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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한 권의 책

자기 앞의 생

by 북앤라떼 2021. 9. 9.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의 책<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으면서 로맹 가리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또 다른 이름인 ‘에밀 아자르’의 책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로맹 가리는 자기를 가두고 있는 틀을 벗어나서 자기 이름을 떼고 실력으로 다시 한번 프랑스 문단에 맞서보고 싶었다. ‘슬럼프에 빠진 로맹 가리’라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혹평에 맞서서 그리고 자신에 붙은 이미지 꼬리표를 벗어나서 작품만으로 승부를 하고 싶었고 결과는 로맹 가리의 통쾌한 승리였다. 물론 한번 수상한 작가에게 수여하지 않는 콩쿠르 상을 두 번째 수상하게 되면서 오촌을 내세우고 뒷감당을 하느라 고생하기도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프랑스 문학계를 비웃었을까. 결국 그들은 편견과 관념에 사로잡혀서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인 셈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네 권의 소설을 발표할 때, 그 누구도 로맹 가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이런 편견은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있다. 믿고 보는 작가가 있듯이 때로는 작품보다는 작가로 판단하는 경우가 더 많다. 로맹 가리는 권총 자살과 동시에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음을 유서로 남겼다. 그 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유년시절 어머니와 단둘이 러시아에서 남프랑스로 이주해서 성장했던 로맹 가리는 전쟁을 비롯하여 이방인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의 문제를 항상 고민하며 살았다. <자기 앞의 생>은 창녀의 아이들을 부모 대신 비밀리에 돌보는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아가는 열네 살 소년 모모의 이야기다. 유태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던 로자 아줌마가 뇌혈증을 앓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던 모모가 처음으로 로자 아줌마와 가족애를 느끼며 아줌마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에서 아줌마를 돌봐주는 위치로 성장해 가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다. 너무나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정말 간략하게 기록만 하려고 한다.

모모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조차 알지 못하고 로자 아줌마와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을 데리러 온 친부를 통해서 자신의 진짜 나이와 슬픈 가족사까지 알게 된다. 그러나 로자 아줌마는 친부의 정신질환이나 친부가 친모를 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모모를 자식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모모를 보내지 않는다. 모모 역시도 로자 아줌마를 유일한 가족으로 여기며 끝까지 함께 한다.

아줌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면서 모모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아줌마가 병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자신의 친모의 죽음을, 그리고 친부의 죽음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로자 아줌마의 열다섯 살 때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모모는 아줌마의 행복한 미소와 지금의 아줌마의 얼굴을 비교한다. 도대체 무엇이 아줌마의 웃음을 파괴했을까. 도대체 우리의 '생'이 무엇이길래.

 

모모는 평소 아줌마의 안락한 피난처였던 지하실의 방에서 아줌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킨다. 아줌마가 죽은 뒤에도 모모는 그곳에서 아줌마에게 곱게 화장을 하고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한다. 시체가 썩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지하실 문을 부수고 사람들이 찾아올 때까지 모모는 아줌마 옆에 누워있었다. 모모는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모모는 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웃에 사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찾아가서 물었다.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하밀 할아버지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자신이 평생 좋아하는 빅토르위고의 책과 코란을 헷갈려 할 정도지만 그래도 모모에게 하는 말들은 참 지혜롭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책 112쪽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모모는 아줌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수없이 그렇게 묻고 또 물었다.

모모는 알았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사랑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곱씹게 된다.

모모는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사람이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모모는 자신이 그리고 같이 사는 아이들이 모두 제때 낙태수술을 하지 못해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로자 아줌마는 그런 아이들에게 부모도 주지 않았던 사랑을 준다. 마치 이 세상에 잘못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아이들의 양육비를 받아 생활했지만 돈이 끊겨도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았던 것은 그런 아이들에게 대한 사랑이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뉴스들을 보지만) 아이들이 흥분하지 못하도록 신경안정제를 아이들에게 먹이곤 하는데 로자 아줌마는 본인이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꺼이 개구쟁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층에서 살아가는 로자 아줌마와 부모가 없거나 혹은 있지만 버림받은 아이들 그리고 모하메드 모모.

모모는 다른 아이들의 엄마가 보내주는 양육비로 로자 아줌마가 자신을 돌본다고 생각하여 아줌마에게 복수하려고 여기저기 똥을 싸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입장이 바뀌어서 나중에는 아픈 아줌마의 똥을 치우게 되지만 그때 모모는 그 똥이나 냄새가 더럽다고 느끼지 않는다.

원래 로자 아줌마도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뒤 창녀로 살았다. 나이가 들고 몸이 망가진 후에는 모모와 같은 아이들을 돌보았다. 보통 창녀는 부도덕한 짓을 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키우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았는데 로자 아줌마는 비밀리에 그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해 왔던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로자 아줌마가 눈을 뜨는 것을 보면 행복했다.

나는 밤이 무서웠고, 아줌마 없이 살아갈 생각을 하면 너무나 겁이 났다.

책 86쪽

[나 역시 벌써 열 살이 넘었기 때문에 이제 로자 아줌마를 도와야 했다. 그리고 내 장래도 생각해야 했다. 만약 나 혼자 남게 되면 빈미구제소로 들어가야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문제 때문에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로자 아줌마가 죽진 않을까 싶어 옆에 앉아 있곤 했다. ]

책 92쪽

아줌마가 아프면서 모모는 정말 철이 들어간다. 아니 자신의 진짜 나이가 실제보다 3-4살 많다는 것을 안 뒤 부터다. 자신이 이제 컸다는 것을 인식하고 난 뒤 달라진다. 게다가 이젠 아줌마의 보호자가 되었으니 아줌마 대신 생계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맡겨진 아이들 밑을 닦아주는 일도 싫은 줄 몰랐다. 아줌마 옆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화장실도 가지 않고 과자 한 조각 먹지 않고 꼼짝 않고 그녀 곁을 지내는 모습은 애틋하다.

로자 아줌마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하밀 할아버지는 30년 지기 우정의 그녀에게 시를 읊어주고 싶었지만 눈이 어두워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모에게 시를 읊어주면 모모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암송하면서 올라가서 아줌마에게 읊어주며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만약 모모가 글을 알았더라면 시를 한번에 써서 아줌마 앞에서 읽어주었을 텐데 그게 안돼서 7층 계단을 계속 오가면서 한 구절씩 시를 읊어주었다.

나는 달려가서 그녀를 껴안았다.

정신이 나갔을 때 똥오줌을 쌌는지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혹시 내가 자기 때문에 구역질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 모모……. 모모…..”

“네 로자 아줌마, 나 여기 있어요. 나만 믿으세요”

책 267

나는 그녀의 눈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딴 곳을 보지 않기 위해. 내 말을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유태인 노인네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눈은 하밀 할아버지가

“이건 최고로 아름다운 양탄자란다" 라고 말하던 양탄자만큼이나 아름다웠다.

268

네가 내 곁을 떠날까 봐 겁이 났단다,.

모모야. 그래서 네 나이를 좀 줄였어.

너는 언제나 내 귀여운 아이였단다.

다른 애는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네 나이를 세어보니 겁이 났어.

네가 너무 빨리 큰애가 되는 게 싫었던 거야.

미안하구나”

271

사랑해야 한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 남았다.

자기 앞의 생에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자기 앞의 생저자로맹 가리출판문학동네발매200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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