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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한 권의 책

한강: 노랑무늬영원

by 북앤라떼 2020. 9. 15.

노랑무늬 영원

한강

 

노랑무늬 영원 저자한강출판문학과지성사발매2012.10.23.

 

*단편 작품집

 

 

회복하는 인간(작가세계/2011)

발목을 접질린 날 한의원을 찾았다. 거기서 그녀는 쑥뜸을 하다 화상을 입어 발목에 구멍이 생겼다. 인대, 근육, 신경이 다 모인 그 자리가 회복되지 않아서 수술을 해야 할지 기다리고 있다.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진물이 난다.

화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화상을 입힌 한의사에게 잘못을 추궁하지도 못하고 미련할 정도로 상처를 가리고 악화시키는 그녀를 보면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렇게 미련을 떠는 거야. 버티기만 한다고 다 낫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회복이 되겠어.

내 몸의 상처들은 어린 날의 초상이고 추억이다.

괜찮아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훈자(세계의 문학 2009)

훈자.

그렇게 깊이 그 여자가 생각하는 것은 훈자다.

7년 전, 팀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만년설이 에워싸고 있고, 살구 꽃이 끝없이 피어 있는 훈자가 가장 인상 깊은 여행지였다는 말을 들은 뒤 그녀는 훈자를 찾아보았다.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직장 생활과 육아 속에서 아이에게 가진 감정이 사랑 보다 고통이라 느끼는 여자, 직장을 구할 가능성이 희박하면서도 육아조차 돌보지 않는 무심한 남편을 둔 여자는 답답할 때마다 훈자를 생각했다.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48쪽

어쩌면 누군가엔 자신만의 훈자가 있지 않을까. 언젠가 탈출하고 싶은 곳. 나만의 꿈 혹은 비밀. 나의 훈자는 어디일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에우로파(문예중앙 2012)

나와 인아가 마주 앉았다. 핏기 없이 야윈 얼굴의 인아는 6년간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마친 뒤 악몽을 꾼다고 한다. 그러다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화분에서 기이하게 선명한 꽃이 피듯 인아는 되살아났다. 그리고 가수가 되어서 활동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몸은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살고 싶은 트랜스젠더다. 남자의 외모로 회사 생활을 하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인아와 함께 한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87쪽

세면대 위의 거울 속에서 나를 건너다보는, 친숙하고도 낯선 사람의 얼굴을 마주 건너다본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한 번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사람이 저기 있다.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얼굴, 서서히 완고한 주름들을 새기며 늙어갈 사내의 얼굴을 나는 본다.

94쪽

서로는 가깝지만 그러면서도 서로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침묵이 더 많이 유지되며 혼잣말이 더 많이 존재한다. 서로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뿐 깊이 서로의 상처를 더 알려고 하진 않는다.

우리의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뻗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75쪽

이따금 같이 밤거리를 걸어주고 다정하게 무정하게 서로의 몸을 껴안고 고통에 가까운 애착을 느끼며.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을 차가움

밝아지기 전에(문학과 사회 2012)

은이 언니가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언니를 닮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109쪽

언니는 동생의 장례를 치르고 잡지사를 그만둔 뒤 여행을 떠났다.

네팔을 시작으로 국외로 떠도는 여행작가가 되어 여행을 하며 책을 쓰곤 했다. 이번엔 미얀마였다. 떠나기 전날 은이 언니랑 하룻밤을 보냈는데 귀국 예정 하루 전 날 그녀의 비보 소식을 들었다. 사인은 뎅기열이었다.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123쪽

베란다 바깥의 차가운 어둠을 오래 내려다보다가 책상 앞에 앉는다. 노트북 컴퓨터가 켜디는 동안 천천히 마른 세수를 한다.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라고 첫 문장을 쓴다.

129쪽

왼손(문학수첩2006)

성진은 세 돌 넘긴 아이와 아내가 방을 함께 쓰면서 코를 심하게 고는 자신을 향한 아내의 손길이 차갑게 느껴지고 그 이후 서재로 침대를 옮겼다. 다시 자취생으로 돌아간 기분도 들고 가끔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깨기도 하면서 잠이 점점 얇아지던 시기에 그날도 여느 날 아침과 같았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로 거품을 씻어내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의 왼손이 상처 난 곳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왼손의 감각을 뺨으로 느꼈고 동시에 뺨의 감각을 왼손으로 느꼈다. 평소와 똑같은 정상적인 감각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왼손이 마치 나름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뺨의 상처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135쪽

그날부터 왼손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마음과 달리 왼손 스스로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객과의 전화를 하는 중에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하고, 상사가 말을 하는 중에 왼손이 귀를 틀어막기도 하고 심지어는 상사의 말을 못 하도록 입을 틀어막기도 한다. 너무나 빨리 움직이는 왼손을 그는 통제할 수 없다. 급기야 사람들은 병원에 가 보라고 타이르는데..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집 정거장이 아닌 곳에서 왼손은 하차벨을 누르고 하는수없이 내려서 자신의 발걸음이 움직이는 대로 가 보니 옛날 대학교 때 좋아하던 여자의 선혜의 가게 앞이었다.

그렇게 인사만 하고 가려는데 다시 왼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하고 기민하게 그녀의 뺨을 만졌다. 왼손에 이끌리어 그렇게 그는 선혜와 하룻밤을 보냈다.

가장 나쁜 것은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57쪽

왼손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병원을 찾았지만 정신과로 가 보라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그러다 다시 찾은 선혜에게 거부당하며 그날도 통제가 안되는 왼손때문에 선혜로부터 왼쪽 어깨가 상처를 입고 이젠 정말 끝이라는 마음으로 오른손이 왼손을 처단하려고 망치를 든다. 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오른손과 왼손이 처절하게 싸우고 뒤틀렸다. 충혈된 눈가의 끈적이는 얼룩을 피 묻은 왼손이 어루만져 붉게 물들였다.

파란 돌 (현대문학2006)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하늘나라 우체통’이라는 주제로 보내진 않았지만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주시지 못했던 할아버지 생각에 편지를 쓰면서도 눈물을 훔친 기억이 어느새 옛 추억이 되어 있다. 그곳은 어떤가요? 우리 가슴에 한 번쯤 저 멀리 떠난 누군가를 향해 물었던 질문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이는 자신이 이미 죽는 꿈을 꾸기도 한다. 살아있지만 죽은 느낌으로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맑은 물가에 반짝이는 파란 돌이라면 얼마나 내 마음에 들었을까 싶다.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있더라고.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걸어갔지. 개울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맑은데, 돌들이 보이더라고.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정말 예뻤지. 그중에서도 파란빛 도는 돌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주우려고 손을 뻗었어. 당신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벽에 걸린 당신의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검은 우주 공간에서 방금 폭발했거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별의 형상을. 그러니까, 당신의 얼굴을. 그때 갑자기 안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212쪽

노랑무늬영원(문학동네2003)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가장 좋아해서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겠다고 생각했던 여자, 현영이 33세에 사고로 두 손을 다 쓰지 못하게 된 이야기다.

손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거의 전부다. 나는 언제나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손을 쓰지 못하는 나는 조금의 경제력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이다. 죽는 순간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 나의 삶이 될 것임을 의심한 적 없었지만, 고작 서른세 살에 붓을 꺾은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폐가 되고 싶지 않았으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부담이 되고 있다. 단지 숨 쉬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299쪽

사고는 가장 가까운 남편, 엄마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철저하게 고아와 같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 사고로 쌀을 씻고 머리를 감는 일 조차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타인의 힘을 빌려야 할 때의 비참한 심정. 상실감. 외로움..

현영에게 가장 불행했던 것은 사고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손은 그 자리에서 죽었는데 몸뚱이만 살아남았다는 거추장한 진실 앞에서 그녀는 매일 무너졌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로부터 사진관에 걸린 자신의 사진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그녀는 십 년 전으로 돌아가 그때의 감각을 되살린다. 사고 전의 나와의 조우.

그녀는 불행했다. 남편은 사고로 손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 않은 것을 왜 감사하지 않냐고 하지만 그녀에게 이것은 사형선고와 같은 삶이라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매사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집착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갑자기 달려든 개를 살리려고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던 자신을 수없이 질책했다.

이젠 두 손 다 틀렸어.라고 중얼거린 순간이, 나에게는 그 이른 봄날의 교통사고보다 더 결정적인 -더 무서운-순간으로 기억된다.

240쪽

사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을 잃는 것이다. 나를 사랑할 수 없고 타인의 사랑도 기대할 수 없고 타인도 사랑할 수 없을 때의 건조함은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건조함이 가득한 시점에 노랑무늬 영원은 앞발이 잘린 도마뱀의 발의 재생력을 통해 끈질긴 생명력을 불러일으켜준다. 비록 커다란 캔버스에 노랑무늬 점으로 가득 채울지라도 그녀의 감각은 아직 살아있고 비록 영원이라 말할 수 없을지라도 아직은 꿈틀거린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잠시 내 손을 바라보게 되었다. 꼭 붓을 든 예술가가 아니어도 손이 자유롭지 않는다는 의미는 매우 강렬했다.

한강은 내면의 상처를 마주하게 만드는 작가다. 고통 앞에서는 철저하게 혼자라고 일깨워주는 작가다.

차가운 바닥에서 홀로 고립된 곳에서 책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그 낮게 깔린 나도 알지 못하는 마음 저 깊은 수심까지 그녀가 큰 돌을 묶어 함께 가라앉는 느낌

너무 낮아서..때로는 그 낮고 어둠이 짙게 깔린 느낌이 든다.

그러다 어쩌면 그 가라앉은 깊은 슬픔을 끌어 올려 마주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고통도 있는 법이니까.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채식주의자가 그랬고 소년이 온다도 그랬다.

하지만 인간의 희망과 고통이 늘 공존하는 것이라면

마주해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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