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Gréoire Delacourt
프랑스의 유명한 카피라이터 출신의 작품을 읽었다. <르파리지엥>에서 ‘2014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였으며, 현재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공쿠르상 최종 후보작으로 오른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 다섯 개를 휩쓸었고 이후 출간한 작품들이 모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제목에 이끌려서 이 작품을 만났는데 첫 장부터 강렬한 흡인력이 있다.
한 사람 목숨의 가치는 대개 3만에서 4만 유로 사이를 오간다. 나는 그 가치를 매기는 일을 했다...나이가 든 목숨이면 3만에서 4만 유로 사이를 오가고, 만약 어린 아이라면 2만에서 2만 5,000유로 사이. 만약 227명의 다른 목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한다면 10만 유로 추가.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가치는 얼마일까
책 8쪽
자기 인생의 가치가 얼마일까 묻는 이 남자는 다른 사람의 목숨의 가치를 매기는 보험사 직원이다.
책은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는 주인공 남자의 목소리로 3부는 화자의 딸 조세핀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1-2부의 작은 소제목들은 모두 일정한 돈의 액수다. 처음은 '5만 달러' 소제목으로 시작한다.
남자는 시를 좋아하는 화학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스무살에 열입곱살 어머니를 만나 6개월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남자와 쌍둥이 여동생을 낳은 뒤 두 사람은 각 방을 썼다. 7년 뒤 쌍둥이 여동생 중 한 명이 죽자마자 어머니는 집을 떠났고 집안은 풍지박산이 났다. 이후 아버지는 새로 부인을 들였고 아버지는 결장에서 퍼져나온 종양이 간까지 전이된 채 살아가고 있다.
남자는 누구에게 사랑이란것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남자는 아버지의 고통에도 어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엄마가 떠나기 전 엄마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아마도”라는 대답만 들려줬다. 어머니가 떠난 뒤 동생 안나는 말문을 닫았고 그 뒤 둘은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그는 동생을 위해 매일밤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주는 착한 오빠였다. 그는 백화점 피팅룸에서 만난 나탈리와 결혼해서 딸 조세핀과 아들 레옹의 아빠가 되었다.인생에서 처음으로 행복만을 본 날이다.
나의 엄마, 네 친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거짓말도 보이지 않고, 네 엄마가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모르는 탓에 네가 생기기 1년 전에 지운 아기도 보이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무한하고 거대하면서도 비극적인 그 사랑도 보이질 않네. 당시에 내가 흘렸던 눈물도, 소파에서 뜬눈으로 지새웠던 무수한 밤도, 되살아난 야수의 모습도 보이질 않네. 그저 행복만을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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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이라. 난 미소를 지었지. 친절은 사랑하는 사이에 필요한 게 아닌데. 동업자 사이에나 필요한 거지. 기껏해야 30년까지 동행. 어쩌면 아버지는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
66쪽
그러나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니 한번도 둘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남자는 아내가 바람을 피운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서른 일곱 되던 해에 동정심으로 임산부에게 보험금을 관대하게 처리해준 뒤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레옹이 태어나고 얼마 뒤 엄마가 급성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극장에서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영화를 보았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날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이혼남으로 자식 둘을 부양하던 남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고통의 순간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한다.자신이 물려받은 비겁함도 불행도 자기대에서 끝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먼저 딸 조세핀을 쏘고 아들을 쏘고 그리고 자신이 갈 계획이었다. 방아쇠를 당겼는데 오발로 딸의 턱을 맞았다. 손이 흔들렸고 스스로 계획을 망쳐버렸다. 그가 쏘고 싶었던 것은 딸이 아니었다. 태어날때부터 불행했던 자신의 운명이었고 고통이었다.
아들아, 오늘이 바로 우리가 멈추는 날이다. 우리가 떠나는 날. 네 누나는 방금 떠났어. 네 누나 머리에 베개를 받쳐 주는데 눈물이 흐르더구나. 어쩜 그리도 예쁜지. 내 손이 떨려서, 간신히 방아쇠를 당겼는데, 그 반동이 엄청나더구나. 네 누나는 분명 고통스럽지 않았을 거야. 고통스럽지 않아.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니까. 순식간에. 난 슬프지 않단다. 이제 곧 고통이 끝날 거라는 것을 아는데 슬퍼할 이유가 없잖니. 다시는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네 고모 안느가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잘 있거라. 사랑한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이유는, 타네가 자신의 부모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란다. 타네가 둘이 서로 갈라설 때까지 팔로 파파를 밀고 발로 랑기를 밀어서, 결국 랑기누이는 하늘의 아버지가 되고 파파투아누쿠는 대지의 어머니가 된 거야.
아들아,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이 아비의 깊은 슬픔이란다.
자살하거나 타인을 죽이고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려는 욕망은 언제나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무한한 욕망, 상대방과 서로 마음을 합해 결국 상대방을 구원하려는 무한한 욕망과 만나 배가된다.
111
사건이 있은 뒤 남자는 3년 동안 가죽띠에 고정된 상태로 화학요법을 받았다. 그리고 멕시코 보호구역으로 오게 되었다. 살아있어서는 안되는데 과거도 없이 이방인으로 여전히 살아서 반짝인다. 괴물이었던 그는 친절하고 예의바른 이웃이 되었다. 과거를 잊은채 살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한없이 평안한 이 순간이 정말 좋았다. 우리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그저 이 축복의 순간만이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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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세핀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의사를 통해서 또 안나를 통해서 조세핀이 살았고 몇 번의 수술을 받아 회복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겠다는 레옹의 이야기와 함께.
조세핀은 궁금했다. ‘왜 아빠는 나를 먼저 쐈을까?’
조세핀은 아버지를 증오하며 살아간다. 어느날 자신의 손을 보며 아버지의 손을 발견한다. 모든 것을 망쳐놓은 그 아버지의 손.
아버지는 딸을 죽이는데 실패했고 딸은 살아가는 데 실패했다고 느낀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조세핀에게 의사 선생님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질문한다. 조세핀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넌 이미 평범하잖니, 평범해. 내가 말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평범한 사람은 누군가한테 사랑을 받는 존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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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아버지같은 아버지는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아버지를 그대로 닮고 아버지보다 더 못난 아버지가 된 자신을 보게된다. 의사선생님은 조세핀에게도 아버지의 극단적이고 격렬한 면모를 닮았다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조세핀은 고모에게 아빠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신이 증오하는 그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조세핀은 할아버지의 소식을 전하러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해변에 도착한다. 휘몰아치는 파도를 마주하고 앉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본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요 저 목, 저 등, 앉아있는 저 실루엣,왠지 익숙해요. 저녁마다 내 침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줄 때도 저 모습이었는데 소리치고 싶어요. 달려가고 싶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네요.
조용히 그들의 발걸음을 쫓아가요
그들을 향해. 그 사람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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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울컥하고 만다. 아버지를 용서하게 된 것일까. 아니 이해하고 싶었던 것일까.
조세핀은 아빠가 끊고 싶었던 불행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행복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지나고나서야 행복했음을 깨닫는다. 고통과 달리 행복하게 사는 순간에는 결코 그 행복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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