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언어
양정철
지금 여러분의 생각과 실천이 바로 내일의 역사입니다
노무현
'카피책'의 저자인 정철 카피라이터가 본 '양정철'
노무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을 모셨던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의 책이다.
특별히 ‘언어’를 통해 더 깊이 만났던 대통령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내 인생과 생각과 글의 전환을 가져왔다. 더욱 너그러워지고 더욱 부드러워지고 더욱 유연해지려고 애썼다. 무엇보다 두루 포용하고 함께 가려고 노력했다. 두 분 대통령 모시고 또 이별하며 쉰 살 넘어서야 성숙의 의미를 깨닫는다. 이제 더 좋은 다음 세상을 꿈꾼다. 지난 세월 투쟁의 언어, 자본의 언어, 권력의 언어를 경험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공감의 언어였다.
책 속에서
최근에 한 아파트 경비원이 주차 문제로 주민에게 폭행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의 가족들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가슴이 아픈 뉴스였다.
사회의 곳곳에 ‘갑질’ 행태는 사실 새롭지 않다. 그러나 이 끊임없는 갑질 행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은 늘 새롭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직업과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나라는 성숙하지 못하다. 직업으로 한 사람의 가치나 인격까지 재단하는 사회는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회다.
어린 시절 보건소 청소 일을 하신 어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서 학교가 끝나고 찾아가곤 했는데 사람들이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이고 보건소를 찾는 사람들이 청소 아주머니라고 막 대하는 것이 참 슬펐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가급적이면 정중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친께서는 선친을 대신해 어렵게 행상을 하고 궂은일을 하시며 자식들을 키우셨다.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선거 시절 생선 파는 할머니의 손을 붙잡으며 '이 손이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말에는 편견과 차별의 언어가 많이 통용되고 있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드는 전어라는 말도 우스개로 그만큼 맛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류, 처녀작, 집사람, 안사람, 김 여사, 된장녀 따지고 보면 사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 비하적 표현이다.
또 서울에 속해 있는 대학이나 명칭 외에는 꼭 굳이 ‘지방’자를 붙이는 것도 차별적 용어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는 그런 차별을 느끼지 못하다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차별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그가 모신 두 대통령은 지방 차별의 실상을 몸소 겪은 분들이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재산, 직업, 배경, 용모 등을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해외에서 동양인을 비하하고 한국인 모독 얘기를 들으면 집단으로 공분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하는 인종 차별이나 비하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중잣대를 가지고 산다.
‘혼혈’, 조선족, 다문화 이런 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반대의 말을 사용하지 않기에 써야 할 필요가 없는 만들이다.
사회는 글로벌이라고 강조하지만 인식과 편견은 결코 글로벌하지 못하다.
모든 인간은 존귀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우리 사회가 태생적 차이를 갖고 사람을 나누고 달리 대하고 차별적 언어를 쓰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일이다. 더 나아가 사람 된 도리가 아니다. 글로벌 사회에도 맞지 않다.
책 43
#고성의 나라
한국은 고성사회. 모두의 목소리가 크다.
언어의 높낮이를 따진다면 한국은 높은 음자리, 하이 데시벨(High dB) 사회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다.
외국에 살다 보면 같은 공간에 여러 나라가 모이는데 정말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외국인들은 우리가 다 싸우는 줄 안다. 우리 가족도 야외에 나가면 신경 써서 타인을 배려하려고 실패하기 쉽다. 타고난 높은 음자리를 일부러 더 낮추려고 신경 써서 노력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
# 마음을 움직이는 말
먹고살기 각박한 시기, 무한 경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 언어는 거칠고 무례해졌다. 무심코 쓰는 많은 언어 가운데 다른 사람이나 상대방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표현이 많아졌다.
언어는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고 한다. 재주 넘치는 글은 화려해 보이지만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배려의 언어는 진솔한 배려의 마음에서 나온다.
광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두 거장의 실화가 있다. 이 실화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뽑은 한 줄 힘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어느 레스토랑 앞에 한 노숙자가 서 있었다. 노숙자의 피켓에는 “집이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마케팅 전문가 패트릭 랑보아제(Patrick Renvoise)는 적선을 부탁하는 노숙자에게 약간의 돈을 주며 피켓 문구를 바꿔줬다. 그가 레스토랑에 나오자 노숙자는 두 시간 동안 60달러를 벌었다며 고마워했다.
바뀐 새 문구는 “배고파보신 적이 있나요?”였다.
데이비드 오길(David Ogilvy)도 구걸하는 장님을 보게 된다.
“저는 장님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는 장님의 푯말 메시지를 수정해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 빈 깡통에 동전을 넣기 시작했다.
“참 화창한 날입니다. 하지만 전 볼 수조차 없어요”
책 속에서
이 두 실화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 표현을 생각하게 한다.
# 빨갱이
지금도 우리 사회 안에서 자주 사용되는 ‘빨갱이’ 그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면 좋겠다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빨강 혹은 적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이념적으로 시뻘건 놈이라 해서 빨갱이가 된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는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나왔다. 당시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빨치산 어원은 ‘파르티잔(partisan)이다. 정당(party) 당원을 뜻한다. 초기 정당 운동은 대부분 왕정 철폐 운동, 반외세 독립투쟁을 병행하는 혁명운동 성격을 띠었다. 그들을 ‘파르티잔’이라고 강한 발음으로 ‘빨치산’이라 부른 것이 한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상징색인 붉은색과 같은 색으로 사용하게 된 것뿐이다. 어원을 놓고 보면 우리 나가 각 정당에 당원 모두가 빨치산인 셈이다.
#누군가를 용공으로 낙인찍을 때 쓰는 ‘좌파’
오늘날의 좌-우파란 프랑스혁명(1789) 당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한 국민공회에서 보수파인 지롱드파 당원들이 오른쪽에, 급진파인 자코뱅파 당원들이 왼쪽에 앉았던 데서 유래했다. 그 두 파는 모두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좌파=북한’ 말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온라인 댓글로 표출하는 우리 언어는 살벌하다. 공격의 언어, 적대적 논리, 배타, 배제, 편 가르는 분열적 언어, 비방, 혐오의 언어로 서로 상처를 준다.
나는 이제 대한민국이 대결과 증오의 문화를 버리고 공존과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야가 대립하고 견제하고 경쟁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야 경쟁을 색깔론으로 바꿔, 함께 상종 못할 것처럼 상대를 배척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118
#언론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
저자는 우리들의 언론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들 속에 담긴 아픈 역사의 언어를 이야기한다. 한국 전쟁과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전쟁이나 군사 용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 언어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왕조시대의 언어도 삼가고 곳곳에 남아 있는 낡은 유산을 청산하자.
#언어의 독립 8.15
※일본어 표현 대신 우리말로 사용하자.
난이도 (일본어 나니도에서 온 말)→우리말 어렵다 쉽다
현해탄(일본어 켄카이나다를 한자 그대로 읽은 것)→우리말 대한해협을 넘어
기라성(일본어 기라보시)→ 우리말 빛나는 별
자주 부르는 노래 십팔번(가부키 18번)→애창곡
일가견(잇카겐에서 온 말) →탁월, 최고 전문가
간발(간파쯔)→ 터럭
수순 → 순서나 차례로
흑성→ 행성이나 유성 또는 떠돌이별로
곤색→ 군청색이나 짙은 남색으로
요지→ 이쑤시개로
소주 한잔합니다.
탈상이어서 한 잔
벌써 3년이어서 한 잔
지금도 ‘친노’라는 말이 풍기는 적의 때문에 한 잔
노무현재단 이사장 관두고 낯선 세상 들어가는 두려움에 한 잔
저에게 거는 기대의 무거움에 한 잔
그런 일들을 먼저 겪으며 외로웠을 그를 생각하며 한 잔
2012년 5월 23일 문재인 대통령 트위터에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인사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년 5월 23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노 대통령의 유서는 ‘없다’가 네 번, ‘마라’가 세 번, ‘해라’가 두 번 나오는, 너무도 잘 짜인 시적 구조다. 어느 시인은 노 대통령의 이 마지막 글을 “무섭도록 탁월한 절명시”라고 표현한 바 있다. 문장으로서도 뛰어나 서산대사의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이라는 <게송>과 오버랩된다. 그러나 내가 대통령으로 모셨던 분, 그리고 가시는 것을 지켜드리지 못한 못난 참모 주제에 문장 분석이나 할 처지일까. 다만 분명한 것은 스스로 한 시대 종언을 죽음으로 고하며 새 시대를 촉구한 뜻을, 이처럼 정중하고 낮은 언어로 남긴 그분의 마지막은 아프고 또 아프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많이 본다. 노무현 대통령은 죽음조차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그는 인간의 법정 대신 역사의 법정을 선택했고 개인의 진보 대신 역사의 진보를 택하는 가장 고독한 결정을 내렸다.
그분은 떠나며 남긴 마지막 언어마저 낮게 썼다. 나는 그분의 유서에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인사’라는 작은 헌사를 올린다. 이것이 노무현을 향한 나의 마지막 오마주다.
p226
11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마음을 울리는 유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닮고 싶다는 것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낮은 언어라는 돋보기로 나의 언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언어는 어떠한가?'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
나의 말과 생각은 차별이 없고 진솔하고 겸손한가?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 앞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상대방의 언어에 맞춰왔다. 그것도 썩 괜찮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항상 언어가 동일해야 한다. 어떤 사람 앞에서도.
나의 언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공존, 평화, 평등, 배려, 존중)의 가치를 닮아가기를 바란다.
'북 카페 > 한 권의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0) | 2020.08.13 |
---|---|
카피책:당신이 쓰는 모든 글이 카피다 (0) | 2020.08.12 |
절망독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 나와 함께 울어준 책 (0) | 2020.08.11 |
복수의 심리학:우리는 왜 복수에 열광하는가 (0) | 2020.08.11 |
타고난 거짓말쟁이들: 누가 왜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가 (0) | 2020.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