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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한 권의 책

세기의 재판 이야기: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by 북앤라떼 2020. 8. 8.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세기의 재판 이야기

박원순

나는 지난 2001년 고대 병원에 8일 정도 입원을 했었다. 아무리 아파서 입원을 하였다해도 하루 종일 병원에서만 지내는 일은 참 힘들고 지루했는데 그나마 사람들이 문병을 오는 것이 가장 큰 낙이었던것 같다. 찾아와준 이도 반갑지만 책을 가져와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책은 또 얼마나 반가운지. 이 책도 그때 받은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 추억의 책이다.

지난 7월 9일 박원순 시장의 사망 소식은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놓고 정치권을 비롯하여 시민들까지 갑론을박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죽은자는 말이 없고 그래서 추측은 더 난무하다.

나 역시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이 책이 생각나서 서재에서 꺼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극적인 사건들이 법정을 무대로 펼쳐졌던 것을 보게 된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허위, 무고와 희생, 억압과 저항의 법정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가상의 드라마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 한 경우들이 많았다. 그런 역사적인 사건은 당대의 법정에서 끝나지 않고 후대에 새로운 평가를 받고 가상의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박원순은 1996년 참여연대가 운영하는 ‘참여사회 아카데미’에서 세기의 재판이라는 강좌를 열어 재판을 통해 본 인물 열전을 다루었는데 그때 출판사에서 책으로 엮자고 하는 것을 시간문제로 하지 못하였다가 한겨레 신문사 덕에 결실을 맺게 되어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서문의 설명이 책이 나온 배경이 되겠다.

소크라테스, 예수, 잔 다르크, 중세의 마녀들, 토머스 모어, 갈릴레오 갈릴레이, 드레퓌스, D.H 로렌스, 페탱, 로젠버그... 역사의 희생자이자 영웅들의 면면이다. 다시 읽어봐도 흥미롭고 역사적인 세기의 재판임이 틀림없다. 그의 죽음에 있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그의 책을 읽으니 그가 추구했던 어떤 죽음의 모습이 여기에 담겨 있는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됨은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의 영역이라 해 두고 나는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임에도 특별히 한 재판씩 곱씹으며 다시 읽고 싶어졌다. 첫 번째 재판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저자박원순출판한겨레출판발매1999.10.30.

1.소크라테스의 재판

:악은 죽음보다 발걸음이 빠르다

이제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끝없는 토론 속에서 지혜를 찾던 노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선 법정으로 간다. 법정에 선 그의 나이는 일흔 살이다. 소크라테스가 태어났던 기원전 470년 아테네는 최고의 번영기였다. 인류 역사상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한 도시에 몰려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명의 광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시들기 시작했다. 그가 법정에 서기 5년 전인 기원전 404년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였고 아테네에 예속 정부가 들어서 있던 시기였다. 패전의 음울한 기운은 아테네를 자욱했고 패전의 상처를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했다. 새로운 집권자 아니토스의 반대파인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를 제자로 둔 소크라테스 그가 적임자였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기소됐고 재판이 시작됐다.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을 고발자로 지목한다.

플라톤, 크세노폰, 디오게네스의 저작에서 일치하는 소크라테스의 범법 사실은 국가가 승인하는 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을 섬겼으며 청년들을 타락시킨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친구 카이레폰의 쓸데없는 짓 때문이었다. 이 친구는 델포이 신전에 가서 무녀에게 신탁을 구했는데 그녀는 “세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테네의 모든 지식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도 ‘재판관’이 아닌 ‘아테네 시민 여러분’이라는 호칭만을 사용했다. 변론의 태도를 보면 그는 사형 판결을 받기 위해 무지 애쓰는 사람 같았다. 그를 무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도 최후 변론에서 마음이 돌아섰다. 그러니 그는 변론을 할수록 적을 만든 것이다. 어린 시절의 친구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출을 권했고 탈출은 사실상 어렵지 않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대다수 사람들의 견해에 얽매여야 하는가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일세. 우리는 단순히 사는 것을 소중히 여길 게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네. 우리가 평생토록 진지한 논의를 통해 동의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이 나이의 우리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며칠 동안에 내동댕이쳐 버려야겠는가? 더구나 지금 우리가 당국의 승낙을 받지 않고 여기서 빠져나간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겠나? 그것도 절대 해를 끼쳐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가 되지 않겠나?

삶에 매달리고 이미 비워진 잔을 애석해 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네. 그러니 내가 말한 대로 해주게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잔을 입술에 대고 태연하게 즐거운 얼굴로 약을 마셨다.

“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내가 닭 한 마기 빚진 게 있네. 기억해 두었다가 꼭 갚아주게”

이것이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가장 완벽한 죽음, 가장 철학적인 죽음이 아니었을까. 삶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이 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죽었다. 흐느끼는 제자와 친구의 슬픔을 달래주며, 누구를 저주하는 말도 없이, 그렇게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사실 그는 죽음을 오래 연습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철학에 심취한 사람은 평생토록 오로지 죽음만을 추구하며 죽음을 연습하고 있다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생 동안 죽음을 갈망해 온 사람이 어찌하여 그때가 왔을 때 그가 항상 추구하고 원했던 것을 마다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짚어야 하는게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규율과 제도를 따라야 할 상황에서 자주 인용하기 좋아하는 '악법도 법이다'

과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한 적이 있는가?

<변명>에 보면 소크라테스는 ‘ 국가가 나에게 철학을 포기할 것을 명령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악법도 법이다’라고 후대가 해석한 것과 배치되는 입장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포기하면 석방해 준다는 제안도 거부하고 독배를 마신 이유가 시민으로 법에 동의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했던 것인데 최근에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더 많다. 대표적으로 강정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소크라테스를 복권시키고 있다.

우리는 과거 독재 정권의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민주화의 의지를 다진다는 의미에서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부역해 온 <크리톤>의 소크라테스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한 불경죄와 청소년 타락죄로 유죄 선고를 하고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사후에 잘못을 뉘우친 아테네 시민에 의해 뒤늦게 명예를 되찾았듯이 박제화된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후, 우리는 부당한 법령에 복종할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변명>의 소크라테스를 부활시켜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의 민주적 시민정신을 기릴 필요가 있다.

책 속에서

복권시켜야 할 또 한 사람은 악처의 대명사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다.

그녀는 정말 악처인가?

크세노폰은 크산티페가 교육을 받지 못하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녀의 친정은 귀족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당시 귀족들의 이름이다. 완전히 무위도식으로 일관했던 소크라테스 대신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던 부인이 친정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소크라테스에 대해 또 다른 논쟁이 있는데 그가 한때 미르토라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더 대책 없는 남자임에 틀림없다. 크산티페는 철학자라는 명목으로 밖으로만 맴도는 가장을 대신해서 가계를 꾸리고 아이들을 키웠다. 그녀가 소크라테스에게 고분고분한 부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이제 그녀도 악처로부터 해방시켜주자.


2. 예수의 재판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피고인: 나사렛 예수

* 나이: 33세

* 직업: 무직, 전직 목수

* 죄명: 신성모독 죄, 반역죄

* 공소사실: 자칭 ‘하느님의 아들’로 행세하면서 무리를 끌고 다니며 사술로 이적을 행하고 제사장과 성전을 함부로 비난하는 등 하느님을 모독하며 동시에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해방자인 양 혹세무민하여 대 로마 황제에 반역한 자임

서기 33년, 유월절 축제를 하루 앞두고 신성모독과 반역죄 혐의로 체포된 나사렛 예수가 로마 총독 법정에 섰다. 복음서마다 예수의 체포와 재판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 있다. 제1막 체포, 제2막 하난의 심문, 제3막 가야바의 재판, 제4막 빌라도의 재판, 제5막 유대 민중 앞의 심판

예수는 홀로 섰다. 극악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답변은 위엄과 진실을 지키고 있었다. 예수는 위대한 변론가였다. 그 야만적인 재판에서 예수 자신보다 더 훌륭한 변호사는 있을 수 없었다. 이미 운명이 정해진 재판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가”라는 물음에는 이미 쌍올가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인하면 신성모독이여 부인하면 사기꾼이었다. 어떻게 대답하든 이미 적의 수중에 있었다. 예언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났다. 예수가 체포된 지 겨우 24시간 안에 모든 재판 절차는 끝이 난 것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 재판은 완전한 불법이며 무효이다. 재판은 단심으로 이루어졌고 사형선고에 대한 항소나 상고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예수가 그럴 리 만무하지만 정당한 재판을 받을 예수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적대적인 대중 앞에 내맡겨진 일종의 인민재판이었다. 예수 재판의 불법성을 오늘의 관점으로 따지기는 어렵다. 재판은 당신의 규범과 절차에 따를 수밖에 없다. ‘죄형법정주의’는 행위 당시의 법률에 의해 범죄로 규정된 것만 처벌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P52

예수를 재판하고 처형시켰던 법은 부서지고 지금은 없다. 하지만 법률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 재판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대인의 피의 대가로 막 수립된 신생국가 이스라엘 법원에 한 건의 재심사건이 접수되었다. 피고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심을 요청하는 소장이었다. 이 소장을 받아든 법원 당국자들의 낭패감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예수 재판의 절차에 대한 기록이 하나라도 있어야 재심을 열고 말게 아닌가.

인류가 발전시켜 온 수많은 사형집행 형태 가운데 십자가형만큼 고통스럽고 잔인한 것은 없었다, 예수의 죽음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존재다. 십자가는 고난과 형극, 죄악과 대속, 초월과 세속, 그리고 부활과 희망의 상징이다. 십자가 없는 예수는 있을 수 없고 십자가 없는 기독교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예수 재판이 몰고 온 피바람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모든 기독교도들의 저주와 핍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를 죽인 동족 유대인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응징과 보복의 역사는 피해 가기 어려웠다. 예수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성은 무너져 폐허가 되고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쫓겨나 전 세계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62

예수는 분명 양심수였다. 엠네스티의 정의에 따르면 양심수는 ‘자신의 신념이나 사상을 어떤 폭력이나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 표현한 혐의로 수인이 된 사람’이다. 예수는 이러한 정의에 딱 들어맞는 양심수이다. 65

예수는 2000년 전 그렇게 골고다에서 죽었다. 예수의 신성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위대하고 특별한 존재이다.

예수가 말했듯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산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책 66쪽


3. 잔 다르크의 재판

:무덤도, 초상화도 없는 성녀

비상한 시기에 태어나 백척 간두의 조국을 구하고 마침내 조국의 포로가 되어 학대와 재판 끝에 비극적으로 화형을 당한 그녀의 삶과 죽음

잔 다르크는 어떤 여성보다도 많은 책을 낳게 했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그러나 높은 명성과 엄청난 자료에도 불구하고 잔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신화와 전설의 중간 틈새에 끼어 있는 잔느의 재판을 찾아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잔 다르크의 재판을 500년이 지난 지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만숑이라는 평범한 공증인 덕분이다. 그는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기록했고 잔느가 처형당한지 4년 후인 1435년, 재판관 중의 한 명이던 코르셀르와 공증인 만숑의 기록이 라틴어로 번역되고 공식적인 재판 기록 다섯 부로 만들었다.

만숑은 직접 세 부를 필사해서 하나는 인단 심문관에게 하나는 영국 왕에게 하나는 코숑 주교에게, 원본은 1455년 재심 재판의 판사들에게 전해졌으며 후에 법정 명령으로 파기되었고 마지막 원본 하나는 로마에 송부되었다. 1475년 오를레앙에서 원본 하나가 발견되었으며 오늘날 파리에 세 개의 원본이 전해지고 있다.

영국의 군사 주둔지이자 프랑스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루앙에서 500여 년 전 한 재판이 열렸다. 재판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1380년 프랑스로 가야 된다. 왕위 계승과 정통성 문제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두 나라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고 있을 때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한 그 시기에 왕위에 오른 샤를 6세는 미쳐버렸고 왕비 이자벨라는 미친 왕의 뒷전에서 사랑놀음하기에 바빴다. 영국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413년 헨리 5세의 즉위로 전열을 갖춘 영국은 2년 후 다시 전쟁을 재개했으며 아쟁쿠르 전투에서 수천 명의 프랑스 기사를 몰살시켰다. 또한 왕실에 불만을 품고 있는 부르고뉴 공작 필립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프랑스를 남북으로 가르는 루아르강 이북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절반과 수도 파리가 영국으로 넘어가고 1420년 치욕적인 트루아 조약(영국 왕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카트린 공주와 결혼을 하고 둘 사이에 태어날 자식이 샤를 6세가 죽으면 영국과 프랑스의 왕위를 동시에 계승한다는 내용)을 맺게 된다. 살아있는 왕세자를 제껴두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왕세자로 만든 셈인데 결국 프랑스 왕권이 영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몇 주 간격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조약에 따라 요람에 누워있는 아기 대신 삼촌 베드포드 공작이 섭정왕이 되었지만 오를레앙파는 샤를 왕세자를 왕으로 옹립하였지만 지도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이런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도 프랑스 왕실과 귀족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고 교회는 부패하였다.

아, 교회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도다. 교회가 탐욕과 방탕의 진흙 속에 뒹굴고 그 욕망이 지상에 넘치는도다

-한 주교의 비판

영국의 점령으로 민중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영국군은 수시로 약탈하고 여자를 겁탈하였고 집과 성곽을 불태웠으며 사람들을 죽였다. 흑사병까지 돌아서 길거리에 시체가 쌓여갔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망시킨 교회에 맞서면서 악마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마녀 신앙은 언제나 혼란한 틈에 사람들을 유혹했다.

1428년 영국은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막마지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를레앙 전투가 시작되기 전인 그해 5월, 동북부 보쿨뢰르 지역의 사령관에게 한 소녀가 찾아왔다. 동레미라는 작은 마을에서 온 열여섯 날 소녀는 자신이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샤를 왕세자에게 왕관을 씌워드리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령관에게는 쫓겨났지만 이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졌고 사람들은 잔다르크를 보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으며 전의를 상실했던 프랑스의 병사들의 시가는 충전되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듯 사령관은 쫓아버린 소녀를 다시 찾아가 왕세자를 만나도록 허용했다. 먼저 심문관의 신문이 있었고 심문관들은 그녀가 ‘의심할 바 없이 신의 사명을 부여받은 처녀’라고 보고했고 남장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남장을 허락했다. 왕세자는 그녀를 프랑스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잔 다르크 일행은 수백 명의 군대로 진용을 갖추고 오를레앙으로 출정하였다. 잔 다르크는 속전속결로 오를레앙 주변의 취약한 요새들을 속속 함락시켰다. 퇴각하는 영국군의 모습과 그녀가 꽂은 하얀 깃발은 늪에 빠졌던 프랑스 병사들에게 용기를 주고 일격을 당한 영국군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을 주었다. 파테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잔은 랭스로 출발했고 랭스는 저항 없이 성막을 열었다. 왕세자는 그곳에서 샤를 7세로 등극하게 된다. 샤를 7세는 잔느의 공덕을 치하하기 위해 원하는 것을 물었다. 잔다르크는 자신을 위해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가난한 고향마을의 세금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덕분에 그 마을은 360년 동안 세금을 면제받았다. 대관식이 끝나고 랭스대성당은 환호와 갈채가 가득했지만 잔느는 영광의 절정에 서 있었다.

전세가 역전된 때에 파리로 진격하여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잔느의 전략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왕은 그녀 모르게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스스로 파리 공격을 포기했다. 샤를 7세가 협정만 믿고 떠도는 동안 잔다르크는 최후의 출정에서 영국군과 부르고뉴 동맹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코숑 주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가진 파리대학과 영국으로 하여금 그녀를 이단 혐의자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교회 재판에 넘겨 마녀임을 입증해서 샤를 7세까지 정리할 계획을 세웠다. 12년 동안이나 영국에 점령된 루앙은 파리에 버금가는 대도시였지만 ‘제2의 런던’으로 불리는 루앙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름은 교회 재판이지만 정치적 재판이었다. 1431년 2월 21일 루앙 성당에서 시작된 재판을 보면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잔다르크가 어떻게 재판에 영리하게 답변하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그녀는 함정이 도사린 질문을 잘 받아넘겼으며 다섯 차례의 재판에 녹초가 되는 것은 심문관들이었다.

“그대는 지금 은총의 상태에 있는가”라는 어려운 신학적 질문에 그녀는

“내가 만일 은총의 상태에 있지 못하다면 하나님께 은총을 내려주십사 기도드릴 것이며 만일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 이를 지켜주십사 기도드릴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5월 29일 잔느의 화형의 결정되고 30일 처형 직전 잔다르크는

“아 나를 이렇게 잔인하게 대하다니, 화형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곱 번 침수당하는 편이 나으리라. 나의 몸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타버려 재로 돌아가누나” 라고 말하였다. 그녀의 재는 세느강에 뿌려졌다.

잔느는 죽었지만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 잔 다르크가 성녀라는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 지독한 불길에도 잔느의 심장은 타지 않은 채 남았고 영혼이 그녀의 육체를 떠나자 비둘기 한 마리가 연기 속에서 날아나왔다는 말이 퍼졌다.

1453년 잔느가 죽은 지 22년 되던 해 영국은 프랑스를 영원히 떠나게 된다. 그 후에야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재판 기록을 손에 넣어 재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잔느의 재판의 총 연출자인 코숑은 죽었고 영국은 프랑스를 떠난 후였다.

1456년 7월 잔느를 처형한 재판은 무효라고 선언되었다. 재심 선고문은 잔이 화형 당한 루앙에서 낭독되었다. 그녀는 다시 민족의 영웅의 이름을 되찾았다.

1920년 잔 다르크는 교황 베네딕트 15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오! 잔이여! 그대를 기억할 무덤도 초상화도 없지만 영웅의 진정한 기념비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았던 이여!

프랑스 작가이자 정치가 앙드레 말로


4. 토머스 모어 재판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토머스 모어는 아버지가 런던의 법률가였지만 귀족도 왕족도 아니었는데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능력 때문이었다. 영어권 국가에서 모어는 가장 위트 있는 사람, 가장 총명한 영국인으로 손꼽힌다. 모어의 친구였던 에라스무스는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모어는 14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했고 18세에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여 22세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27세에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첫발을 내딛지만 헨리 7세의 가혹한 세금 부과안에 맞서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퇴하게 된다. 이후 법률을 공부하다 헨리 8세 직위 후 다시 수상 직책까지 겸하는 대법관이 되지만 스스로 대법관의 자리에서 내려와 단두대에 올라서게 된다.

모어가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영국 역사상 모어가 재임했던 시기만큼 송사가 공정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헨리 8세가 통치한 38년 동안 공식적으로 180명이 처형당했고 이단으로 죽거나 암살당한 사람의 숫자를 셀 수가 없다. 헨리 8세의 왕비 중 3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헨리 8세는 형 아서의 아내였던 캐서린과 결혼했다가 다시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 후 앤 불린과 결혼하는 문제가 주된 화두였다.

대법관직을 사임한 모어는 앤의 왕후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많은 지식인들이 권력의 요구에 ‘이번 한 번만’하면서 참여하지만 후에는 권력의 창녀가 된다는 것을 역사는 실증한다. 모어는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왕의 이혼과 결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기 때문이었다. 모어의 도덕적 무게, 그것이 그들을 두렵게 했던 것이다. 모어의 침묵은 유럽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헨리의 국부이자 모어의 강적인 크롬웰은 이 틈을 노려 모어를 검찰에 소환했다. 오랜 친구 노포크 공작은 모어에게 군주의 분노는 곧 죽음이라며 설득했지만 모어는 “그것뿐입니까 공작? 그렇다면 공작과 나 사이에는 나는 오늘 죽고 공작은 내일 죽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모어는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최고의 권력을 누린 그가 런던탑 감방에서 처형당하기까지 15개월을 보냈다. 그 안에서 그는 기독교 지혜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시련과 위안>을 집필했다.

그의 재판의 주 논쟁은 그가 왕의 결혼에 저항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왕의 권능을 악의적이고 반역적으로 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반역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침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러분의 법이든 세상 어느 법이든 간의 나의 침묵을 처벌할 수는 없다

토머스 모어

모어는 반박했지만 그들은 “침묵이 바로 법을 위반한 명확한 증거”이자 시위라고 말했다. 법이 옳고 정의로우며 합법적이라고 말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가 충성스럽고 진실한 신하라 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만으로는 처벌받지 아니한다"라는 법 이론이 이미 확립된 후였지만 말이다.

당신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과 양심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왕에 대한 중상과 폭동, 치안방해를 선동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의 양심까지 문제 삼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 양심과 생각을 드러내 보인 적이 추호도 없음을 확인해 두려 합니다.

토마스 모어의 변론

그는 법조인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법조문 하나, 문구 하나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목숨은 목숨이고 법은 법이었다.

15분 만에 배심원단은 유죄 평결을 내렸다. 누구 한 명도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는 곧 자신의 목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구했고 역사에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남았다. 모어는 순교 과정에서도 여유 있는 해학을 잃지 않았다. 사형집행관에게 격려했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내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모어는 스스로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서 순교자처럼 걸어갔다. 모어의 불후의 명작 <유토피아>에 보면 모어의 인간적인 고민의 흔적이 담겨있다. 모어의 딸 마거릿이 알고 있는 비밀이 공개되었는데 그는 고위 관직에 있을 때 좋은 관복 안에 늘 거친 모직 셔츠와 말총으로 만든 속옷을 입어 피를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세속의 단맛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경계했다. 그러나 모어가 남긴 작품들과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때로는 모어가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 분명히 인식하기 어렵다. 그것은 시대가 용틀임하며 새롭게 나아가는 과도기의 혼란이기도 했다. 혁명기이자 전환기 시대의 포로였던 모어, 총명과 도덕과 신앙을 겸비했던 모어는 방대한 서적과 편지를 남겨주었기에 후대에 우리는 모어를 만날 수 있다.

역사의 ‘죄와 벌’

모어를 처형한 자들은 죄의 대가를 받았다. 앤 왕후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모어를 고발했던 국정 농단의 크롬웰도 모어가 떠나고 5년 뒤 사형을 받았다. 자신의 목을 걸고 ‘최악’의 길을 막으려 애썼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양심을 지킨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책 전체의 제목이 된 모어의 재판이 가장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모어가 갖춘 지성과 영성과 감성이 큰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온다. 요즘 정치를 봐도 세상을 봐도 '권력의 시녀'가 되기도 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나의 소신과 바꾸는 것은 얼마나 보기 드문 일인가. 누구의 이해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역사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언젠가는 제대로 된 평가가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5. 화형 당한 100만 중세 여성의 운명

:마녀 재판

이 재판의 주인공은 위대한 영웅도 신념에 찬 의인도 아니다. 한 시대의 몽매와 편견, 귄위와 폭압의 질서가 빚은 가장 비극적인 군상, 바로 중세 유럽의 마녀재판에 관한 이야기다. 수많은 여성들이 마녀라는 올가미를 쓴 채 몽매하고 우둔한 법정에 섰고 화형장의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의 죄명→

-악마와 계약을 맺은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불법적인 악마 연회에 참석한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 맞춘 죄

-남성 악마와 성교한 죄

-여성 악마와 성교한 죄

다행히 이 황당한 항목을 범죄로 인정하는 나라도 없지만 이젠 마녀라는 존재도 믿는 사람이 없어졌다.

오늘날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지 않는 것만큼 확고하다

스카라 학자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중세인들은 마녀의 존재와 위험성을 확신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많은 숫자가 그렇게 죽어갔다는 것을 기록이 없다면 믿기 어렵다.

마녀재판은 1420~30년경 프랑스와 스위스 접경 알프스 일대, 도피네 지방, 쥐라산맥 일대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마녀는 중세 마녀재판 전에 존재했는데 그때 ‘와이즈 우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신비한 직관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병을 고치기도 했고 여성의 다산을 돕거나 낙태를 시키는 일을 하였다. 일상에서 필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네에 전염병이 돌거나 환자나 태아가 죽으면 이들은 마녀로 낙인찍혔다. 가톨릭의 이단박해는 1233년 이단 심문소로 본격화되었고 1484년 교황이 마녀의 존재를 공인하고 엄단한다고 선포한 최초의 문서로 남아있다. 마녀재판은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말까지 극점에 다다른다.

이렇게 마녀 희생자들이 생겨난 데는 중세 유럽의 무자비한 사법절차와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누가 마녀라는 소문이 나면 즉각 조사가 실시되고 강압적 심문과 유도로 마녀가 된다. 누구도 그 가혹한 고문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마녀들은 주로 가난한 집안의 어린 소녀나 준노년층의 여성으로 77.1%가 젊은 여성이었다. 혼자 사는 여자는 가장 손쉬운 표적이었다.

마녀 판별법은 다양했는데 몸무게가 25kg을 마녀의 무게로 정했다. 사마귀, 반점, 부스럼, 기미 주근깨도 악마의 표징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도 마녀의 증거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문에 의해 죄인으로부터 참된 자백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바보 같은 것’으로 단정하고 384년 로마의 교회회에서는 고문이 금지되었는데 고문을 금지한 기독교가 고문을 부활시킨 장본인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마녀사냥은 종교개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마녀사냥은 메시아적 사회운동과 동시에 진행되어 가톨릭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마녀재판의 허구성을 밝히고 용감하게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다. 독일의 법률가 아그리파폰 네데스하임, 신학교수 프리드리히 후안 슈페, 법학교수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 등은 마녀사녀 광풍의 한복판에서 이성의 빛을 비춘 사람들이다.

미국에서의 마녀소동은 매사추세츠 부근에서 시작되었다. 살렘이라는 마을의 새뮤얼 페리스 목사는 아픈 두 딸을 의사에 보였는데 의사가 원인을 찾지 못하자 악령이 깃들었다고 진단하였다. 아이들은 실어증에 걸리고 경련을 일으키거나 중얼거리는 증세도 보였다.그렇게 아이들의 입에서 언급된 50명 이상의 사람들이 기소되었다. 모두 자백에 의해서만 진행되었다. 마녀재판을 한 10명의 재판관 가운데 3명, 재판받은 마녀, 그 재판에 문제가 있다고 석방운동을 한 사람 모두가 하버드 대학 출신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하버드 마녀재판 순례 코스’가 관광상품으로 있다.

마녀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뒤에 나올 드레퓌스 사건,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와 일본의 파시즘,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에도 마녀재판과 같은 광기를 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분단 반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남용은 이 땅을 빨갱이 사냥터로 만들었다. 공정한 재판과 절차는 실종되었고 고문에 의해 사건은 조작되고 자백만을 중시한 재판이 난무했다. 국가보안법은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틀이었다.

아 어둠을 몰고 오는 빛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몽매하고 사악한 법정에서 사라졌던 수많은 희생자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시대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6. 갈릴레오 갈릴레이 재판

:그래도 지구는 돈다.

피렌체 출신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일흔 살의 나이로 법정에 직접 출두하여 이단의 망언을 엄단하는 종교재판관이신 여러 추기경 앞에 무릎을 꿇는 바입니다.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거니와 나는 성스러운 가톨릭교회와 교황께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언제나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앞으로도 그것을 믿을 것입니다. 나는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며 움직이지 않고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움직인다는 나의 견해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633년 6월 22일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철회 맹세를 하고 친필로 서명하는 바입니다. ]

선서를 마치고 나오면서 갈릴레이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 그래도 역시 지구는 움직인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해진 것은 1775년 발행된 책이 실린 문구 때문이다.

이것은 지구가 움직인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재판소에 갇혀 고문을 당한 갈릴레이의 초상이다. 그는 방면된 순간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면서 발을 내딛고 명상적인 기분으로 “그래도 역시 그것은 움직인다"라고 말했다. 그것이란 바로 지구를 말한다.

그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공식적인 재판에서는 철회 맹세를 했는지 몰라도 실제의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갈릴레이와 대조되는 사람은 조르다노 브루노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얼마 전 리뷰를 쓴 유럽 도시 기행에서도 언급했었다.

https://blog.naver.com/bookandlatte/221983724005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유럽 도시 기행유시민그들은 어떻게 더 자유롭고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답을 찾기 위...

blog.naver.com

갈릴레이 재판 33년 전인 1600년, 브루노는 바로 그 장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화형을 받았다. 브루노는 열네 살 때 도미니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 생활을 하며 수도원의 장서들을 모두 섭렵해 나갔다. 브루노는 지동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브루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수도원을 나와서 유럽을 돌아다니며 기존의 학설과 상반되는 이론을 주장하고 다니다가 논쟁에 휘말렸다. 천구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무한한 우주이며 항성은 우리 행성계와 비슷한 행성계의 태양이며 중심이라고 외쳤다. 뒷날 <무한한 우주와 무한한 세계에 관하여>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의 주장은 가톨릭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의 주장은 기득권 세력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고 감옥 수감 중에서도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아서 결국 장작더미 위에서 “우주는 무한하며 무한한 수의 세계가 있다"라는 마지막 외침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과연 죽을 정도의 일이던가?

이것이 과연 죽여야 할 정도의 일이던가?

그러나 그보다 전 세기에 생각만으로 침묵만으로 단두대에 이슬로 사라진 토머스 모어의 재판을 생각해보니 그 몽매한 시대에는 당연히 있을법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두 사람을 인도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 다. 그는 1473년 2월 19일 부유한 상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외삼촌에게 입양되어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수학과 천문학에 흥미를 가지면서 수도원을 나와 대학에서 교회법과 수학, 천문학을 공부하고 1501년부터는 파도바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나중에 갈릴레이가 교수로 재직했던 곳이기도 하니 두 사람의 인연이 시간을 초월하여 유서 깊은 대학도시에서 맺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희랍어, 수학, 천문학, 법학자, 의사로 폴란드로 돌아와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지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증명하였지만 자신의 이론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책의 출판을 미루고 기다렸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30년 동안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진리를 담은 책의 출판을 허락했다. 1542년에 그는 중풍으로 전신마비가 되었고 그다음 해 1543년에 <천체와 회전에 관하여> 책이 나왔다. 교회는 그를 법정에 세우지 못했다. 그는 그 책이 나온 오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 대신 그의 책이 법정에 섰고 73년 동안 금서 딱지로 유통이 금지되었다.

다시 갈릴레이로 가자.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 브루노를 보았을 때 자신의 과학적 신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에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과학자 대신 시인이나 몽상가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철회 맹세문까지 쓰고 나온 갈릴레이는 심각한 류머티즘과 습관성 불면증에 시달렸고 후에는 거의 눈이 멀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시련도 그의 학문자로서의 탐구 의지는 꺾지 못했다. 1642년 1월 8일 그는 숨을 거두지만 여전히 적들은 그의 명성을 축소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어떤 기념비도 세워주지 않았으며 그의 책을 금서목록에 포함시켰다. 1968년 비엔나의 추기경 쾨니히는 로마교황청에 갈릴레이의 명예 회복 청원서를 제출했고 20년이 흐른 뒤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공식적으로 교회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선언하고 사면을 하였으니 참 긴 세월이 걸렸다,


7. 드레퓌스 재판

: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나는 맹세코 주장합니다. 나의 생애와 명예를 걸고 확언합니다. 이 엄숙한 순간, 이 법정 앞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당신들과 배심원 여러분 앞에서 프랑스 앞에서 드레퓌스의 결백을 나는 주장하는 바입니다. 나의 작가 생활 40년과 필생의 작업으로 획득한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선언합니다. 내가 얻은 것, 내가 이룩한 명성, 또한 프랑스 문학의 성장에 기여한 나의 공적, 이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드레퓌스가 결백하지 않다면 신이여! 이 모든 것이 파멸하고 나의 모든 작품이 잊혀지도록 하소서! 드레퓌스는 결백합니다.”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떻게 이렇게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걸 수 있는 명예와 명성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또 멋진가.

에밀 졸라. 작가로서 단순한 호기심으로 관심을 가졌던 드레퓌스의 사건의 결백을 확신하면서 그는 펜을 들었다. 이틀을 꼬박 새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써 내려갔으니 그렇게 1898년 1월 13일 <나는 고발한다>가 탄생된 것이다. 이 논설은 거대한 폭풍우가 되어 프랑스 사회를 격동시켰고 졸라의 영원한 꼬리표가 되었다.

에밀 졸라가 이렇게까지 하게 된 드레퓌스는 누구인가?

유대계 출신 드레퓌스는 파리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포병학교에 입학하여 대위가 되고 대학원 과정인 전술학교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엘리트 들만 들어간다는 참모본부 참모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독일군에 처참한 패배를 한 프랑스인들은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다. 이때 독일군에 비밀 명세서를 보낸 첩자가 있다는 것이 감지되었고 유대인 드레퓌스를 명세서 필체와 비슷하다며 체포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다. 사실은 필적이 전혀 달랐고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동료들과 필적 전문가는 그를 범인으로 몰아갔고 재판은 나흘 만에 종결되었다. 재판관들이 판결을 논의하기 위해 퇴장하려 할 때 뒤파티 소령이 재판관을 향해 다가가 봉투를 전달했다. 1980년대 김재규 재판에도 있었다는 ‘메모 재판’이었다. 곧 그는 군으로부터 불명예 제대를 시키고 프랑스로 추방하여 종신 유폐형에 처한다는 판결문을 들었다.

그는 치욕스러운 퇴역식을 치르고 악마도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수감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진실은 진실을 향해 열려 있는 귀에 들어가게 마련이다. 진짜 범인은 에스테라지 소령이었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밝히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클레망소는 드레퓌스 사건에 800편의 글을 써서 <오르르> 지에 실었다.

국가이익 그것이 법을 위반할 힘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법에 관해 말하지 말라. 자의적인 권력이 법을 대신할 것이다. 오늘 그것은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이며 국가이익은 이성을 잃은 채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 채 쳐다만 볼 것이다.

12년 만의 승리

빗발치는 항의에 힘입어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는 특사로 석방되었다. 1900년에는 다시 사면령이 내려졌고 그의 명예가 회복되어 1906년에는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고 승진 복직되었다. 그 후 악마도에서 쓴 일기가 출판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에 반유대계 신문 기자가 쏜 총에 경상을 입는 일도 있었다. 그때 사라 베른하르트 배우는 ‘당신은 또 고통을 당하셨고 우리는 또 울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의 고통도 울음도 없을 것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멀리 가까이 모두가 당신 편이며 당신을 위해 싸우려는 사람들뿐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후 드레퓌스는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제대한 후 1935년에 생을 마감했다.

아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정말 멋진 글이다. 지난 1998년에 시라크 대통령이 에밀 졸라의 저택 앞에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고 한다.

에밀 졸라를 비롯해 그의 무죄를 주장한 학자, 작가, 예술가, 기자, 교사들에 대해 반드레퓌스파는 ‘앵텔렉튀엘’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지식인이라는 의미가 된 것이다. 아 지식인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이름이다.


8. 필리페 페탱의 재판

: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10가지의 재판 중 유일하게 다른 입장의 재판이 이번 재판이다. 이 재판은 나치 부역자를 단죄하는 재판으로서 이런 단호함 속에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 프랑스의 해방과 더불어 가장 큰 정치적인 사건이 시작되었다. 나치 점령 4년 동안 비시 정권을 이끌었던 베르됭의 영웅, 페탱 원수에 대한 재판이었다.

한때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 했던 프랑스 군대는 1940년 5월 10일 전쟁이 시작된 지 6주 만에 무너져버렸다. 독일군은 영불해협의 북서쪽을 공격함으로써 프랑스군과 영국은 함께 패퇴시켰다. 6월 14일 히틀러 군대는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였다. 휴전파와 항전파가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던 1940년 6월 16일 레이노 수상이 사임하고 페탱 원수가 취임하였다. 페탱은 패배를 인정하고 독일의 휴전협상에 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던 베르됭 전투의 영웅으로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은 페탱 원수가 수상을 맡은 것이다.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비시를 전시 수도로 정한 비시 정권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성립되었다. 휴전파를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한 페탱은 독일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파시스트 정권이었다. 인간의 권리들을 폐기하였고 노동조합 연맹 등 거추장스러운 모든 조직을 해체하였다. 나아가 제3공화국의 요인들을 체포 재판하여 관료 2800여 명을 숙청하였다. 굴욕적인 조건의 휴전협정에 따라 프랑스 북부는 독일의 직접적인 점령을 받게 되었고 군대, 치안, 경제, 언론까지 장악하였다.

비시정부는 프랑스 국민의 방패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총칼이었고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프랑스 애국자들을 처형과 탄압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늘 저항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니 대표적인 사람이 드골이다.

드골은 페탱이 취암하고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서 처칠의 협조하에 ‘BBC 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독일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1940년 항명죄로 비시정부에 궐석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휴전체제에 저항하는 유일한 지도자로 ‘자유 프랑스’의 대표로 1944년 해방의 영웅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연합국에 의한 해방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페탱과 비시정부는 재판관 앞에 섰다. 그들에겐 ‘부역자’라는 이름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독일병과 잠자리를 같이 한 여성들은 머리를 깎이고 갈고리 십자가가 그려진 맨 가슴을 드러낸 채 ‘나는 독일병과 잤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내를 돌며 돌림을 당해야 했다. 사법 철자 없이 처벌당한 사람이 만여 명이 된다. 드골의 ‘자유 프랑스’ 출범 후 재판 결과에 따라서 7천 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1500명이 집행되었다. 그들은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비시정부와 나치 독일의 점령 정책을 뒷받침한 언론은 철저히 청산되었다. 프랑스는 자신의 어두운 역사와 부끄러운 과거를 도려내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적 정통성을 곧추세웠다. 아 우리나라는 여전히 친일의 후손들이 부를 이루고 호의호식하며 부끄럼도 없이 사는데 참 부끄럽다.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심판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교훈이다.

1944년 8월 15일 배심원들은 페탱에게 사형과 모든 재산 몰수를 선고했다. 다만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사형 집행만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였고 그는 1951년 아흔다섯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군부 독재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골프를 치고 여전히 측근들에게 '각하'인 누군가는 법정만 오면 치매 증상이 온다는데 재산 몰수조차 하지 못한 일에 국민들만 가슴을 칠 뿐이다.


9. 로젠버그 부부의 재판

: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한 전쟁

1953년 6월 19일 8시,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싱싱 교도소에서 사형당하였다. 그의 아내 에설 역시 몇 분 후 로젠버그가 앉았던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2년 전인 1951년 뉴욕 연방대 배심에 의해 기소되어 불붙기 시작한 논쟁은 로젠버그 부부가 처형당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열띤 법률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범죄는 원자폭탄에 관련된 국가기밀을 소련에 전달하려 공모한 사실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동맹은 무너져버렸다. 점차 세계 곳곳에서 냉전의 깊은 갈등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보수파들은 이 상황을 악용했다.

1948년 9월 악명 높은 FBI 에드거 후버 국장의 책상에 원자폭탄 기밀이 외국으로 유출되었다는 내용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달 말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서 원폭 실험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발표했다. 그때 사람들은 누군가의 간첩행위 때문에 소련의 핵폭탄 실험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몰아가기 시작했다. 1950년 2월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가 영국에서 구속되었는데 원폭 개발팀에 합류해서 기밀을 소련에 넘겨주었다는 혐의였다. 푹스가 미국 체류 시 한 미국인 첩자를 접촉했고 푹수의 밀사였다고 자백한 해리 골드를 체포하게 된다. 해리 골드의 집 수색에서 뉴멕시코 산타페 거리 지도가 발견되었고 그들은 산타페와 가까운 원폭 제조공장으로 꽂혔다.

단서를 찾겠다고 수백 명과 인터뷰를 했고 그중 한 명이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다. 당시에는 원폭 제조공장에서 일하다 기념품으로 우라늄 견본을 가져오곤 했었다. 그들이 그린글래스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그가 자신의 누나와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회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요되다시피 한 회유 자백으로 매부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사주를 받았다고 말한다.

1950년 6월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연행되었다. 혐의를 부인했지만 처남이 자백을 철회하지 않았다. 동생을 도왔을 거라는 추측으로 아내 에설까지 체포되었다. 마녀사냥 재판이었고 이것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원폭 간첩 재판이었다. 길고 고통스러운 재판 과정에서 숨은 영웅이 나왔으니 그가 엠마누엘 블로흐 변호사 이다.

선임료조차 못 받을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꺼리는 재판을 스스로 나섰다. 변호사 일을 다 버려두고 오로지 로젠버그 부부 구명 일에 매달렸다. 그들의 아이까지 돌보고 아이들을 교도소로 데려가 부모를 만나도록 해주었다.

후에 로젠버그 부부가 사형을 당한 한 달 뒤 쉰 살의 나이에 사망을 하게 되니 그가 얼마나 재판에 전부를 걸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블로흐는 이 사건을 통해 변호사의 고귀한 상징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재판을 불리하게 몰고 가는 사람들이 검사와 FBI에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매형을 고발하고 누이까지도 함께 재판을 받게 한 동생뿐 아니라 친정가족들이 모두 에설 보다 데이비드 편에 서서 재판을 어렵게 몰고 갔다 그들은 이미 FBI의 회유에 넘어가 있었다.

증거가 조작되었을 뿐 아니라 사실이었다 해도 원폭 제조를 묘사하기 위해 전달되었다고 하는 문제의 정보는 러시아인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심지어 부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증언들은 당시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은 미국의 기밀이 전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련 물리화학연구소의 세메노프는 이미 1940년대 원폭 연구를 진행했고 1956년에 연쇄핵반응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로젠버그 부부는 유죄판결 후 악명 높은 싱싱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사형수만이 산다는 ‘죽음의 집’이었다. 에셀은 유일한 여성 사형수였다.

유일한 희망은 여론뿐이었다. 로젠버그 부부 구명 전국위원회는 1951년 8월 15일 신문에 <로젠버그 기소-미국의 드레퓌스 사건인가?>라는 제목의 헤드라인을 달았다.

로젠버그 사건은 미국의 모든 법률적 기준에 따라 무죄를 받을 만한 합리적인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미국헌법 조항을 희생시키고라도 반대자를 침묵시키고자 하는 미국정부에 의해 희생양이 필요한 때 로젠버그 부부는 전면적인 정치적 조작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에 반대하는 대중적 항의가 전 세계를 울리기 시작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받은 사면 요구 서한이 1만 251통에 달했다.

로젠버그 재판이 스파이 재판이라는 것도 특별하지만 이 부부의 러브스토리도 특별하다. 줄리어스와 에셀은 죽음을 기다리면서 더욱 깊어졌다. 줄리어스는 끊임없이 아내 에셀에게 편지를 써 보냈었다. 아내에게 독서와 노래연습과 명상을 하면서 공포를 극복하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형 집행 40분 전에 만남이 허용되었다. 부부는 뿌연 유리창과 그물망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가락을 안타깝게 내밀었으며 결코 닿을 수 없는 이별의 키스를 나누며 죽음의 공포를 함께 극복하였다.

다른 모든 세계가 알고 있듯, 미국은 이제 민간인의 옷을 입은 군사 독재의 바퀴 아래 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돌같이 딱딱한 심장, 굳어버린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살인자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로젠버그 부부의 주검을 대통령 아이젠하워, 브라우넬, 그리고 에드거 후버의 문전에 놓습니다. 그들은 그 부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전기의자의 스위치를 직접 누르지 않았지만 분명히 스위치를 누른 사람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미국의 전통이 아닙니다. 미국의 정의도 아닙니다. 미국의 페어플레이도 아닙니다. 오늘의 교훈을 잊는다면 우리는 비굴해지고 무릎 꿇고 살게 되며 공포에 떨 게 될 것입니다. 광기, 비이성, 야만과 살인이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엠마누엘 브로흐 변호사의 로벤버그 장례식 연설 중에서

그곳에 서른일곱 살의 에설과 서른다섯 살의 줄리어스가 묻혔다.


10. D.H 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 재판 외설인가 명작인가

 

제 잡지가 비도덕적이라고요? 그러면 전쟁은 어떻습니까? 원자폭탄은 어떻습니까? 합법적 살인과 포르노 중에 어느 것이 더 비도덕적입니까?

- 포르노 잡지<허슬러> 발행인 래리 플린트

D.H 로렌스는 책도 피를 흘린다고 말했다.

책이 재판을 받는 시대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 보안’을 이유로 금기된 책들이 있었고 음란물에 대한 재판도 있었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를 외설로 보는가 문학으로 보는가에 대한 다른 평가가 존재했다.

 

영국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 수필가, 문학비평가, 화가였던 D.H 로렌스는(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는 1885년 영국 노팅엄 작은 탄광촌 이스트우드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스무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원래 전통적인 농경 마을이었으나 영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큰 변화를 겪으면서 전원적 풍경을 밀어내고 형성된 광산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의 작품에는 주로 상급 계급 출신의 여자와 하층 계급 출신의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고 성정이 거친 하층계급 출신의 광부였고 어머니는 청교도적인 취향의 이지적인 이미지로 상급 계급 출신의 교사였던 배경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인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인 로렌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그의 가정과 생활 환경의 배경은 그의 작품 속에서 현대 기계문명에 대한 혐오와 정신과 육체, 지성과 원시적 생명력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게 된다. 스물다섯 해에 정신적 연인이던 어머니의 죽음 그 후 2년 뒤 대학 교수 은사의 부인 프리다(6살 연상이자 세 아이의 엄마)와 사랑에 빠져 유럽으로 도피행을 떠나서 후에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이때를 전후하여 그의 작품 <아들과 연인>, <무지개> 등의 작품이 발표되는데 비도덕적이고 외설적인 이유로 출판이 금지된다. 이때부터 그는 ‘외설 작가’딱지가 붙어 작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움을 겪었다.

1928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인쇄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나오자마자 영국과 미국의 세관당국에서 몰수했고 30년 동안이나 판매금지가 지속되었다. 원래 금지된 것의 유혹은 더 큰 법이라 해적판은 당연하게 출판되어 널리 퍼져 공공연히 구해 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라고 지적된 외설적 부분을 삭제한 수정본까지도 검찰이나 치안판사로부터 오랫동안 형편없는 쓰레기 취급을 당했고 작가는 버림받았다.

문제가 된 것은 외설적 부분도 있지만 ‘FU*K, SH*T’과 같은 말이 수십 번 등장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 책의 재판은 1959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뉴욕의 그로브 출판사는 로렌스의 미망인 프리다의 허락을 얻어 원판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 경찰과 우체국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당시 우편을 통해 외설물을 배포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었다. 재판은 1959년 5월 14일 처음 열렸다. 증인으로 말콤 코울리 (전국 문화예술 협회장), 카진(문학사 전공학자), 로셋(출판업자)등이 나와서 발언했다. 1960년 6월 2일 ‘책의 성적 표현이 나머지 부분을 침수시킬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기 때문에 외설적이지 않다'고 판결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미국에서의 수난은 끝이 났다.

미국의 재판은 영국에도 영향을 주었고 영국에서도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변호사와 배심원들은 이 책을 다같이 읽기로 했다. 어디에서 읽을 것인가가 논쟁거리로 등장했다. 판사는 집으로 가져가서 읽으면 주의가 분산된다고 판단하여 매일 법정에서 만나서 함께 책을 읽기를 권했다. 그렇게해서 1960년 11월 2일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무죄를 받았다.

이후 합법적으로 책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문학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당시에 이 책이 수십 년을 피를 흘렸지만 누구도 그의 문학이 가지고 위대함까지도 부정할 순 없었다.

이 책은 훌륭한 묘사와 특출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충만해 있다. 그것의 문학적 특색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완벽하고 솔직하고 리얼리즘에 기초하여 굉장히 자세하게 성행위를 표사하는 문장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네 자리(욕설)의 앵글로 색슨 단어들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문장과 언어는 의문의 여지없이 예민한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들은 구성과 인물의 전개에 관련이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선고된 판결문 일부

역사는 흘러간다. 세상은 변하는데 판결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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