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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한 권의 책

아무튼, 망원동

by 북앤라떼 2021. 8. 19.

아무튼, 망원동

김민섭

장강명의 책 <책, 이게 뭐라고>를 읽을 때 아무튼 시리즈 중 추천하는 책으로 뽑은 책이라 읽었다. 그냥 제목만으로는 뽑지 않았을 책이다.

1984년에서 2017년까지 저자가 망원동에서 보냈던 추억이 담긴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있다.

그는 전작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로 유명해졌다. 그 책은 대학원과 시간강사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사람들에게 ‘용감한 내부 고발자’로 기억된다. 그 책은 ‘309동 1201호’라는 익명으로 냈지만 후에 알려지면서 그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필명은 7년간 이십 대 청춘을 보낸 원룸 주소였고 그 책 책날개의 작가 소개에는 1983년 서울 홍대 입구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쓰여있다. 살다 보니 고향을 묻는 사람들에게 고향을 설명할 일이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홍대 입구’로 소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유명한 홍대 거리에서 자랐음을 과시하고 싶은 이유에서 일 수도 있지만 홍대 정문 5분 거리 산부인과에서 태어났기에 틀린 말은 아니다. 고향이 어디면 어떠하리. 대학을 나온 뒤 대리운전을 하며 쓴 이야기 <대리 사회>가 있고 지금도 망원동에서 글을 쓰고 있다.

어머니는 지금도 망원시장에서 장을 본다. 얼마 전에는 네 살짜리 손자의 손을 잡고 그 거리를 걸었다. 네 살짜리 내가 외할머니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는 아이 손에 아주 작은 장바구니를 꼭 쥐여주고는 천천히 함께 걸었다. 장바구니에는 아이에게 구워줄 생선과 치킨 너깃이 그리고 나를 위한 닭강정이 들어 있었다. 아이가 청년이 되어 다시 찾을 때, 망원시장이 지금처럼 청년의 얼굴로 맞이해주면 좋겠다. 두 청년이 다시 만나 서로를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빚을 진 기분이 되고 만다.

32쪽

망원동, 성산동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건물이 바뀌고 새로운 간판이 달려있다고 해도 그에게 그곳은 자신의 고향 도시다. 도시를 고향으로 기억하는 1세대라는 표현이 와닿는다. 나도 그런 도시가 있는데 만약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면 나도 나만의 고향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저자는 즐겁게 망원시장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고 때때로 기억의 조각들이 묵직하기까지 했다. 최근에 핫 플레이스가 된 망리단길이라는 낯선 변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글을 쓰는 내내 고민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어서.

어쨌든 망원동은 핫플레이스가 되었고 그래서 이 책도 그 후광 효과를 보지 않았을까.

이 책에 등장하는 ‘망원동’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따라 확장된 공간이다. 이 글은 성미산 서쪽 자락에서 자란 어느 83년생의 자기 공간에 대한 서사이다. 망원동과 성산동이라는 1990년대 대한민국의 가장 평범한 공간이 어떠했는가를 소소히 적어보려 한다.

책 8쪽

#망원동 작업실

결혼 후 원주에서 살고 있던 저자는 2016년에 다시 망원동으로 돌아왔다.

2002년부터는 대학, 군대, 직장으로 망원동 고향을 떠나있었다. 자신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어느 분이 망원동 글 쓰는 공간에 자리가 하나 남는다고 제안을 해 주어서 작업실에서 생활하게 됐다. 하필 그것이 또 망원동이라니! 부모님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작업실이다.

작업실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망원시장 후문이 나온다. 하루에 한 번씩은 망원시장을 기웃거린다. 무언가 먹으러 가거나 산책도 가지만 시장 사람들과 섞여 있는 것이 좋아서 매일같이 간다. 1970년대에 생긴 재래시장이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마트가 간편하다 해도 재래시장의 맛과 멋을 어찌 따라올 수 있을까. 시장은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어렸을 때 엄마 손잡고 따라가던 재래시장의 풍경이 살아났다. 엄마를 따라가면 시장 다 보고 엄마가 작은 보상으로 떡볶이를 사 주시곤 했었다. 내가 자주 가던 돈암동 시장이 눈에 그려진다.

내게 2016년의 망원동은 ‘안녕’과 ‘안녕히’라는 인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시간은 나와 내 부모뿐 아니라 망원동 또한 변화시켰다. 시곗바늘이 멈춘 곳도, 조금은 느리게 움직인 곳도 있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시계태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불려나갔다.

24쪽

#망원동 닭강정

그렇게 망원동, 성산동, 상암동의 경계에서 자란 그는 2014년 상암동에서 결혼했고 강원도에서 올라온 신부 측 하객들에게 간식으로 망원동 닭강정을 대접했다. 동네 친구들은 식장까지 걸어서 와서 결혼식을 지켜볼 수 있는 거리에 살았다. 망원동 닭강정이 그렇게나 유명하단다.

#국민학교 추억

1995년도 까지는 국민학교였다. 나도 국민학교 세대라 저자의 추억들이 공감이 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만 어린이 글짓기 대회, 반공 포스터, 반공 표어 불조심 표어 만들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불은 밤손님처럼 아무도 모르게” 불조심 표어를 지어서 상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표어나 글짓기 같은 쓰기 숙제는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던 반면 그리기 숙제는 가장 어렵고 싫은 것이었다. 불조심 포스터를 그려오라는 숙제였는데 한 번은 할아버지가 옆에서 도와주셔서 그 덕에 상을 받고는 마음속으로 ‘이거 내가 받은 상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옛날 교사였고 후에 서예가였던 할아버지의 붓터치는 그림의 질을 바꿔놓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 미술시간이기도 했고. 초. 중. 고 통틀어서 그림으로 뽑힌 적은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공부 외에도 일이 참 많았다. 이젠 '라뗀말야'의 꼰대 추억이지만.

100원짜리 노란색 곰표 왁스로 마룻바닥을 닦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교실 꾸미기도 학생들과 어머니들이 한몫 했던 일이다. 평생 웨딩 일을 하신 엄마는 교회 꽃꽂이 봉사를 자원하셨었는데 엄마가 꽃꽂이 하고 남은 꽃을 학교에 가져가라고 주시는 날에는 기분이 좋았다.

저자의 주번이야기도 격하게 공감했다. 그래 주번이 참 중요했었지. 칠판지우개 털기, 우유 받아 오기, 교탁 청소 화분에 물 주기, 그리고 겨울이면 난로에 놓는 주전자에 물 받아오기. 폐품의 날로 낡은 박스가 아니라 새 신문을 욕심껏 가지고 가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침마다 하던 운동장 조회도 잊을 수 없다.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고 교가를 불렀다. 그렇게 오래 서 있다 보면 한두 명 쓰러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면 양호실 침대에서 쉬고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얼굴이 하얗게 질리던 아이들이 부러웠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린 시절 알뜰하던 부모님과 외식을 할 때면 돈이 부족할까 염려되어 천 원짜리를 저금통에서 빼서 들고 갔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 이야기도 있었다. 고기를 먹자고 갔지만 돈을 생각해서 양껏 배를 채울 수 없었으니 돌아오는 길에 칼국수로 배를 채워야 했던 일, 나중에 장성해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여자친구가 삼겹살을 먹자는 말에 화들짝 놀라서 말싸움이 되어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솔직하게 들려준다. 고깃값이 얼마나 비싼데.. 늘 들었던 이야기는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렸을 것이다.

이 외에도 신촌 시계탑에서 기다리던 추억, 민들레 영토에서의 추억 이야기도 공감이 되었고 난지도가 공원으로 세워지기 전후의 난지도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사람들이 억새공원이라 하여 몇 년 전 하늘공원도 찾아가고 인기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쓰레기 산이었던 난지도(蘭之島)에 대한 어린 시절의 인식은 매우 좋지 않았다. 쓰레기 때문에 악취와 파리떼에 시달렸고 동네들의 경계에 있던 만큼 난지도 동네에서 학교에 오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추억이 담긴 국숫집이 이게 세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을 하여 더는 4천 원짜리 맛있는 국수를 먹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던 이야기.

이 외에도 도시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아무튼, 잘 읽었다.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는 떡볶이와 비건만 읽었는데 아무튼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에 좋은 책이었다.

 

아무튼, 망원동저자김민섭출판제철소발매201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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