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 카페/한 권의 책

타인의 고통

by 북앤라떼 2020. 9. 15.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미군의 폭격기들이 한창 바그다드 외곽지역을 폭격하고 있던 2004년에 출판된 책이니 안그래도 미운 털 박힌 작가의 글이 불러일으켰을 논란이 상상이 된다. 그 시기로 보면 이런 목소리를 내는 그녀가 더 파워풀하게 느껴진다. 그 불편함을 안겨주는 작가!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진실에 가깝도록 이끌어주는 작가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멋지게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에 대한 인식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불편한 사진을 외면하듯 외면할 수도 있고 작가의 의도에 가까이 다가설수도 있으리라.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전 손택의 이야기

1943년 미국 북부에 수천명의 독일 병사들이 갇혀 있는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밤마다 나치 병사들이 내려와 자신을 잡아죽이는 악몽에 시달리곤 했던 열 살의 소녀는 자라면서 남부에 포로로 갇혀있던 프리츠를 비롯하여 진실이라는 것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녀가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그녀만의 강렬한 경험의 기억과 진실이라는 역사적 사실. 그 밤마다 악몽을 꾸었던 소녀가 할 수 있던 것이 문학이었고 포로로 잡혀 있던 프리차도 3년동안 자신에게 허락된 책들을 탐독하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 문학이었다.

문학 그것은 세계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부록 <문학은 자유이다>

문학 그것도 영향력 있고 반드시 필요한 문학의 기능 중 하나는 앞을 내다보는 것이다. 독일이 시상하는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녀는 이야기한다.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하게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조차도 예술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입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각 문화가 상호 작용함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 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p207

모든 현대의 전쟁은 서로 자기들 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을 야만적이라고 부르게 되는 문명의 충돌,즉 문화 전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적은 늘 ‘우리의 생활 방식’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우리의 고결하고 훌륭한 가치를 더럽히거나 모독하는 존재다.

2001년 9월 11일 이후로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나라인 미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한때는 사랑을 받고 부러움을 샀지만 지금은 불쾌감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미국 밖으로 나가본 미국인들은 수많은 유럽인들이 미국인들을 천박하고 상스럽고 교양없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미국인들이 이런 기대에 기꺼이 부응하려고 마치 옛날에 자신이 지배했던 식민지에 가서 분통을 터뜨리는 식민주의자들처럼 행동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스스로를 문명의 수호자이자 유럽의 구원자라고 보고 있는 미국은 도대체 왜 유럽인들이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미국이 앞뒤 가리지 않는 싸움꾼들의 나라라고 보고 있다. 미국인들은 적과 아군이라는 용어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적은 저곳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늘 ‘저곳에서’ 싸움을 벌인다. 낡은 것 보다는 새 것을 찬양하면서도 보수적인 그 사고방식을 고쳐놓을수 없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이 지닌 보수적인 가치의 근원은 종교다. 전반적으로 볼 때 미국은 종교사회다. 종교 자체라기 보다는 종교를 둘러싼 사고방식이다. 미국이 우세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유할 이 세계는 서로 뒤섞일 것이고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배척할 수도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융합할 것이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은 강하다”라는 말을 우리는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챕터별로 9일간 '타인의 고통'의 나름 포인트라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읽어 보았다. 매일 밑줄을 그으며 함께 읽었다고 느껴지는 책은 덮을 때 더 여운이 남는 기분이다. 공감의 힘~

<타인의 고통>의 책은 덮을지라도 수전 손택이 물음표를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삶 속에서 작동될 것이고 여전히 누군가는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겠다.

요즘 코로나19 사태를 보며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게 된다.시대는 바뀌었지만 그녀가 현실 참여를 시작했던 1960년대 그녀가 했던 질문들을 내가 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지금 미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세계는 지금 고통받고 있다. 고통의 문제는 늘 있어왔지만 지금과 같이 타인의 고통에 주목하는 일도, 전 세계가 한 가지 이슈를 주목하는 것도, 그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라는 것도 내가 느끼기엔 처음 있는 일 같다.

그야말로 바이러스 전쟁이다.

이 전쟁 앞에 나는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가

이번 전쟁은 실제로 잔인한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되지는 않지만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되는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야 한다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사람들 간에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또 특정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만들었다. 중국으로 시작하여 한국, 이태리, 이란..이제는 고통을 바라보던 많은 나라들도 그것이 '우리의 문제'이자 곧 '나의 문제'까지 될 수 있음을 보는 시점이 되었다. 미국도 갑자기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두려움이 현실이 되어 공포감을 조성하고 대형마켓에 들어가기 위해 아침부터 줄을 서고 집안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우리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거대한 강을 어디쯤 건너가고 있는 것일까?

2020/3/9 타인의고통 읽기 첫 날의 글 중에서

챕터#1

32쪽

59회 국제 올해의 사진상을 수상한 미국 사진작가 힉스(Taler Hicks)의 '처형당하는 탈레반의 사진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연민과 메스꺼움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나머지, 그밖에 다른 어떤 사진들이 당신이 그밖에 어떤 잔악 행위들과 어떤 주검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된다고.

처참하게 죽은 사람의 사진에 계속 노출되면 어느새 동물이 죽은것을 보는것 처럼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수전손택이 고발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들이다. 인간의 잔인함.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신경함.

그러나 그런 명분으로 시작한 어떤 전쟁도 이 땅에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오늘날 전쟁이 없어질거라고 믿는 평화주의자들이 있는가?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지난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 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전문가적인 직업여행자들이 촘촘히 쌓아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실에서도 (전쟁을 또는 재난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 이른바 ‘뉴스’는 비참한 모습을 시청자들의 눈에 내던져 동정심이나 격분, 그도 아니면 찬성 같은 반응을 자아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쟁과 폭력을 대서특필하기 마련이다.

39쪽

오늘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 2001년 9월11일 세계 무역센터가 공격당했을 때 그 건물에서 간신히 피해 나왔던 사람들이나 근처에서 그 장면을 그대로 봤던 사람들은 처음 그 공습을 설명하면서 “영화같다”라고 말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이 아닌가. 얼마전에 본 영화 ‘엑시트’나 ‘감기’의 한 장면이 연출되는것 같은 느낌이 드니 말이다.

“단어의 무게, 사진의 충격.” 좀 더 극적인 이미지들을 찾아 나서려는 충동이 사진 산업을 등장시켰으며 사진 산업은 곧 충격이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 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여겨지게 된 문화의 일부가 됐다.

사진은 객관적인 기록이라는 교묘한 명분으로 이런 도덕적인 문제를 회피해 왔다. 그러나 사진은 조잡한 진술일 뿐이며 객관적인 기록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백이 될 수 있으며 믿을 만한 복사본이자 필사본인 동시에 그 현실에 대한 해석이 될 수 있다.

48쪽

사진이 ‘말해주는 것’은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사진이 말해 줘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을 읽게 된다. 그 누군가의 관점을 재현할 뿐이라는 사실이 별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 선명하게 찍히는 수난의 대

상은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별개로, 고통을 증명한다는 것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예술의 역사에서 질병이나 출산처럼 자연적인 고통이 재현된 적은 거의 없다(….)확실히 이런 것들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흥분시키며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65쪽

참 자극적인 표현이다.

고통받는 육체 사진을 보는 것이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것과 마찬가지의 격렬한 것이라는..

이 말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을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 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것이다. 의도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68쪽

작가들이 많은 전쟁 사진을 담았지만 사실 그건 연출된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품위있는 남성들이라면 으레 즐기는 나들이처럼 전쟁을 표현했다. 전쟁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카메라는 역사의 눈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아마도 브래디일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일종의 눈길 끌기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주장되어 왔기에 역사는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고 있던 좀 더 주목할만한 주제, 즉 리얼리즘이라고 알려져 있는 주제와 동맹을 맺게 됐다. 이 주제는 사진작가들보다 소설가들에 의해서 더 많이 옹호박게 될 것이었다.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모두 용인됐다.

8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그리고 기록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충격적인 이미지를 많이 보고 이미지를 소비하지만 그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는 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진가들은...

그 안에서 폭력이나 전쟁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본 '목격자로의 증언'을 말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생한 죽음을 포착해 그 죽음을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만드는 일은 오직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카메라는 관람객들을 바짝, 그것도 너무 바짝 데려간다.

확대경의 도움까지 받아 이 소름끼칠만큼 명확한 사진들을 불필요하고 추잡하기까지 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카메라의 시대에는 현실감을 둘러싼 새로운 요구들이 등장한다. 현실적인 것은 충분히 무섭지 않기 때문에, 좀더 무서움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100

사진없는 전쟁,즉 에른스트윙거가 관찰했듯이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려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12쪽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사진은 그 무엇이 됐든지 간에 피사체를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어떤 이미지를 아름답게 혹은 끔찍하거나 견딜 수 없을 만한 것으로 그도 아니면 꽤 견뎌낼 만한 것으로 만들수도 있다. (....) 사진작가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둘러싼 논의들은 사진이 지닌 이중적 힘(기록을 할 수 있는 힘과 시각예술 작품을 창출하는 힘)때문에 두드러질 만큼 과장되어 왔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리고 사진은 일종의 연글수로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받는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나 아렌트가 곧바로 지적한 것처럼 집단수용소를 담은 모든 사진들과 뉴스 영화들은 연합군이 진군해 들어가던 바로 그 순간의 수용소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체무더기, 피골이 접한 생존자들처럼 이런 이미지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었던 요소들은 전혀 수용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119쪽

사람들은 으레 엄청나게 잔인한 사건들과 범죄들의 현장을 담고 있는 사진을 보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히려 우리는 이런 사진들을 본다는 것의 의미, 자신들이 본 것을 현실에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담은 이미지들도 매력적일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자동차 충돌 현장 옆을 지나칠 때 운전자들이 차의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단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뭔가 소름 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p145

“우리들은 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재사건이나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를 늘 읽곤 하는가?”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폭력의 이미지들이 자신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을 보고 무엇인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폭력을 외면할 수도 있다.

151~152쪽 중에서

매일. 매달, 혹은 매년 신문지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가장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소식이 실리지 않을 때가 없다. (...) 처음 줄부터 끝줄까지, 모든 신문들은 공포에 질릴 만한 소식투성이이다. 군주들, 국가들, 사적 개인들이 저지른 온갖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온 세상에 판치는 잔악 행위 등등. 문명화된 인간은 매일 이 메스꺼운 전채로 아침식사의 식욕을 돋운다.

159쪽

사진 속의 죽은 병사들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우리’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반응형

'북 카페 > 한 권의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0) 2020.09.17
한강: 노랑무늬영원  (0) 2020.09.15
무국적 요리  (0) 2020.09.13
환자혁명  (0) 2020.09.12
고난이 선물이다  (0) 2020.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