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일대의 거래
지금까지 ‘오베라는 남자’, ‘미안하다고 할머니가 전해달랬어요’,’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을 통해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을 만났다. 이 책은 아주 짧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 세 책과 모두 비슷한 점이 있다. 이 작가의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도 읽게 됐다.
2016년 크리스마스 어느 날 밤 작가는 아내와 아이들이 잠든 곁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누군가를 위해 내 전부를 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미래뿐 아니라 과거까지 걸린 문제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단번에 이 책을 집필했고 원고는 스웨덴 남단 헬싱보리의 지역신문에 소개됐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장소는 실제 작가의 추억이 담긴 고향에 존재하는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술집의 사장도 어린 시절의 친구다. 작가는 현재 그곳에서 600 킬로미터 떨어진 스톡홀름에서 산다. 그곳을 생각할 때면 어렴풋한 추억이 담긴 곳이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없는 곳 같은 느낌이 든다. 인생도 고향을 떠나듯 그렇게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는 기묘한 이야기 같지만 짧은 이야기인 만큼 잠깐만 귀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한다.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도 말하고 싶다. 무섭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녕, 아빠다. 조만간 일어나겠구나. 헬싱보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일 텐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나도 안다, 동화는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거. 하지만 내가 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게 누구인지 알면 얘기가 달라질까?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만 바쁜 삶을 살다 보면 죽음은 너무 먼 이야기다. 그러다 죽음을 앞둔 시점이 되면 그제서야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기 마련이다. 여기 암을 선고받고 죽음을 앞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세상 모든 물건에 값을 매기며 부와 숫자만을 좇아 살아왔다. 그는 사업가로는 성공했지만 아내와 아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좋은 남편이고 아버지였을까?
암 병동에서 다섯 살 난 여자아이를 만났다. 토끼 인형을 들고 다니는 아이는 곧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이를 보면서 자신의 아들을 생각한다. 아들이 태어났던 순간을, 그리고 아들이 어렸을 때 늘 출장 때문에 집을 비우며 시간에 쫓겨 일을 했고 아들은 그런 아빠를 원망했다. 부부가 이혼을 하고 엄마와 살던 아들이 찾아와서 아빠와 살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는 거절했다. 아들이 스무 살 때 고향의 바텐더로 일할 거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에겐 아들을 수백 군데 취직시켜 줄 능력이 있는데도 아들은 바텐더를 원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네가 역사에 집중한다면 나는 발전에 집중하고,
네가 향수에 집중한다면 나는 단점에 집중하지.
아버지는 차를 세우고 술집 유리창 너머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아들을 보며
아들이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보냈을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렸다.
의사에게 병명을 듣고 나서 나는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라 장부를 정리했다.
내가 일군 모든 것과 내가 남긴 모든 발자취를 정리했다.
행복한 것 따위엔 관심 없이 살았다. 나약한 소리를 하는 인간들에게 관심 없었다. 그런 그가 병명을 듣고 바닷가를 거닐며 그곳에서 행복하게 노는 두 마리의 개를 보며 궁금해졌다. 내가 그렇게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그의 눈에 자신이 입원한 병동에서 사망 명부 폴더를 들고 다니는 한 여자가 보인다. 그 여자를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그 여자가 보인 그 자리에는 언제나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이 태어날 때 쌍둥이 동생이 그랬고 십 대 때 친구가 그렇게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날 요양원에서도 그녀를 보았다.
남자는 이제 죽기 전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 그래서 단 한 번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 싶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주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생일대의 거래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죽음은 목숨과 바꿀 수 없다. 목숨은 목숨으로만 맞바꿀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아들에게로 아버지를 데려갔다. 내가 정말로 포기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네 아들은 그대로 남지만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될 거야. 죽는 게 아니야 삭제되는 거지”
자신이 그런 거래를 한다면 미래의 모습뿐 아니라 과거 살아왔던 모든 발자취도 사라지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조차도 자신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죽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잊혀지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1초는 항상 1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한 가지가 그 1초의 가치다. 모두가 항상 줄기차게 협상을 한다. 날마다 인생을 걸고 거래를 한다. 이게 내 거래 조건이었다
너는 겁이 나는 게 아니야. 그냥 아쉽고 슬픈 거지. 너희 인간들에게 슬픔이 공포처럼 느껴진다는 걸 가르쳐주는 이가 없으니.
너는 이 글을 읽지 못할 거다. 네 엄마의 집 앞 계단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지도 않을 거다. 나 때문에 시간을 허투루 날리지도 않을 거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다. 이 아빠는 널 사랑했다.
책 마지막 장
그렇게 남자는 여자아이를 구하고 아들을 두고 떠난다. 마지막 한 마디에 울컥했다.
암에 걸린 뒤 자신을 돌아보고 후회하는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를 돌아보고 내 아이들을 돌아보기에 이 책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2020년은 누군가에게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늘어난 전 세계 사망자의 숫자는 전쟁터에서 쓰러진 전사들 이상의 숫자였으나 눈에 쓰러진 전우는 보여도 그렇게 조용히 떠나는 이웃들의 죽음은 무감각했다. 이미 미국에서의 사망자는 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보다 많다고 했다. 당시 전사한 사망자가 29만이었고 이제 미국은 그 숫자를 넘어섰다. 그런데도 믿어지지 않는 것은 타인의 죽음이 내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었던 2020년을 돌아본다. 정말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 게 맞구나.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장 좋은 선물은 시간이다. 시간으로 무엇을 바꾸지 말자는 것.
살아가면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까를 생가하게 하는 책이다.
언젠가 죽음을 앞두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가치있게 살았을까를 생각해보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것 또한 축복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일이 있다고 굳건히 믿은채 오늘을 살다가 그냥 가는 경우도 많다. 죽기 전까지 미룰 필요가 있을까? 한 해를 마무리하며 무엇에 '가치'를 두며 살았는지 점검할 수 있다.
내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식농사에 실패했다. 너를 강하게 키우려고 했는데, 너는 다정한 아이로 자랐으니"
자식농사라는 말도 사실은 마음에 와닿지 않지만 그렇게 고백할 사람들이 참 많을것 같다.
내가 심고 심은대로 심고 욕심껏 거두려는 마음. 때로는 심지 않은것도 거두려는 부모의 욕심.
남자는 사실 실패하지 않았다. 성공했다. 아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주진 못했지만 아들은 행복한 일을 찾았고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주는 일을 하며 만족하며 산다. 실패와 성공의 잣대는 부모의 기준이 아닌 아이의 행복에 달려있다.
모든 부모는 가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5분쯤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거다. 그저 숨을 쉬고, 온갖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를 그러모으면서 스멀스멀 고대를 드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숨 막히는 부담감을 들래며, 모든 부모는 가끔 열쇠를 들고 열쇠 구멍에 넣지 않은 채 계단에 10초쯤 서 있을거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부모는 잘 모른다.
책에 나온 아들은 아버지의 부와 명예를 바라지 않았다. 출장가지 않고 유명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자신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아빠의 눈동자를 원했다. 손을 잡아주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같이 책을 읽어주고 같이 잠드는 평범한 아버지를 원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아낌없이 보내자. 누가 알겠는가 지금 내가 미래를 저당잡고 허투루 보낸 시간들이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많이 안아줘야지. '다음에'라고 말하지 말아야지.
이것이 오늘 받은 가장 좋은 선물이자 진짜 주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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