋다. 저녁이 되면 바깥으로 나오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네 방에서.
너의 집은 먼 풍경 앞에 마지막 집으로 서 있다.
네가 누구이든 좋다.
닳아 낡은 문지방에서
겨우 벗어난 지친 눈으로
너는 검은 나무 한 그루를 느직느직 들어 올린다.
그리고 하늘 앞에 세운다. 가냘프게 적적히.
이리하여 너는 세계를 만들었다, 그 세계는
침묵 속에 익어 가는 한마디의 말같이 위대하다.
그리고 너의 의지가 세계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너의 눈은 상냥히 세계를 풀어 준다.
석상의 노래
소중한 목숨을 내던질 만큼
그렇게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을까
나를 위하여 누군가 바다에 빠져 죽으면
나는 돌에서 해방되어
생명으로, 생명으로 되살아난다.
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이렇게도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돌은 너무나 조용하다.
나는 생명을 꿈꾼다. 산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나를 잠 깨울 수 있을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는가.
그러나 언젠가 내가
나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것을 주는 생명을 가지게 되면
그때 나는 혼자 울게 되리라.
나의 돌을 그리며 울게 되리라.
나의 피가 포도주처럼 익는다 해도 무슨 소용 있으랴
나를 가장 사랑해 주던 사람을
바닷속에서 되돌아오게 할 수도 없는 것을.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릴케의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8살 연하의 시인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와 릴케가 주고받았던 5년간의 편지가 담겨 있다. 1902년 그는 릴케에게 자신이 쓴 작품을 보내며 조언을 부탁했고 릴케는 편지에 솔직하게 자신의 평가를 써 주게 된다. 젊은 시인에게 해 주는 '작가 수업'이다. 그중 사랑의 시를 쓰지 말라는 부분에서 릴케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릴케는 뮌헨대학을 졸업할 무렵 철학자 니체의 연인이자 열네 살이나 연상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사랑했다. 루 살로메는 니체가 한눈에 반했던 여성으로 지성과 미모로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뮤즈로 칭송을 받았다. 살로메 주변에는 많은 남성들이 있었고 심지어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얻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여럿 된다. 릴케는 살로메를 만나고 그녀의 의견대로 프랑스식 이름인 '르네'에서 독일식 '라이너'로 바꾸고 글씨체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릴케 역시 살로메의 자유로움을 잡아둘 수 없었다. 릴케 이후에 프로이트와 또 프로이트 제자들과 자유연애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릴케는 시로도, 죽음으로도 살로메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후 릴케는 조각가 로댕의 문하생인 베스토프와 결혼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잦은 불화가 생기면 별거생활을 했다. 말년에 릴케는 병고에 시달렸고 1926년 스위스 요양원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미 많이 소개했기이 몇 편만 나누고 이제 이 책도 보내련다.
릴케 시집저자라이너 마리아 릴케출판문예출판사발매2014.04.20.
아침 해가 동쪽 하늘을 서서히 밝힐 때도
아침 해가 동쪽 하늘을 서서히 밝힐 때도
결코 빛이 죽지 않는 별들이 있었으면 한다.
그런 독특한 별들을
나의 영혼은 자주 꿈꾸어 왔다.
금빛 여름날의 하루,
햇빛을 마시고 지쳐 버린 눈이
그곳에 가고 싶어 할,
온화하게 반짝이는 그런 별들을.
저 높이 바쁘게 움직이는 별의 세계에
정말로 그런 별이 끼어 있다면-
사랑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시인들은 거룩하게 여기리라.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살처럼 꽃보라처럼
기도처럼 왔는가.
반짝이는 행복이 하늘에서 내려와
날개를 접고
꽃피는 나의 가슴을 크게 차지한 것을…..
일상에서 수척해진 말
일상에서 수척해진 말,
눈에 띄지 않는 말을 나는 사랑한다
흥에 겨워서 색채를 부여하면
그들은 미소를 띠며 서서히 기뻐하는 기색을 보인다.
겁을 먹고 기가 죽어 있던 말들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생기를 찾는다.
한 번도 노래에 나온 적 없는 그들이
떨면서 지금 나의 노래 속을 거닐고 있다.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축제일 같은 것이다.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길을 걷는 어린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 오는
많은 꽃잎을 개의치 않듯이.
어린아이는 꽃잎을 주워서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머무르고 싶어 하는데도
머리카락에 앉은 꽃잎을 가볍게 털어버린다.
그리고는 앳된 나이의
새로운 꽃잎에 손을 내민다.
나의 생활은
나의 생활은, 아주 바쁘게 보이는
그런 빠듯한 시간이 아니다
나는 나의 배경 앞에 선 한 그루 나무,
나는 나의 여러 입 가운데 하나일 뿐,
그것도 가장 먼저 다무는 입이다.
나는, 죽음 쪽의 음이 높아져서
서로 잘 어우러지지 않는
두 음 사이의 쉼표다
그러나 이 어둑한 인터벌에서
두 음이 떨면서 화해한다.
그리하여 노래는 여전히 아름답다.
사람들은 모두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미워하고 가두는 감옥에서처럼
자기 자신에게 벗어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하나의 커다란 기적이 있습니다.
저는 느낍니다. ‘모든 삶은 삶아진다’고.
그렇다면 대체 누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연주되지 않은 선율이 하프 안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듯이
저녁 어스름에 싸여 있는 사물들입니까
냇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입니까
신호를 주고받는 나뭇가지들입니까
향기를 겯는 꽃송이들이겠습니까
노쇠한 긴 가로수 길입니까
이상한 모습으로 날아오르는 새들입니까
대체 누가 살고 있습니까, 신이여 당신입니까- 그 삶을 사는 것이,
서시
네가 누구이든 좋다. 저녁이 되면 바깥으로 나오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네 방에서.
너의 집은 먼 풍경 앞에 마지막 집으로 서 있다.
네가 누구이든 좋다.
닳아 낡은 문지방에서
겨우 벗어난 지친 눈으로
너는 검은 나무 한 그루를 느직느직 들어 올린다.
그리고 하늘 앞에 세운다. 가냘프게 적적히.
이리하여 너는 세계를 만들었다, 그 세계는
침묵 속에 익어 가는 한마디의 말같이 위대하다.
그리고 너의 의지가 세계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너의 눈은 상냥히 세계를 풀어 준다.
탄식
아, 모든 것이 어쩌면 이리도 멀리
오랜 옛날에 흘러가 버렸을까.
지금 반짝이고 있는 저 별도
천 년이나 전에 죽어 버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방금 지나간 작은 배에서
근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 듯하다.
집 안에서
시계 치는 소리가 울렸다.
어느 집일까….
나는 나의 마음에서 벗어나
넓은 하늘 아래로 나가고 싶다
나는 기도하고 싶다.
모든 별 중에서 어느 하나는
아직도 정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알 것 같다,
어느 별이
고독하게 홀로 살아 왔는가를.
어느 별이 새하얀 도시처럼
천국의 빛 끝자리에 서 있는가를….
고독
고독은 비와 같다
저녁을 향해 바다에서 올라와
멀리 떨어진 평야에서
언제나 적적한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비로소 도시 위에 떨어진다
밤도 낮도 아닌 시간에 비는 내린다.
모든 골목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체와 육체가
실망하고 슬프게 헤어져 갈 때,
그리고 시새우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침대에서 자라야 할 때,
그때 고독은 강물 되어 흐른다……
가을날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놓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은 완숙케 하여
마지막 단맛이 진한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면서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추억
그리고 너는 기다리고 있다,
너의 삶을 한없이 늘려 주는 한 가지 것을.
강력한 것을, 예사롭지 않은 것을,
돌이 눈뜨는 것을,
너를 향한 깊숙한 것을.
책장에 꽂힌 책의 표지들이
어스레하게 황갈색으로 저물어 간다.
그러나 너는 생각한다,
지나온 나라들을, 많은 형상을,
다시 버림받은 여인들의 의상을,
그때 갑자기 너는 깨닫는다, 이것들이었다고.
너는 일어선다.
그러면 네 앞에 지난 일 년의
불안과 형상과 기도가 서 있다.
가을의 마지막
언제부턴가 나는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보아 온다.
무엇인가 일어서고, 행동하고,
죽이고 그리고 슬프게 하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정원은 모습이 달라진다.
노랗게 물든 정원의
누렇게 되어 버린 완만한 조락.
그 길은 참으로 멀었다.
지금 텅 빈 정원에서
가로수 길을 모두 내다본다.
엄숙하고 억누르는 듯한
답답한 하늘을
먼 바다 끝까지 거의 다 볼 수 있다.
가을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하늘의 먼 정원들이 시들어 버린 듯,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다른 별들에서 떨어져 고독에 잠긴다.
우리들 모두가 떨어지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두 손에 받아들인다.
저녁
저녁이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는다.
즐비한 노목의 우듬지가 그것을 도와준다.
너는 이것을 바라본다. 그러자 너에게서 세계가 갈라진다.
하나는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는 아래로 떨어진다.
그것들이,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쏠리지 않는 너를
침묵하고 있는 그 집만큼 아주 어둡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밤마다 별이 되어 떠오르는 그것처럼
확실한 영원을 불러내게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너로 하여금(말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지만)
너의 목숨을 불안하게 하고, 거대하게 하고, 그리고 성숙하게 할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너의 목숨은 때로는 한정되고 때로는 포괄하면서
번갈아가면서 너의 마음속에서 돌이 되고 별자리가 된다.
엄숙한 시간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선 누가 울고 있다.
이유도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울고 있다.
지금 밤의 어느 곳에서 누가 웃고 있다.
이유도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선 누가 걷고 있다.
이유도 없이 걷고 있는 사람은
나에게 오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죽어 간다.
이유도 없이 죽어 가는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표제시
부유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장님이라고.
혹은, 나는 장님이 되어 가고 있다,
세상살이가 잘 풀리지 않는다,
아이가 병을 앓고 있다,
몸의 이곳이 수술로 봉합되어 있다….
이런 말을 하더라도 아마 뾰족한 수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물 옆을 지나가듯이
그들 옆을 지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또 좋은 노래를 듣게 된다.
물론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하다.
그들은 소년 합창단의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느님도 이런 거세된 가수가 귀를 어지럽히면 옆에 오셔서 한참 동안 머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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