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현재 스톡홀름에서 살고 있는 기자이자 소설가. 그의 첫 소설<도리스의 빨간 수첩>을 읽었다. 이 이야기는 스웨덴 블로거들의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 세계 28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이야기는 스톡홀름의 한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올해 96세인 도리스는 아파트에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지내고 있다. 간병인은 도리스에게 가족이 있냐고 묻는다. 친구가 있냐고 누가 찾아올 사람이 없냐고 묻는다. 도리스는 제니의 사진을 바라본다.간병인이 떠나고 도리스는 식탁으로 손을 뻗어 수첩을 연다. 수첩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있고 그 모든 이름 위에 줄이 그어져 있다. 사망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있는 제니는 여동생 앙네스의 딸이자 조카 엘리스가 낳은 딸이다. 자신이 제니를 구했던 것은 제니가 네 살 때였다. 엘리스는 늘 약에 취해있었고 약물 중독 상태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돌볼 형편이 되지 않아서 도움을 요청한 순간에 도리스가 제니를 구했다. 이후 엘리사는 재활시설에 가게 됐고 제니는 도리스 옆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살았다. 가끔씩 엄마가 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곤 했지만 제니는 잘 성장했고 지금은 남편과 세 아이를 키우며 잘 살고 있다. 제니는 할머니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정도 팽개치고 할머니 곁으로 와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니는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 준 사람이 도리스였다고 생각하고 할머니가 외롭게 혼자 돌아가시게 둘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임종을 지켜주고 싶어서.
도리스에게도 제니는 각별했다. 평생 결혼도 자녀도 없었던 도리스에게 제니는 딸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엘리스가 그렇게 된 것에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동생이 엘리스를 힘들게 낳은 뒤 눈을 감았을 때 그 어린아이를 병든 할머니에게 맡긴 채 떠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땐 엘리스의 미래를 돌볼 상황도 형편도 아니었지만 두고두고 죄책감으로 남았다. 제니도 도리스처럼 모델 일을 했었다. 진짜 도리스를 닮은 것은 글쓰기의 재능이었다.
너에게 내 기억들을 주고 싶어. 그 기억들이 희미해지고 사라지지 않도록
도리스는 자신이 떠나기 전 증손녀 제니에게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남겨주려고 한다. 자신의 수첩에 있는 이야기, 그리고 가슴에서 미쳐 꺼내 담아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증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소설은 도리스가 들려주는 이야기 시대와 현재 도리스의 병실로 시간대를 오가며 진행된다.
도리스는 컴퓨터로 자신의 기억을 모아서 글을 써 두고 있었다. 후에 제니가 발견할 수 있도록.
이야기는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야기를 듣는 열 살의 도리스로 시작된다. 첫 번째 사망자 명단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있다.
에리크 알름 사망
아버지가 죽은 뒤 도리스의 평범한 일상과 행복도 함께 끝났다.
엄마는 이후 도리스를 세라핀 부인의 집으로 보내서 가정부 생활을 하며 지내도록 했다. 부인의 집에는 화가들이 많이 모여서 술을 마시곤 했는데 거기서 평생 동반자 친구로 지냈던 예스타 닐슨을 만나게 된다.
그도 세라핀 부인이 숭배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여서 여성 참정권과 실업 문제를 토론했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스타는 도리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위로가 되어주었다. 어느 날 부인은 도리스를 데리고 예술가의 도시 파리로 떠나게 된다. 그때가 열세 살이었다. 그 기찻길에서의 기억은 평생의 기억 중 가장 외로웠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떠나기 전 엄마는 도리스에게 속삭였다.
네가 살아가는 동안 네 하루하루를 밝힐 만큼의 태양이 내리쬐기를, 그 태양에 감사할 만큼의 비가 내리길 바란단다. 그리고 네 영혼이 강해질 만큼의 기쁨이 있기를, 살면서 만나는 작은 행복의 순간들에 감사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이 있기를 바란다. 때때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만남이 있기를 바란다
이후 파리에서 부인은 도리스를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의 옷 입는 마네킹 일을 하도록 소개했고 디자이너를 따라 간 후 나중에 도미니크 세라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때부터 모델 일이 시작되었고 종종 예스타의 편지를 받았지만 답장을 쓸 여유도 없었다. 같은 모델일을 하며 지냈던 친구 노라가 있었는데 이후 노라의 출산소식과 사망소식을 들었다.
엄마의 기억조차도 희밋해졌지만 단 한 사람 앨런의 기억만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도리스는 평생 혼자였고 한 남자만 사랑했다. 도리스는 파리에서 앨런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프랑스계 미국인이었던 그가 어느 날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도리스에게 미국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1년이나 지난 뒤 편지를 받게 된다. 편지를 들고 전쟁 중인 유럽을 벗어나서 고생 끝에 뉴욕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앨런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 후였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하룻밤을 보내지만 그는 그날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프랑스에서도 앨런은 도리스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보냈지만 둘은 이후 만나지 못했다.엄마가 죽고 동생 앙네스와 생활하며 모델 일을 계속하던 중 1939년 9월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도착한 앨런의 편지 한 통을 들고 도리스는 동생과 함께 배에 올랐다.
이후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의 시간들이 지나갔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앨런도 없이 살았고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그녀의 생애에 가장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그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노트에 적혔고 그들의 이름은 모두 줄이 그어졌다. 사망
모두가 죽었다. 도리스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폴 존스 사망
물속에서 죽어가는 도리스를 구해준 영국인이다. 폴 존스에게 구조 되었을 때 도리스는 자신이 마이크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바다에서 자신을 강간했던 마이크가 총탄의 세례를 받고 죽었을 때 얼마나 안도했던가. 그런데 그 악이 뿌리내린 아기가 자신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이 매일 두려웠다. 산통이 오고 의사를 찾지 못해 아이를 집에서 낳았지만 아기를 사산했고 몸을 추스르고 그 집을 떠나온 뒤에 폴 존스도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일생 동안 너무도 많은 이름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 제니,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오고 가는 그 모든 이름에 대해 말이야.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또 어떤 이름은 사랑하는 이가 되거나 혹은 적이 되고. 나는 이따금 내 수첩을 들춰본단다
도리스의 삶을 돌아보면 대부분의 만남은 축복이었고 삶에서 필요한 인연이었다. 마이크 파커는 그녀를 돕는 척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를 강간하고 세상의 태어나는 아이가 모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마이크 파커 덕분에 유럽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면 그것 또한 도리스의 삶에 꼭 필요한 만남이었던 걸까?
마지막에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제니는 도리스를 예쁘게 화장해 주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쳐준다. 제니는 남편 윌리에게 앨런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윌리는 아직 살아있는 앨런을 찾아 파리와 뉴욕에서 화상 통화로 둘의 해후를 돕는다. 아흔이 넘어서도 앨런에게 추하지 않게 보이고 싶은 도리스. 정말 두 사람은 운명이었나보다.
전쟁이 갈라놓은 두 연인은 이렇게 죽기 전에 서로 다시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기억나요. 당신과 함께 걸었던 걸음 하나하나가 다 기억나요. 그때는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내 사랑,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그곳에서 내가 당신을 보살펴줄게요. 사랑해요. 도리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매일 당신을 사랑했어요. 언제나 우리 함께 있었어요. 내 마음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었어요”
마지막에 스웨덴과 미국에서 떨어진 채 화상통화로 극적인 해후를 하고 도리스는 이제 여한이 없는 듯 잠들듯이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도리스를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제니를 보면서 할머니 병실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그 이야기를 다 듣지 못했고 기록하지 못한 것이 참 아쉬웠다. 그땐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도리스같은 어른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내 인생에서도 수많은 이름들이 쓰여졌고 지금도 쓰여지고 있지만 언젠가 그 모든 이름에 줄이 그어지고 ‘사망’으로 쓰일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는 내 이름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묘비 아래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랑이 있다.
삶 전체를 휘청거리게 하는 잠깐의 시선.
공원 벤치 위에 포개진 두 손.
갓 태어난 아기에게 향하는 부모의 눈길.
너무도 강렬해 어떤 열정도 필요 없는 우정.
몇 번이고 반복해 하나로 합해지는 두 몸.
사랑.
그것은 단 하나의 단어일 뿐이지만, 너무도 많은 것을 품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랑뿐이다.
당신은 후회 없이 사랑했나요?
-일생 동안 너무도 많은 이름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 제니,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오고 가는 그 모든 이름에 대해 말이야.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또 어떤 이름은 사랑하는 이가 되거나 혹은 적이 되고. 나는 이따금 내 수첩을 들춰본단다. 수첩은 내 삶의 지도 같은 것이 되었어. 그래서 나는 네게 그것에 대해 조금 얘기하고 싶어. 너, 날 기억해 줄 유일한 사람일 네가 내 삶도 함께 기억해 줄 수 있도록. 일종의 유언과 같은 거지. 네게 내 기억들을 줄게. 그 기억들은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다. p15
-도리스는 기억들을 모으기 위해 글을 쓴다. 지금껏 살아온 삶 전체를 바라보고 싶어 글을 쓴다. 나중에, 그러니까 그녀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이 아닌 제니가 모든 것을 발견해 주길 바란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제니가 글을 읽었으면 좋겠고 사진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다. p22
-엄마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어. “네가 살아가는 동안 네 하루하루를 밝힐 만큼의 태양이 내리쬐기를, 그 태양에 감사할 만큼의 비가 내리길 바란단다. 그리고 네 영혼이 강해질 만큼의 기쁨이 있기를, 살면서 만나는 작은 행복의 순간들에 감사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이 있기를 바란다. 때때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만남이 있기를 바란다.” p54
-오랫동안 내가 가는 유일한 기념식은 장례식이었답니다. 그렇지만 이제 더는 장례식에도 갈 일이 없죠. 아마도 이제는 내 장례식을 생각해 봐야 할 거예요. p106
-환자분의 장례식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재즈요. 난 재즈가 좋답니다. 신나는 재즈를 연주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이 늙은이가 하늘나라에서 옛 친구들을 모두 만나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도록 말이에요 p106
-뭔가를 강렬하게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있어. 그들의 눈은 서서히 흐릿해지고, 그들은 일상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더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해. 내가 볼 수 있는 곳은 오직 과거뿐이었어. 나는 더는 내가 그 일부가 될 수 없는 모든 것, 과거의 모든 것을 미화했지. p.111
-그는 내 기억 속에 언제나 있었어. 고통은 조금 덜해졌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았어. 사랑은 나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어. 나는 한 번에 하루씩 살아냈어. 처음에는 한 번에 한 시간씩 살아냈지. p156
-앙네스와 보낸 첫 여름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제니. 어떤 사람을 정말 제대로 알고 싶다면 말이다. 그 사람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 보렴. 밤늦게 한 침대에서 함께 몸을 웅크리고 눕는 것만큼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것은 없거든. 그 순간 너는 너 자신일 뿐이야. p170
-도리스의 수첩에 있는 이름들, 도리스를 스쳐 지나갔고 그녀에게 어떤 인상을 남긴 이 사람들. 도리스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들 중 도리스만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율이 도리스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 차가운 방의 외로움이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p197
-수첩. 제니는 식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훑어본다. 오래되고 낡은 붉은색 가죽 수첩을 집어 들고 누런 페이지들을 쓰다듬는다. 도리스가 얘기하는 그것이 틀림없다. 제니는 읽기 시작한다. 이름들에 연이어 줄이 쳐져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이름 뒤에 도리스는 사망이라고 적어놓았다. 사망, 사망, 사망. 제니는 손에 불이라도 옮겨붙은 듯 수첩을 떨어뜨린다. 도리스가 겪고 있을 지독한 외로움을 이런 식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몹시도 고통스럽다. 도리스가 조금 더 가까이 살았더라면. 제니는 도리스가 얼마나 많은 날을 혼자서 보냈을까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혼자서 보냈을까. 친구 하나 없이, 가족도 없이. 그저 한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만을 품고서. 그 아름다운 기억들.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 그 끔찍한 기억들.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어 도리스는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죽은 이름들 중 하나. 사망. p300
-그래, 당연히 무서웠지. 지금도 기억이 나는구나. 이상하지. 나이를 먹어갈수록 최근에 일어난 일들은 기억이 희미해지는데 어린 시절 있었던 일은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거든. 그날 기차가 역에 들어왔을 때 어떤 냄새가 났는지도 기억이 난단다 p314
<책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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