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여자
임경선
지난 4월에 이주윤 작가의 책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를 읽으면서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이주윤 작가의 매력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이주윤은 독자들은 왜 김애란, 임경선, 이슬아만 좋아하냐는 말을 했다.
책 좋아한다는 이웃님들의 책 리뷰에서 몇 번 글 잘 쓴다는 임경선 작가의 소개를 들었던 터였기에 그녀의 책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러다가 지난달 팬데믹으로 굳게 닫혔던 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거기서 떡하니 임경선의 <나의 남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책 속 주인공 지운이 작가였기 때문에 임작가의 사생활이나 연애담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그녀와의 첫 만남을 가졌다.
이번에 도서관에서 또 다른 그녀의 책을 만날 수 있었다.
<나라는 여자>는 임경선이라는 여자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된다. 1972년생인 그녀는 해외여행도 자율화가 되기 전인 어린 시절부터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랐다. 자가용이 일상화되기 이전에 두 손으로 셈을 하기에도 양 손가락이 다 부족할 정도로 비행기를 탔던 것은 분명 아빠 찬스덕분이다. 영어와 일본어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를 몸으로 익힌 그녀는 우리들이 부러워하는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일수도 있다. 그러나 매번 아빠를 따라 도착한 낯선 나라에서 적응을 해야 했던 어린 소녀의 삶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친구 한 친구 도서관에서 빌려 가 자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 교제를 시작했다. 그것은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하는 고역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해주었다. 때로는 책 한 권만 꽂혀있는 작가의 책이 어쩐지 더 친근함이 들어서 집에 품고 오기도 했다. 나는 나에게 맞는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나에게 맞는 책을 찾는 데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의 추천보다는 나에게 와닿는, 나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책들을 어느덧 첫 느낌만으로 잘 찾아내게 되었다. 읽다가 재미없다 싶으면 가차없이 새 책을 집어들어도 되었다. 의리니 뭐니 불편하는 일이 없으니 사람보다 얼마나 공정하고 정직한가. 완독을 해야 인내심 있는 인간이 되는양, 억지로 쓴 약 먹듯 읽을 필요가 없었다. 책은 내게 무리하도록 요구하질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146쪽
외국을 많이 돌아다니다 온 전학생은 구경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지만 한 학교에 오래 정착할 수도 없던만큼 은근한 괴롭힘과 따돌림은 물론이고 마음에 맞는 벗을 사귈 수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학교에서 주로 도망 다닌 곳이 도서관이었다. 그녀에게 책은 지식을 넓히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고 현실의 고통에서 탈피하게 해 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한참 꽃다운 나이인 스물두 살에 공황장애를 앓으며 요양 생활을 했다. 그 해에 조선호텔 홍보실에 취직해서 월세 15만 원에 2평 남짓한 공간에 하숙하며 지냈고 2005년부터 글 쓰는 일을 선택했다.
첫 소설집이 출간 후 열흘이 지나서 온라인 서점 종합 순위 상위권에 진입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흥분을 했을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인증샷을 찍고 싶은 마음에 교보문고에 가서 사진을 찍으려다 직원들에게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제지당한 일도 있다. 그렇게 그녀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전공은 정치외교학이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하면 부르주아로 낙인찍히는 시선에 콤플렉스가 있던 그녀는 굳이 비주류 학회 활동을 하면서 결핍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인정사정없이 푹 빠졌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자나 깨나 그 사람 생각으로 온몸이 ‘절임’상태가 되고 오른쪽 눈썹 위 이마쯤에 그 사람의 얼굴이 온종일 대롱대롱 매달려 다녔다. 그렇게 노상 붙이고 다니면서도 그 사람을 끊임없이 그리워하느라 속살이 매 순간 아리거나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지경이었다. 바보가 아니니깐 머리로는 먼저 연락하거나 사랑한다 말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든다고 감정이 잘 통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나이가 돼서도 매번 조바심 내고 애간장을 태웠다.
91쪽
스스로를 늘 연애하면서 살았던 여자라고 말한다.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없어서 그대로를 다 보여주었던 그녀는 이런 경험들을 녹여 연애와 사랑에 대해 솔직한 글들을 써 왔다.
쉬운 여자, 뻔한 여자, 그렇고 그런 여자 소리를 듣는 것은 겁나지 않았다. 거절 받고 차이고 헤어지는 이별의 슬픔을 당해도 날것 그대로의 마음 그대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고 연애했다. 그녀의 연애에 대한 태도도 삶에 대한 태도처럼 솔직하고 진지했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자주 차이는 여자들이야말로 실제로 연애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나 좋다는 남자와 사귀어 주기만 하는 여자는 절대로 차일 기회가 없다.
신생아 딸을 안고 있을 때 기분이 너무 달달하고 행복해서 긴장이 풀리니 글발이 후져짐을 느끼고 ‘나는 행복하면 글발 후져지는 여자다’라는 글을 썼다. 행복하면 글발이 후져진다는 말이 와닿는다. 행복할 때 보다 불행할 때가, 모든 것을 가졌을 때보다는 결핍이 많은 상태에서 더 글을 쓰게 되고 그렇게 쓰는 글이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 많은 밤에 '이밤의 끝을 잡고' 세상을 당장 하직하기라도 할듯한 끄적거리는 글을 써왔다.
임경선은 언제 행복한가?
그녀는 감정적이고 감성적이고 감상적일 때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과 불행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 오락가락하는 그 상태에서 가지게 되는 나름의 안정감을 좋아한다. 온몸의 세포를 예민하게 곤두세울 때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행복과 불행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체험했을까?
스무 살부터 이 책을 쓰기까지 네 번의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목에 둔탁한 칼자국만 남긴 것이 아니라 임신 불가령과 비만 그리고 공황장애를 남겼다. 급작스러운 발작 경험으로 집 밖을 나가지도 못하고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던 시절도 겪었다.
그런 그녀가 청춘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면 되는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마음이 끌리는 감각을 믿고 하나하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깨달아가거나,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해나가면서 관심 영역에 대해 집중과 확장을 반복해보세요”
자신감, 자존감이라는 것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녀는 일상을 성실함으로 사랑하며 살아왔다.
누구나 성장과정에서 결핍과 상처를 겪기 마련이지만 사실 그 이야기를 쉽게 꺼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임경선은 그 어려운 일을 너무나 쉽게 해낸다. 솔직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나란 여자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결핍과 상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에 소중한 가치들을 알려주는 핵심이었다고 상처는 인생에 상냥하다고 정의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학생으로 외톨이로 지내야 했던 어린 소녀의 나를 만났다. 너무 자주 넘어져서 "너는 분명 가분수일거다"라고 가족들조차 놀렸던 상처투성이였던 내 어린 시절의 무릎팍을 다시 떠올렸다. 어른이 되면 넘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이 셋을 낳고도 나는 조카랑 몸을 던져 놀다가 넘어져서 얼마나 오랜 시간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상처도 상처지만 부끄러움이 더 아팠다. 그렇게 내 몸도 열심히 상처받고 재생하면서 끊임없이 새살을 만들어내며 살아왔다. 나이들어서는 더 잘 넘어진다는데!
눈에 보이는 상처는 어떻게 재생되는지 지켜볼 수 있지만 마음 상처의 회복은 지루할 정도로 더디게 느껴진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내가 생생히 살아있다는 존재의 확인이라면 오늘도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가는데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블로그를 하는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 역시 블로그를 하면서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도 쉽게 꺼내놓지 못하는 결핍과 상처를 이따금씩 드러낸다. 행복보다는 상처를 이야기할 때 더 글발이 산다는 그녀의 말처럼 나도 가끔은 행복 보다는 글발을 더 붙잡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것 같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나도 임경선처럼 부끄럼없이 툴툴 털어낼 수 있을까 상상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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