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정으로 당신을 인도할 책”
빌 게이츠 2019.2020년 여름 추천 도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추천도서
에이모 토울스(Amor Towles): 미국 보스턴 출신 작가로 2011년에 첫 장편소설 <우아한 연인 Rules of Civility>으로 프랑스 피츠제럴드상을 수상했고, 이후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 모두 20세기 전반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모스크바의 신사>는 20세기 초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2009년 출장차 방문했던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 차르 시대의 러시아에서 실제 있었던 가택 연금의 역사와 연결해 소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토울스가 그려낸 1920년대 메트로폴 호텔처럼 실제로 그 시대의 메트로폴 호텔은 유럽 여러 나라와 교류하는 외교의 장소이자 체제의 건재함을 대외에 선전하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곳이었다. 최고급 요리와 고급 술, 최고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이면서 비밀경찰의 감시가 이루어지기도 했던 특별한 장소였다. 에이모 토울스는 실존의 역사를 바탕으로 더 사실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추방은 인류의 탄생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국외가 아니라 자국 땅으로 추방하는 개념을 터득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 266쪽
이 책은 나의 블로그 이웃이신 간서치님에게 소개받을 때부터 제목이 인상적이라 잊히지 않았고 이웃님의 극찬+ 오바마 대통령의 극찬+ 빌 게이츠 추천까지 더해져서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만나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번 전자책을 보기 시작하니 작년 한 해는 계속 전자책에서 골라 보느라 읽고 싶은 책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작년의 150권의 리뷰를 마친 보상으로 새해 첫날 나에게 선물한 책이다.
러시아 역사는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러시아 작가이고 책 속에서도 러시아의 낯익은 인명들이 등장해서 반가움을 더했다. 무엇보다 700페이지가 되는 꽤 두꺼운 이 책을 아주 천천히 한 장씩 읽고 싶을 정도로 나를 붙잡는 명장면, 명대사가 많았다.
리뷰 쓸 때 다시 살펴보고 싶은 부분들은 작은 포스트잇 대신에 페이지 쪽수만 적어 두었는데도 한 페이지가 돼서 다 적는 것도 무리일듯하고 조금만 소개하는 게 좋겠다.
시대순으로 진행되는 목차~
보통 신사하면 신사의 나라 영국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신사의 품격은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돈으로 품격까지 얻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졸부’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닐까. 여기 영국이 아닌 모스크바의 신사 로스토프 백작이 등장한다. 구시대의 귀족인 백작은 스스로도 예의범절의 표본이라 자부하는 신사다. 그 신사를 만나면 금세 그가 왜 스스로뿐 아니라 모두에게 ‘신사’라는 말과 인정을 받는지 알 수 있다.
이 멋진 신사의 이야기는 혹독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을 조명하고 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소설이지만 이 두꺼운 책은 읽는 내내 끊임없이 신사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백작의 다락방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을 보라.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디킨스의 책들이 바로 백작의 이야기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속에서 혁명의 세력들이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이 혁명의 이상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와인의 레벨을 다 떼어버리지만 백작은 라벨 없는 와인의 모양이나 맛으로도 그 이름을 찾아낼 수 있다. 백작은 호텔 만찬의 자리 배치의 중요성을 어필하는데도 트로이전쟁을 들어 그 중요성을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만능 이야기꾼이다. 백 번의 설명 보다 직접 신사의 매력을 만나보기를 추천한다.
1922년 6월 21일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내부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바신스키: 이름을 말하시오
로스토프: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입니다.
바신스키: 현재 사는 곳의 주소는?
로스토프: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스위트룸 317호입니다.
거기서 산 지 얼마나 되었소?
로스토프: 1918년 9월 5일 이후로 거기서 지내고 있습니다. 4년이 조금 못 되었군요.
바신스키: 직업은?
로스토프: 직업을 갖는 것은 신사의 일이 아닙니다.
바신스키:좋아요.그럼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죠?
로스토프: 식사와 토론, 독서와 사색 같은 일상적이고 잡다한 일들입니다.
33살인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이 거친 군인들의 감시 아래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책이 시작된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 백작은 메트로폴 호텔을 나오면 즉시 총살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고 호텔에 종신 연금된다.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의 시대에서 제거되어야 마땅한 신분이었지만 혁명에 동조하는 시를 쓴 과거의 공을 인정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4년을 편히 지냈던 집 같은 호텔이라 해도 자신이 누리던 것을 누릴 수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하지만 백작의 긍정적인 성격은 그곳을 새로운 모험의 장소로 만들고 호텔 안에서도 평생을 함께 하는 인연들을 만들어 나간다. 창살이 없는 감옥이었지만 그러나 창살이 있는 감옥이었다고 한들 백작의 신사의 품격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호텔안에서의 일상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며 심지어는 스위트룸이 아닌 낡은 방에서도, 웨이터에게 ‘각하’라는 깍듯한 호칭을 받던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시중을 드는 웨이터 일을 할지라도 그 품격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책 52쪽
오랫동안 백작은 신사란 불신감을 가지고 거울을 보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거울은 자기 발견의 도구이기보다는 자기기만의 도구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
신사의 존재는 외투의 맵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도와 발언과 몸가짐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책 65쪽
호텔에서 꼬마 친구 니나 쿨리코바를 만난 것도 백작의 호텔에서의 생활을 단조롭지 않게 만드는 사건이었고 후에 니나의 딸 소피야가 백작의 삶에서 큰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을 보면 니나와는 운명적 만남이었다. 니나 역시 백작처럼 호텔 감금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나 다름없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었지만 니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호텔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게 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었다. 니나는 백작에게 신사(공주)의 품격 교육을 받았고 니나는 4년 이상을 보낸 백작보다 호텔에 대한 전문가였기 때문에 백작에게 호텔의 항해를 인도했다. 특히 니나는 호텔의 전망 좋은 곳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니나를 통해 자신이 생활하던 스위트룸 317호에서 묵고 있는 어느 자유인 신사의 일상의 단면을 마주할 때 자신이 지금 빼앗긴 것은 단순히 그 방이 아니라 오후에 마시던 커피 한 잔의 의미 이상의 자유함이었음을 깊이 깨닫는다.
지배인이 백작을 불러 직원들에게 호칭을 바꿔 부르게 하겠다는 장면이 나온다. 시대가 해야 할 일은 변화하는 것이란다. 한때는 그것이 문명이 발달한 나라의 표시였는데 단순히 각하, 예하, 성하, 전하와 같은 용어만 사라지는 것일까. 혁명군에 의해 모두 다른 와인들을 그저 색깔로 나뉘어 화이트와 레드 두 종류로 만들어버린 만행을 보면서 백작은 와인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겉모습을 그렇게 한다고해도 와인 고유의 독특한 역사적 산물을 없앨 수 있을것인가.
백작은 호텔 감금 중에도 호텔 투숙객이었던 아름다운 유명 배우 안나 우르바노바와 두 마리의 개 소동을 계기로 인연이 되어 비밀 연애를 하기도 한다. 신사는 개를 다루는 솜씨까지 갖추었다는.
1938년 백작이 48살 되던 해, 8년 만에 니나가 호텔로 찾아온다. 스탈린이 “동무들 생활이 개선되었습니다. 생활이 더 즐거워졌습니다”라고 연설했던 당시 1930년대 초의 러시아는 시골의 기아사태가 심해져 도시로 이주한 소작농들로 인해서 주거지는 초만원 사태를 이루었고, 생필품 부족과 무법 사태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도심의 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노동에 지쳐가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강화된 제약 조건을 맞이했으며 교회는 폐쇄, 용도전환 혹은 파괴되었다. 그들은 혁명이 완전한 성공이라는 것을 치장하고 과장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시기에 니나가 찾아온 것이다. 남편은 구금되어 5년의 교정 노동형을 선고받았고 지금으로서는 딸을 양육할 상황이 되지 않으니 자리를 잡을 때 까지만 소피야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떠났고 그것이 그녀를 본 마지막이었다. 백작은 갑자기 배달된 소포에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니나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니나는 자신이 호텔에 감금생활을 할 때 그의 친구가 되어준 아이였다. 그에게 호텔의 숨어 있는 여러 장소를 알려주고 가장 중요한 호텔 마스터키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아이다. 그런 니나의 어려움을 어떻게 나 몰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로스토프는 소피야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와의 놀이를 시작한다. 그 옛날 신사 체면에 바지가 찢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니나를 따라다니며 구경하던 것을 추억하며 이제는 자신이 니나의 딸을 심심하지 않게 놀아줘야 할 입장이 되었음을 받아들인다. 소피야는 백작의 딸이 되어 호텔에서 살아가는동안 백작의 친구들인 주방장과 지배인, 재봉사 마리아의 보살핌 속에서 어엿한 숙녀로 잘 성장한다.
알렉사드르 로스토프가 누구던가? 그야말로 노련한 이야기꾼 아니던가?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기까지 결혼식이나 영명 축일이면 그는 부득이 만찬 손님들 가운데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손님 옆에 앉아야 했다. 그 이유는?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만찬 동료의 성향이 어떠하든 간에 그들을 활발한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책 176쪽
대학 동기 미시카는 종종 호텔의 친구를 만나러 온다. 둘의 운명이 참 짓궂은 것이. 사실 백작을 살려준 혁명의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를 지은 사람은 미시카였다. 1905년 봉기와 탄압이 있던 시기에 정치적 갈등이 담긴 시를 쓰는 것은 위험한 행위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시카 보다는 백작이 시를 지은 것으로 나와야 안전할 것이라 여겨 둘의 합의 하에 백작의 이름으로 출판한 것이다. 아무리 비밀경찰이라도 경마클럽 회원이자 차르의 자문역인 백작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가 백작을 살렸고 친구는 평생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이 방황하게 된다.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메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백작이 호텔 바에서 만났던 한 독일인이 러시아가 서양에 기여한 것을 세 가지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했을 때 백작은 자신있는 목소리로 톨스토이, 체호프, 차이콥스키를 언급하며 캐비아를 주문하는 것으로 명쾌한 답을 내어놓는다. 독일인은 러시아인의 이 자신감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기억했던 친구 미시카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는 말을 하고자 친구를 찾아왔다. 불타는 모스크바!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겨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폴레옹 군대는 뒤늦게 퇴각 명령을 내린 탓에 완전히 궤멸되었다. 모스크바를 쉽게 점령했다고 생각하고 정복자 행세를 했던 나폴레옹은 자신이 점령한 모스크바가 훨훨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러시아의 애국자들 소행이라 여기고 방화범 400명을 체포하여 처형했지만 방화는 막지 못했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4분의 3을 태우고야 말았다.
미시카는 이 사건을 이야기하며 러시아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파괴하는 데 기가막힌 재주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자조적인 말을 하고 떠난다.
공산당 고위 간부 오시프 이바노비치 글레브니코프는 백작을 찾아와서 비밀 개인교사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 뒤 백작은 그와 시간을 보내며 프랑스, 영어, 외교적 기술을 가르치게 된다. 오시프는 진심으로 백작의 특이한 이력과 삶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러시아를 떠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백작은 러시아에 남아서 어찌 보면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뼛속까지 러시아인이면서 부족함 없이 다 갖춘 신사 백작의 인품이 교육될 수 있을런지.어쨌든 오시프는 소피야의 뇌진탕으로 규율을 깨고 호텔 밖을 나갈 수밖에 없는 백작을 도와 호의를 베푸는 인물이다. 소피야가 뇌진탕으로 수술을 받던 날,오시프의 도움으로 소피야가 없는 호텔로 돌아온 백작은 그날 밤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러시아를 통틀어 가장 운 좋은 사내가 흘리는 눈물이었다.
소피야는 그때 병원에서 백작이 준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음반을 들으며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피아노의 남다른 재능으로 오케스트라 연주 투어 초대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실력자가 되지만 소피야는 백작을 떠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때 백작은 소피야의 엄마인 니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난 너를 이 건물의 사방 벽 내부로 한정된 삶으로 너를 끌어들였어. 우린 이 호텔이 진짜 세상처럼 넓고 멋진 곳으로 보이도록 만들려고 애를 썼어. 네가 이 안에서 우리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네 엄마 말이 정확하게 맞았어. 사람은 금박으로 장식된 홀에서 <세에라자드>를 들음으로써 혹은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오디세이>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실험하는 게 아냐. 사람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딤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야.
책 609쪽
소피야는 백작에게 혁명 이후 러시아로 돌아온 일을 후회해본 적이 없냐고 묻는다.
돌이켜보면 역사의 모든 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그 말이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람은 예술이나 상업, 또는 사고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갈림길마다 매번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들이야. 마치 ‘삶’이란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때때로 그들을 불러낸 것처럼 말이지. 소피야,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이제까지 인생이 나로 하여금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있게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어. 바로 네 엄마가 너를 이 호텔 로비로 데려온 날이란다. 그 시간에 내가 이 호텔에 있었던 것 대신에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는 차르 자리를 내게 준다 해도 난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책 656~657
소피야가 프랑스 오케스트라 연주 투어를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백작은 그녀의 연주를 직접 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졌다. 투어까지 백작에게 남은 시간은 6개월이었다. 하루에 두 번 울리는 종시계로 356번의 종소리가 남아있었다. 이제 일생일대의 마지막 모험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여행 안내서, 젊음의 샘, 호텔 투숙객의 방에서 훔친 남자의 바지와 셔츠, 바늘과 실, 그리고 미국인 친구 그리고 여권
파리의 샬 플레옐 무대에서 연주를 끝낸 소피아는 무대 밖으로 나와 연주자용 화장실로 향했다. 우아한 드레스를 벗고 아버지가 준 이탈리아 신사의 바지와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준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젊음의 샘으로 염색을 하고 이탈리아 모자를 썼다. 소피야는 그렇게 유유히 콘서트홀을 빠져나갔고 그 시각 백작은 미국인 기자의 모자에 레인코트를 입고 배낭을 어깨에 걸친 다음 메트로폴 호텔을 걸어 나왔다.
와우~
소름이 돋도록 짜릿한 감정을 느끼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알렉산드로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 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만큼은 현명했다. 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천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 우리의 의견은 진화한다.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책 630쪽
백작은 32년의 감금생활 동안 이 명료한 순간이 오기를 준비했다. 인생이 불확실성으로 나아가는 행로에도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을 붙잡는 고향의 봄바람, 냄새, 커피 한 잔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1922년을 시작으로 1954년까지 그가 만났던 사람들은 호텔에서 투숙하고 떠나는 짧은 만남이 아니었다. 그 어떤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의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로 꼭 필요한 과정으로 만들어 갔다. 코로나라는 위기 속에서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읽는 <모스크바의 신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일종의 안내서 같다. 32년이란 시간도, 60이 넘은 노령이라는 나이도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신사의 품격에 한껏 도취되어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 속에서 단 하나의 글귀를 뽑으라면 나는 이것이라 하겠다
우리 인간은 결국에는 철학을 선택해야 한다
책 236쪽
미처 다 하지 못한 책 속의 글귀들
-“친구, 우린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바야흐로 강철시대가 시작된 거야. 우린 이제 발전소를 세우고, 마천루를 짓고, 비행기를 만들 능력을 가지게 되었어.”
미시카는 백작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슈홉스카야 방송탑 본 적 있어?”
백작은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아름다운 건축물이야, 사샤. 160미터 높이의 원뿔형 강철 구조물이지. 우린 그걸 통해서 최신 뉴스와 지식을 - 그뿐 아니라 차이콥스키의 다정다감한 선율도 - 160킬로미터 이내 거리에 있는 모든 시민들의 가정에 방송할 수 있어. 그리고 러시아의 도덕도 이 같은 개별적인 것들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고 있지. 우리는 우리 시대에 무지의 종말, 압제의 종말, 인류애의 출현을 목격하게 될 거야.”
미시카는 멈춰 서서 허공에 손을 저었다.
‘그렇다면 시는 어찌 되는가?’ ‘글은 어찌 되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묻겠지. 흠, 그것 역시 보조를 맞추고 있다고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예전에는 글이 청동과 철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강철로 만들어지고 있지. 시는 이제 4행시니 강약약격이니 정교한 수사법이니 하는 것을 따지는 예술이 아니야. 우리의 시는 행동의 예술이 되었어. 우리의 시는 대륙을 가로질러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고 별들에게 음악을 전달할 거야!
책 140쪽
-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첫인상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음이 우리에게 베토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한 견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히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책 195쪽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유서깊은 도시, 모스크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호텔지붕탑에서 자신을 감싸주었던 어린시절의 여름 미풍이 자신을 다시 감싸주는 것을 느낀다.
그때 호텔 잡역부가 주는 한 잔의 커피는 따뜻하고 맛있었다. 그 곳에서 꿀을 만들고 있는 벌을 보며 백작은 어렸을 때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의 시간들을 회상한다.
“사과 꽃이 눈처럼 떨어지는 곳이죠. “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하여 여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불이 사위기 시작하고 벌들이 머리 위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각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을 달리는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고 잠자리가 풀밭 위를 날아다니고 시야가 온통 사과꽃으로 가득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책 207쪽
-벽돌로 된 아치형 입구와 서늘하고 어두운 실내 때문인지 메트로폴 호텔의 와인 저장고는 지하 묘지의 음울한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했다. 다만 성인들의 형상을 새긴 석관 대신에 와인 병들이 층층이 쌓인 여러 개의 선반들이 저장고의 저쪽 끝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는 엄청난 양의 카베르네와 샤르도네, 리슬링과 시라, 포트 와인과 마데이라 와인 등이 수집되어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것들은 유럽 대륙을 건너온 세기의 와인들이었다.
전부 합하면 거의 만 병 정도 될 듯싶었다. 그런데 그 모든 와인 병에 라벨이 붙어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백작이 놀란 목소리로 내뱉었다.
안드레이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식품부 인민위원 테오도로프 동무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치아(지식층)의 나약함과 투기꾼의 약탈적 가격 책정을 보여주는 표지 같은 것이라는 거죠.”
“말도 안 돼요.”
평소에는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안드레이가 한 시간 사이에 두 번째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를 열고, 투표를 실시하고,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보야르스키는 모든 와인을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으로 구분하여 단일한 가격으로 판매할 겁니다.”
책 230~231쪽
안에 든 와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웃한 다른 와인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같기는커녕 백작의 손에 들린 병 속의 내용물은 한 국가나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선물이다. 와인의 색깔, 향, 맛은 분명 그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그랬다. 한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 개성 그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와인은 익명의 바다로 평균과 무지의 영역으로 던져졌다.
책 233쪽
-우리 인간은 결국에는 철학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이다. 지금 자신이 전에 사용했던 스위트룸 317호의 창가에 서 있는 백작의 견해는 그러했다. 그는 조금 전에 니나의 열쇠로 문을 따고 살그머니 이 방으로 들어왔다. 책에 의해 형성된 신중한 고찰을 통해서든, 새벽 2시에 커피를 마시며 벌이는 열띤 토론을 통해서든 또는 타고난 성향에 의해서든 우리는 모두 결국엔 근본적인 틀을 채택해야 한다.
책 236쪽
-예술이란 가장 부자연스러운 국가의 앞잡이다. 그것은 무엇을 하라는 지시에 지치는 것보다 반복되는 일에 훨씬 더 빨리 지치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될 뿐만 아니라 짜증날 정도로 모호하기 때문이다. 책 308쪽
-삶이 미시카를 찾아간 게 그런 경우잖아. 삶은 책 뒤에 숨어 있는 그를 찾아내서, 도서관 밖으로 데리고 나가, 네바강이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곳에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삶은 리옹에서 안드레이를 찾아내, 그에게 손직하여 서커스단으로 불러냈잖아. 삶이 니나에게도 찾아갈 거라는 거야. 니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만큼이나 진지하긴 하지만, 아주 초롱초롱하고 생기 넘치는 아이라서 삶이 그애로 하여금 악수를 하고 혼자 떠나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삶은 택시를 타고 니나를 뒤따라갈 거라고. 그러다 우연히 그 애와 마주치겠지. 삶은 결국 그애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할 거야. 그러기 위해서 삶은 구걸하고 맞바꾸고 공모에 가담하겠지. 필요하다면 교묘한 속임수에 의존하기도 할 거야.”
책 358-359쪽
“편리함이라는 게 뭔지 얘기해줄게요.” 잠시 후 그가 입을 뗐다. “정오까지 잠을 잔 다음에 누군가를 시켜 쟁반에 받친 아침 식사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 약속 시간 직전에 약속을 취소해버리는 것. 한 파티장의 문 앞에 마차를 대기시킴으로써 얘기만 하면 즉시 다른 파티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젊었을 때 결혼을 피하고 아이 갖기를 미루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최고의 편리함이에요, 안나. 한때 난 그 모든 걸 누렸었죠. 그런데 결국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편함이었어요.”
책 555쪽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책 687쪽
책 <모스크바의 신사> 중에서 발췌
'북 카페 > 한 권의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0) | 2021.10.01 |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0) | 2021.09.30 |
<독서리뷰> 진보와 빈곤 (0) | 2021.09.28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 | 2021.09.27 |
책 리뷰 <개인주의자 선언> (1) | 2021.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