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 문유석
현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소년 시절부터 좋아하는 책과 음악만 잔뜩 쌓아놓고 홀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개인주의자였다. 요령껏 사회생활을 잘해나가는 편이지만 잔을 돌려가며 왁자지껄 먹고 마시는 회식자리를 힘들어하고, 눈치와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집단주의적 문화가 한국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판사가 스스로 개인주의자라고 하다니 뻔뻔스럽다고 여길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발전시킨 민주주의 법질서를 공부하고, 이를 적용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온 법관에게 개인주의는 전혀 어색한 말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공정한 룰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위해 다른 입장을 가진 타인들과 타협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집단 내 무한경쟁과 서열싸움 속에서 개인의 행복은 존중되지 않는 불행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이민’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으며, 감히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를 꿈꾼다. 지은 책으로『판사유감』이 있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더 할말이 없다. 이보다 이 책의 주제를 잘 나타낸 말은 없다. 제목부터 끌렸고(요즘처럼 국가주의가 넘치는 시대에 개인주의라니……), 첫 문장부터 끌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구절에 와서는 완전히 감정이입까지 되고 말았다. 나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러면 훗날 내게 기회가 오더라도 이런 책은 쓸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책이 그냥 그런 많은 책들 속에 묻히지 않기를 바란다.
사족: 이 짧은 글에 무슨 사족이랴 싶지만…… 나는 그가 과거 어느 매체에 쓴 신용불량자에 대한 글에 동의하여 그의 글들을 따라 읽게 되었다. 신용불량 상황까지 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친의 빚을 오랫동안 대신 갚은 적이 있어 그의 따뜻한 시선이 반가웠다.
-손석희 JTBC뉴스룸 앵커
현직 판사가 쓴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강한 끌림의 제목과 나에게도 분명 비슷한 성향이 있다는 생각에서 가볍게 책장을 넘겼다. 책은 읽기는 재밌고 어렵지 않으나 그렇다고 결코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었다. 판사의 시선으로 그가 만났던 사건의 이야기를 다룬 챕터에서는 어떤 사건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 사건을 통해 만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다. 직업적으로 수 많은 판결을 하고 판결문으로 종료되고 잊는 사건이 대부분이겠지만 유난히 잊지못하고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코로나시대, 코로나 세대를 이야기하는 요즘에 '개인주의자'를 선언하는 이들은 더 많아졌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무엇인가? 나를 위한 것도 있지만 적당한 거리 유지를 통해 남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고 나의 건강도 챙기자는 것 아닌가. 문유석의 자유주의자 선언도 이런 보편적인 시민의식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의 행복과 자유를 바라면서 산다는 것. 그 소박한 꿈을 어떻게 이루며 살아야할까?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자를 선언하는 일이 말처럼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세뇌를 받았던 국민교육헌장이라는것이 무엇이던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그리하여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고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협동하고 협력하는 것이 국민정신이라 배우지 않았던가. 시대가 바뀌어서 다행히 이제는 이런 것을 읊어대지 않아도 되지만 대한민국의 사회, 직장, 전반적인 문화 풍토는 개인보다는 조직을 강조하고 집단의 일원으로 적당히 충성하기를 강요한다.
이런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것도 남들과의 비교에서 얻어지는 상대적인 것이기 쉽다.
한국사회는 이런 사회다. 실제 하는 일, 봉급도 중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번듯한지’ ‘어떤 급인지’가 실체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다. 나이 오십대 중년들의 사회에서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모임에 나타나는 것은 메시지가 다른 것이다. 고위직 판사들이 기사 딸린 차로 나타나다가 어느 날부터 낡은 자가용을 자가운전하여 나타나기 시작하면 청렴한 집단이라고 좋은 평가를 받는 플러스 요인보다 사회적 위상이 예전보다 못한 집단으로 평가받는 마이너스 요인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외관이 실질을 좌우하는 사회다.
34쪽
소위 잘나가고 출세해야 잘 사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런 사회문화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개인주의자로 살기란 쉽지 않다. 이런 분위기라면 앞으로도 국가 행복순위 하향권의 오명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문유석이 말하는 개인주의자 선언은 나의 자유와 욕망이 소중한만큼 타인의 것도 소중하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나의 권리를 위해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의미다. 현직 판사로서 접하는 많은 사건들은 의외로 가벼운 말다툼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나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까지 저지르고 법정에 서는 경우가 많다. 지금 리뷰를 쓰는 중에도 험담때문에 무차별 흉기 난동으로 5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위험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뱉어버린 말은 주어담을 수 없다. 뱉기 전에 생각해야 한다.
사람의 말이 급소를 찌르는 흉기가 된다.
특히 인터넷은 그 흉기를 죄의식없이 휘둘러대는 전쟁터다.
단지 주목받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는 모욕을 가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법조인의 말은 더더욱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다.
검찰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귀가한 후 굴욕감에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례가 여러번 발생했다
147쪽
진실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때로는 불편하다. 그러나 문유석은 불편한 진실 자체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왜곡하기 보다는 그 불편한 진실을 토대로 ‘어떻게 사회를 개선할 것인가’를 고민하자고 말한다. 나의 관점에 따라서 한쪽 측면만 이야기하고 다른 측면은 애써 외면하는 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
옳고 그름을 쉽게 말하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사람들이 아예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양극단에 서서 자기만의 독선에 빠져버리는것도 위험하다. 이럴때일수록 집단 논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기 보다는 실증적 근거를 들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법조인은 옳고 그름의 판단만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타협의 자세를 강조한다. 사실 법조차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양자간에 서로 양보하고 합의를 하는 순간이라고 한다.
황우석 사건을 다룬 영화 <제보자> 이야기를 들어서 유교적 가족공동체의 윤리 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 제보자의 용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말한다. 한국사회 윤리는 사실 조폭의 ‘의리’수준과 비슷하다. 제보자들은 시민 영웅이 되기 보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기 쉽다. 내부고발자가 시민 이익의 대변자로 보호받고 보상받아야 권력자들이 긴장한다. 안타깝게도 황우석 사건을 보도한 피디는 퇴출되어 스케이트장 운영 업무에 종사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제보자의 대우 실태다.
판사는 직업상 평생 인간의 폭력성을 낱낱이 지켜보아야 한다. 그가 매주 마주하는 사건은 너무나 잔혹하여 책에 몇가지 다룬 사연들도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책에 다루지 않은 것을 또 얼마나 더 극악무도할 것인가. 사람들이 점점 인간이 더 악해진다는 말을 많이 한다. 정말로 인간의 악함과 폭력성은 현대사회의 전유물일까?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연구한 객관적인 증거 자료들에 의하면 인류의 폭력성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으며 현재의 수치는 오히려 낮아지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인간은 자신의 폭력성을 제어하며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진보해하고 있는 것이란다.
2015년에 출판된 이 책은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해 여름에 서아프리카에서 의료활동을 하던 중 에볼라에 감염되었던 미국 의사 켄트 브랜틀리 박사를 본국에 소환하여 치료하였던 그 과정을 이야기한다. 감염자 본국 소환을 반대하는 비난 여론 속에서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서 토머스 프리든 소장의 “낯선 것에 대한 공포가 우리의 연대감을 이길 수는 없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그 일을 거행했다. 이후 켄트 박사는 완치되었지만 소장은 경질은 면했지만 청문회에서 공격을 받았고 사과했다. 문유석은 에볼라 대응에 대한 것은 판사로서 평가할 능력이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프리든 소장과 여론에 상관없이 의학적 판단에 의거하여 판단을 한 메인 주 법원 판사가 보여준 자세를 주목했다. 대한민국은 ‘결과책임론’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전문가가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지면서 사태를 수습하기란 어렵다. 낯선것에 대한 공포와 여론 그리고 전문가의 대응 지금은 몇년이 지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임에도 우리는 그 사건을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낯선 것에 대한 공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사회가 보여준 것은 과학적 판단을 존중하는 합리주의, 어떠한 여론의 비난을 받더라도 합리적 근거와 소신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들,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함부로 책임자와 대응방식을 바꾸지 않는 뚝심 있는 시스템, 그리고 단 한 명의 자국민도 버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연대감을 표시하며 국민을 안심시킨 리더십이다. 한 사회의 성숙함은 위기 속에서 비로소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304쪽
판사가 이렇게 문학적일 수 있는 이유가 뭘까?
판결문을 많이 써서일까?
문유석 판사도 유시민작가처럼 활자중독자였다. 읽을거리 없이 화장실에 앉아있으면 불안하여 벽에 붙은 찢어진 신문지라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좋은 단편을 찾아서 읽으면 쇠약해진 ‘문학 근육’단련에 좋다고 법관에게는 차가운 이성뿐 아니라 문학적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문학의 힘을 어필하는 부분이 참 좋았다.
그가 쓰는 이유도 마음에 든다. 재밌어서 쓴단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들을 적어둔 글들때문에 나중에 읽는 재미가 커서란다. 문학의 힘과 글쓰기의 힘은 계속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것이다. 결국 이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합리적인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한다. 오늘의 개인주의자 선언은 코로나 팬데믹의 끝자락이라 간절하게 믿고 싶은 우리들이 한번쯤 곱씹어봐야 마땅한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 단원고등학교 2학년 4반 18번 빈하용군의 전시회 이야기를 담았다. 여섯 살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빠져서 손에 잡히는 종이마다 그림을 그려댔다고 한다. 심지어 성적표 뒷면에까지. 뒤늦게 미술학원에 보냈는데 친구들과 함께 떠난 수학여행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 아이를 나 스스로 지킬 수 있을만큼 우리는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맺었다.
나도 책을 덮으며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를 곱씹는다.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이야기하는 책인줄 알았는데 개인의 행복을 위해 어떤 사회가 필요한지, 그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어떻게 서로 타협하고 연대하며 살아야하는지를 역설하고 있었다.
우리는 흑백 진영논리 속에서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너의 행복도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현직 판사로 대한민국의 사건과 사고를 매일 마주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개인주의자 선언이었다.
목차
개인주의자 선언
프롤로그_인간 혐오
1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나라는 레고 조각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
마왕 혹은 개인주의자의 죽음
인정투쟁의 소용돌이, SNS
자기계발의 함정
광장에 내걸린 밀실
행복도 과학이다
개인주의자의 소소한 행복
나는 사기의 공범이었을까
전국 수석의 기억
개천의 용들은 멸종되는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88학번
20년 만에 돌아온 신림동 고시촌
2부 타인의 발견
변한 건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우리 이웃들이 겪는 현실
필리핀 법관의 눈물
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말이 흉기다
인천의 비극
증인에 대한 예의
국가가 갖출 예의
딸 잃은 아비를 스스로 죽게 할 순 없다
문학의 힘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장그래에게 기회를!
조정 달인의 비결
서른아홉 살 인턴
‘머니볼’로 구성한 어벤저스 군단
우리가 공동구매할 미래
3부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진실은 불편하다
정답 없는 세상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
조폭의 의리와 시민의 윤리
사회를 묶어내는 최소한의 가치―케임브리지 다이어리 1
필라델피아 한낮의 풍경―케임브리지 다이어리 2
무지라는 이름의 야수
문명과 폭력
슬픈 이스탄불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나는 아메드다
우리가 참조할 모델사회는 어디일까
지상천국은 존재하는가
담대한 낙관주의자들이 꿈꾸는 대담한 상상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가치관
낯선 것에 대한 공포와 성숙한 사회
에필로그_우리가 잃은 것들
<개인주의자 선언> 목차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 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27
원래 행복의 원천이어야 할 인간관계가 집단주의사회에서는 그 관계의 속성 때문에 오히려 불행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맛있는 음식도 내가 원치 않을 때 강제로 먹으면 배탈이 나듯, 타인과의 관계가 나의 선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되고, 의무와 복종의 위계로 짜이는데 이것이 행복의 원천이 될 리 없다. 갑을관계, 경쟁관계, 상명하복관계, 나를 평가하고 지배하는 관계, 내가 일방적으로 순종하고 모셔야 하는 관계에 있는 인간들이 과연 나에게 유용한 생존의 도구이기는 할까? 생존의 위협에 가깝지 않을까?
63
현재 우리 사회의 근본 사회계약인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토대로 현대적 복지국가 원리를 조화시키고 있음에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내면화되지 못한 우리 사회에는 언제든 이런 시대착오적 논리가 등장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참조할 모델사회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직업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토론해야 하는게 당연하다. 남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살고 싶은 미래가 어떤 방향인지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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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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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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