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의 인생수업
장석주
얼마 전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꺼내서 읽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적어 보고 내 생각을 써 봤다.
그러는 중에 조르바를 좋아하는 또 한 사람을 만났으니 바로 이 책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내가 한 듯이 마음에 드는 책 속의 문장과 장석주의 해석을 담았고
2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애와 문학을 담았다.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2부의 내용 때문이었기에 2부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2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애와 문학
3년 전 그가 이 책을 쓴 2017년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kis1883~1957)가 세상을 뜬 지 60주기가 되던 해였다. 카잔차키스는 1883년 2월 18일 크레타의 평화로운 마을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당시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으나 제국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저항했다. 어린 카잔차키스는 그런 배경에서 지배자들을 향한 증오를 키우며 전사로 성장했다.
연약한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은 열망과 증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싸움을 벌일 각오가 선 나는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맞선 양편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 하며 내 의무가 무엇인지를 잘 알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쟁을 할 만큼 어서 자라고 싶었다.
아버지 미할리스는 바르바리 출신으로 곡물과 포도주 중개상을 하며 평생 농부로 살았다. 그의 증조부는 해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자신에게 증조부의 피가 생동한다고 말했다. 모계 혈통은 그와는 상반된 전형적인 농민들이었다. ‘불’과 ‘흙’은 상반되는 것이었으나 이 둘을 타협시키는 일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과 십대의 시절을 터키의 지배에 반대하는 크레타의 반란의 공포 속에서 보냈다. 15세 때는 자살을 생각하며 유서를 쓰기도 했다. 19세 때 아테네 법대에 입학했고 아버지는 변호사나 정치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인간 영혼의 탐구자가 되는 작가의 길을 택했다. 대학 생활 중에 에세이 두 편을 니르바미라는 필명으로 출간하고 사회극 쓰기에 몰두했다. 대학 졸업 후 희곡 <동이 트면>으로 대학교에서 주는 상을 받았고 아테네의 한 극장에서 공연됐는데 작품의 진보적 사상 때문에 논란을 낳았다. 현대 그리스 문학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미래의 작가의 등장을 알리는 징조였다.
이후 파리로 유학을 떠나서 앙리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고 니체의 책들을 읽으며 철학 공부에 매진했다. 이때 카잔차키스는 니체에 관한 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희곡<도편수 O>를 썼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경유하여 크레타로 돌아왔다.
1911년 카잔차키스는 갈라테아 알렉 시우와 결혼한다. 결혼생활을 하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1912년 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에 지원하여 총리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그 시절 새 교과서 채택 공모에서 집필 응모한 다섯 권 모두가 채택된다. 이때 출판권을 아내의 명의로 했고 이후 이혼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카잔차키스가 35살 되는 1917년, 전쟁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조르바라는 일꾼을 고용해 펠로폰네소스 갈탄 광산 개발에 착수한다. 비록 갈탄 광산 개발 사업은 망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을 쓴다. 이후 수도원과 빈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였는데 빈에서 머무는 동안 ‘성자의 병’이하는 희귀한 병에 걸렸고 그 이야기는 훗날에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926년 1월부터 4월까지는 아테네 일간지 특파원 자격으로 소련에서 여행하며 훗날 <러시아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그 해에 그는 부인과 이혼했고 다음 해에 다시 소련 정부의 정식 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연설을 하고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1941년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했을 때 카잔차키스는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집필 생활만 한다. 작가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처럼 증명하기도 어렵다. 그는 토해내듯 글을 썼고 여기에 그가 쓴 작품들을 다 옮기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카잔차키스는 74세에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 방문 여행을 떠났고 이때 일본의 초청을 받고 일본까지 방문하게 된다. 사실 당시 일본에 독감이 유행이라 주변에서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간 것이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독감 예방 주사를 맞았는데 일본에 머무는 동안 팔이 붓기 시작해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완전히 썩어들어가는 증상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습격한 독감은 그의 생명의 빛을 꺼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병원에서 백혈병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우리의 일생이란 짤막한 섬광이지만 그로써 충분하다"라고 썼던 그는 1957년 10월 26일 눈을 감았다. 그의 무덤에는 생전에 써 둔 묘비명이 세워졌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육체적인 고향이 크레타라 했다. 그의 고향 이라클리온의 바르바리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잔티움의 황제 니키포로스가 아랍인들에게서 크레타를 탈환한 다음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랍인들을 한곳에 몰아넣는데 바르바리가 바로 그곳이다. 그의 조상들이 그곳에 뿌리를 내렸으니 카잔차키스의 선조들의 핏속에는 아랍인의 기질들이 있었다. 이 아랍 혈통의 조상은 여름에는 벌거벗은 몸을 그래도 드러내고, 겨울에는 양가죽을 걸쳤다. 전쟁이 잦고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서 살아남으려면 용맹해야 했다. 어린 시절에 크레타와 터키가 싸우는 싸움터에서 자랐다 그러다 지역 너머 먼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카잔차키스의 두 번째 아내 엘레니가 그와의 첫인상에 대해 쓴 글을 보면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처음 만났던 그날 내가 보았던 그의 모습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상반되는 면모들 투성이고, 그러면서도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타협할 줄을 모르고, 겸손하면서도 요구가 많고 친절하면서도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위대한 예술가들로 하여금 왕성하게 활동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사치를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양보할 줄 모르는 부유한 사람들을 증오하고, 한 가지를 부르짖으며 행동은 달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금욕주의자로 살아가고
1부
인간은 짐승이오. 짐승은 책 같은 걸 읽지 않소.
그리스인 조르바 224쪽
저 멀리 흘러가 버린 20대 시절, 나는 북한산 골짜기의 누군가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가에서 한나절을 뒹굴다 오거나, 버스를 타고 안양의 철 지난 유원지를 혼자 걷다가 돌아왔다.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생'을 살 수만 있다면 부나 명예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시절 내가 소유한 것들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정말 많은 방확의 시간들, 가난한 풍요, 넘쳐나는 자유였다. 그때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낯선 그리스 작가를 만났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지금보다 한창 젊었다. 너무 젊은 탓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나는 아직 20대 중반이었는데, 혈기방장한 채 방황하던 시절이었고 그 방황에 대해 말하려니 낯이 뜨거워진다. 나는 늙은 사람처럼 의기소침하고, 험한 세상에서 내 한 몸을 건사하기도 버거워 쩔쩔맸다.
누구에게나 운명의 책은 있다. 이 책은 운명의 책 중 하나다. 책을 읽는 내내 영혼의 떨림과 의식의 동요를 겪었고 그로 인해 세계와 내 운명이 책을 읽기 전과 달라졌음을 알았다. 나는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를 지금 여기로 호명한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는 메마른 내 영혼에 어떤 감동을 주고, 어떻게 방황하는 한 청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나?
작가의 서문 중
어렸을 때 장석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음악을 듣거나 책만 읽었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와 진로 문제로 대립해서 추운 날 집을 뛰쳐나왔다. 한파 때문에 사람도 없는 그 겨울의 새벽에 첫 전철을 타고 종점역인 인천까지 가서 공중목욕탕이 보여서 들어갔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찰나에 사람이 비루한 짐승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책 따위는 아무 쓸모 없는 종잇조각일 따름이다. 이것이 조르바의 통찰이다.
평생 책과 철학을 좇으며 산 인간은 결국 추상적인 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는 법이다. 그런 사람에겐 육체는 없고 정신만 덩그러니 존재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피와 살이 없는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 오직 책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구하는 사람, 꽃이나 열매 없이 잎만 피우는 나무 같은 사람.’나’는 그런 자각 속에서 조르바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테다. 조르바는 ‘나’의 존재감을 세계 안에 가득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조르바가 ‘나’에게 던져준 것은 ‘삶’이라는 화두였다.
책 125
“자기 안에 행복의 근원을 갖지 않은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리스인 조르바 264쪽
<소돔 120일>을 쓴 마르키 드 사드는 “행복이란 미덕이나 악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과 다른 본질을 인지하는 방식에 있다”라고 했다. 행복한 사람은 미덕이나 악덕으로 인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다는 마음을 먹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자기 밖에서 찾는다.
심리학자 팀 와이드 슈트는 “향수는 널리 퍼져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경험이며 중요한 심리적 기능을 한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향수는 사회적 연대감을 강화한다. 향수는 자부심처럼 자존심을 고양한다. 그리고 향수는 기쁨처럼 행복감을 높여준다”라고 말했다.
행복은 인습적인 게 아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찰나를 통해서 오는데 마치 벼락같이, 기적같이 온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신비를 느끼고 거기서 느끼는 희열을 만끽하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행복이 찾아오는 찰나 날마다 반복하는 인습이던 일상은 꿈이 되고 생명은 한 방울 꿀을 품은 들판의 꽃으로 피어난다. 144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고 쇼펜하우어는 “모든 삶에서 고통이 행복보다 클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비참하고, 괴롭고, 잔인하며, 그리고 짧다"라고 했다. 하지만 조르바가 그 말을 듣는다면 뭐하고 했을까. 조르바는 책에 쓰인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인생을 책에서 배운 자들도 신뢰하지 않았다. 조르바는 들사람의 통찰과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르바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느끼며 행복을 느꼈다. 삶 속에서 행복감을 충만하게 느꼈다. 나는 머리를 쓰면서 살았던 철학자들의 인생론보다는 조르바의 인생론이 더 마음에 든다.
장석주는 삶만큼이나 죽음을 예찬한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죽음 앞에서 무섭다고 징징대지 말라고.
나는 신앙인으로서 죽음을 보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죽음 앞에서 징징대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알면서도 그런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나의 죽음 보다 나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그 단절감, 상실감을 미리 짐작해보려는 시도만으로도 몸서리치게 아프다. 그 마음을 징징거림 하나로 담아낼 수가 없다.
“한 줌의 흙”
책에서 인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은 조르바를 보면 느낄 수 있다. 그는 인간이 그저 한 줌의 흙임을 알았다.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인생을 아낌없이 정열적으로 살고자 했다. 그게 조르바의 매력이다. 머리로 생각하고 펜대를 굴러 그럴싸한 인생론을 말하지 않고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고 사는 조르바.
꺼져가는 불가에 홀로 앉아 나는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그의 존재 깊숙이에서 나왔고 그래서 아직 사람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거의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말에 어떤 가치라도 있다면 다만 그 핏방울 덕분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399쪽
나는 그 해변에서 수많은 환희와 즐거움을 체험했다. 조르바와의 생활은 내 가슴을 넓혀 주었다. 그의 말 몇 마디는 내 영혼을 달래 주었다. 정확한 직감과 독수리 같은 원시의 모습을 함께 지닌 그는 지름길을 잡아 숨 한 번 차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노력의 정상에 이르러 거기에서 더 나아가기도 했다.
186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땐 조르바와 '나'로 이야기되는 보스에만 집중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 카잔차키스의 생애와 문학을 만날 수 있었다. 1부에는 장석주의 시선으로 본 책이기에 사실 2부의 내용이 없었다면 나에게는 타인의 해석을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부를 통해서 카잔차키스의 삶을 자세히 볼 수 있었기에 이 책을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백혈병 진단을 받고 입원했을 때 막스 티우는 카잔차키스가 그해 노벨 문학상을 받을 거라는 소문을 전했다. 부인은 "노벨상이군요!"하고 흥분했다. 그러나 그 해 노벨상은 <이방인>의 작가 최연소 알베르 카뮈에게 돌아갔다. 중국에서는 그의 입원 소식을 듣고 거액의 돈을 보냈고 치료에 드는 모든 비용을 책임지겠다고도 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찾아와 쾌유를 빌었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평생 숨을 토해 내듯 글을 썼다는 말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령의 나이에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행길에 올랐다가 변고를 당했지만 그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작가의 연보도 길고 그의 세세한 내용은 더 방대하다.
#장석주 작가의 인생 책
장석주 작가는 서재가 아니라 책을 보관하는 개인 도서관 별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책이 많다. 매년 1000권의 새책을 만난다고 한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와 사색 그리고 글쓰기의 시간으로 보내는 엄청난 양의 독서가와 전업작가다. 그 작가의 눈을 통해 만난 조르바와 조르바의 인생수업이라 더 즐거웠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스무 번도 넘게 읽었다. 2013년 여름, 그 책을 들고 터키와 그리스를 여행했다. 카잔차키스의 고행이자 무덤이 있는 크레타에 머물면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그 책과 매일 함께 하다보니 어떤 문장들은 다 외울 지경이 되었다. 이제 그 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되었다. 그것이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나도 지금까지의 책들 중 <그리스인 조르바>를 가장 많이 읽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인생의 책'을 고백할 정도는 아니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것은 장석주가 이야기하는 책은 '열린책들 세계문학판 53쇄 판본'이었고 내가 소장한 책은 더 클래식이어서 페이지 수가 많이 달랐고 내용도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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