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 사랑이 지나간 순간들
사랑에 대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과 에세이 열여덟 편이 담긴 책이다.
깊은 자기 성찰의 목소리를 내는 헤세의 소년 시절의 첫사랑 그리고 마음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원래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 여자도 잊지 못하지 않을까? 첫사랑은 보통 이루어지지 않는 아픈 추억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첫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기억된다. 이 책은 에세이집치고는 읽는 동안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헤세가 어린 시절 지나간 첫사랑을 생각할 때 나 역시도 멈춰 서서 그 순간의 감정을 자꾸만 추억해 냈기 때문이다.
아~풋풋했던 내 젊은 날의 사랑이여~
에세이를 읽다 보면 헤세가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으로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로맨틱한 것만은 아니다. 솔직하면서도 조금은 무덤덤하게 자신의 감정을 담아냈다. 헤세와 함께 어린 시절의 첫사랑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내면의 신앙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헤세의 고향은 남부 독일의 칼프라는 곳으로 헤세가 가장 아름다운 고장으로 찬사를 보낸 곳이다. 헤세의 조부모와 부모는 모두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이런 배경이 그가 동양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라고 하겠다.
고향 슈바벤과 라인 강변의 바젤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추억은 헤세 문학의 원천이다.
전에 내가 낚싯대를 수없이 늘어뜨리곤 하던 그 다리 난간에 잠시라도 다시 앉을 수 있다면 … 지상의 한 작은 부분인 고향 집과 집 안의 창들,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나무의 생명인 뿌리가 땅과 깊이 관련되어 있듯이, 이 지상의 일정한 장소와 끊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헤세는 아버지의 원대로 신학교에 갔지만 반년 만에 그만두고 시계공장이나 서점 점원 활동을 전전했다. 짧은 신학교 생활이었지만 그때 생활은 그의 작품 활동에 많은 모티브를 제공하는 샘이 되었다. 이후 아홉 살 연상인 아내 마리아와 결혼하였는데 결혼 생활은 안락하지 못했다. 이후 루트 벵거라는 여인과 결혼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니논 여사와 결혼하여 마지막 여생의 벗으로 삼았다. 평생 종교, 신, 자아, 내면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고민했던 헤세를 그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너무 늦게야
부끄러움이 많던 소년 시절
곤경에 처한 그녀에게 갔을 때
그대는 미소 지었고
내 사랑으로 하나의 놀이를 하였네
이제는 그대가 지쳐 더 이상 놀이를 하지 않고
당황한 나머지
슬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네
그러곤 언젠가 내가 그대에게 바쳤던
사랑을 갖고 싶어 하네.
아! 그 사랑은 오래전에 꺼져버린
돌아올 수 없는 사랑-
언젠가 그 사랑은 그대의 것이었네
이제 그 사랑은
아무런 이름도 더는 모르고
홀로 있고자 하네
스케이트를 타면서 첫사랑 에마에게 손을 내밀었던 일화를 들으면서 나도 스케이트장에서 있었던 그 손 잡음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스케이트를 잘 못 타기도 했지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는 그 느낌이 좋아서 일부러 넘어지고 붙잡고 했던 그 시절의 추억이 입가에 미소를 가져왔다. 한참이나 지난 그 오래전의 일이 어쩌자고 몇 해 전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일까. 그때 손을 잡아주던 그 사람의 옷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왜 나는건지.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존재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사랑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가 헌신적으로 사랑을 나눌수록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가장 힘들게 얻은 것일수록 가장 좋아하게 마련이다. 13
황홀한 감정만이 사랑이 아니다. 달콤한 입맞춤도 때로는 열정적인 키스도 뒤에 따라오는 갈증 때로는 싫증도 따라왔다. 어떻게 감추어야 할까? 여자들은 사랑하냐고 확인하고 싶어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의 창고는 그가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수많은 세월이 빠져 있거나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공책처럼 텅 비어 있었다. 45
희망 없는 사랑 때문에 겪게 되는 고뇌와 불안과 겁내는 마음, 또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정말 자그마한 뜻밖의 행운과 성공을 비롯한 그 모든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다. 61
여자를 바라볼 때마다 나의 계획된 사랑 고백이 움찔거리면서 무거운 쇠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짓눌렀다. 시적인 밤의 경치, 이를테면 보트, 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부는 잔잔한 호수 같은 모든 것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또한 아름다운 잔디밭처럼 여겨져, 나는 그 안에서 감상적인 한 장면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가슴, 거기에 우리 두 사람 모두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에 깊은 정적 가운데 답답증이 치솟았다. 나는 그에 반항하듯 힘껏 노를 저었다. 81
사랑 고백을 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다. 사랑을 고백하기까지의 흥분되는 시간,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황 설정, 잔뜩 기대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호숫가에 배를 띄우고 둘만의 시간을 만들었는데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 아~이를 어째.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온 남자는 꼬박 사흘을 떠돌아다녔다. 이후 그녀가 말을 건네 왔을 때 그날의 처참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래도 헤세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이란 인간이 격렬한 감정을 느끼고 그러한 감정을 쫓아버리거나 억누르지 않고 행하고 누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아름다움이란 그 자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숭배할 줄 아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행복이란 곧 사랑이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 또한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러나 사랑과 열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슬기로워진 욕구다. 사랑은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사랑할 뿐이다. 사랑에는 어떠한 의무도 없다. 단지 행복해야 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89-90
사랑이란 놀라운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모든 교육, 지식, 비판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 사랑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연결한다. 또한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새로운 것을 나란히 놓는다.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자신의 중심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확실성을 부여하고 정당성을 가진다. 94
세계와 삶을 사랑하고 더욱이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사랑하는 일은 모든 태양 광선에 보답하면서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고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95
가장 멋졌던 일은 키스가 아니고, 저녁때 함께 산책했던 일도 아니고, 비밀스러운 행동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에 의해 나에게 흐르던 힘이었다. 아주 기쁨에 찬 힘, 그녀를 위해 살고 그녀를 위해 투쟁하며 불 속이나 물속이라도 함께 갈 수 있을 듯싶던 힘이었다.
104쪽
<한스 디어람의 수업 시대>에는 슈투트가르트 기계 공장 견습공 한스가 나온다. 아 한스가 누구였지?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수레바퀴 밑에서>가 기억났다. 견습공 한스가 연상의 여자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첫사랑의 순정을 짓밟히고 술에 취해 강가를 걷다가 죽음을 맞이했던 그 이야기.
이 소설에서의 한스는 몇 명의 견습공과 같이 일을 하고 있다. 그중에 28살의 니크라스는 공장 주인의 친구이자 최고참 숙련공이다. 니크라스가 맞은편 직물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마리아와 연인 관계라는 것은 누구가 알고 있다. 어느 날 마리아는 한스에게 접근해서 한스의 마음을 빼앗는다. 최고참 숙련공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한스는 그녀의 사랑을 얻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사실 마리아는 주인 하거와도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자다. 하거는 니크라스를 해고할 계획을 세우고 한스와 하거 그리고 니크라스와 마리아는 니크라스가 공장을 떠나면 벌어질 일들을 각자가 원하는 대로 상상한다. 마리아가 자신과 떠나길 바랬지만 결국 니크라스는 홀로 떠나고 한스는 한 여름날의 사랑 앓이를 겪으면서 더 단단해지고 성장하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나름대로 비극이 있지만 그 사실이 사랑하기를 그만두어야 할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때때로 사랑의 비극을 겪고 비운의 주인공처럼 가슴 앓이를 하지만 사람들은 또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헤세는 사랑을 받기 보다 사랑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받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헤세는 묻는다.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한 달 내내 잠 못 이루고 시를 짓거나 비통한 마음에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은 그런 경험을 했다고.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랑이 아니란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나의 노래는
나의 노래는
그대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나의 노래는
비단 옷자락 스치는 울림으로
당신 옷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계단을 오르네.
나의 노래는
부드러운 향기가 나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밭의 히아신스처럼.
나의 노래는
분홍빛 옷을 입고 있네.
당신의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같이
바삭 소리를 내며 있네.
나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당신과 아주 비슷하다네.
그것은 현관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열아홉 살 중반에 고향을 떠난 해에 만났던 싸이클론(열대성 저기압) 폭풍우를 헤치고 달려와서 자신에게 기습 키스했던 여인 베르타. 세상이 진동할 만큼 우박이 쏟아지는 동안 충격적인 사랑의 폭풍이 기습했다. 폭풍우의 혼란과 어지러움은 칼로 자른 듯 사라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정적이 에워싸던 일을 회상한다. 그때 폭풍이 지나간 자리의 어수선한 풍경을 빗대어 베르타의 사랑을 받고 기습 키스를 받았던 감정이 비슷했음을 회상한다.
현재의 자신과 어린 시절 사이에는 깊은 강이 가로놓여있다고 고백한다.
고향이 옛날 그대로의 포근한 모습이 아니듯이 자신도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
가슴 아픈 것도 사랑이 아니고 잠 못 이루는 밤에 쓰는 시도 사랑이 아니라는 헤세가 말하는 사랑이란 뭘까?
사랑은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순간들이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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