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인류의 교사’, ‘러시아의 대문호’, ‘전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톨스토이는 인생의 황혼, 마지막 몇 년 동안 책 한 권을 책상에 두고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도 그 책을 침대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살면서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내용을 담은 모음집을 만들 계획이 있네.”라고 체르트코프에게 보낸 편지에 밝히고 있듯이 그 책은 바로 톨스토이가 소설 쓰기를 멈추고 생애 마지막 독자들에게 남긴 편지였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1902년 톨스토이는 폐렴과 장티푸스로 몇 달 동안이나 사경을 헤맸다고 한다. 그 시절 항생제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죽음과 매우 가까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기적처럼 질병으로부터 벗어났던 그는 그 기적을 통해 날마다 좋은 글을 읽는 것이 축복임을 깨달았다. 좋은 습관의 필요함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이후 명상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편지에는 생 그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인간의 행복, 사랑, 말, 행동, 진리, 거짓, 영혼, 믿음, 노동, 고통, 학문, 분노, 오만, 신 그리고 삶과 죽음. 그리고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경험했던 인생에서 깨달은 지혜를 책 한 권으로 담았다. 나의 프로필 사진인 톨스토이의 “살아갈날들을 위한 공부”다.
살아갈날들을 위한 공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가까이에 느끼는 것부터 시작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죽음을 묵상할수록 삶은 더 또렷해지기 마련이다.
톨스토이가 아내의 생일에 준 깜짝 선물이 이 작품이었다고 한다면 너무나 엉뚱하고 짖꿎은 것일까?
“여러분,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로 시작되는 소설이 유쾌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톨스토이의 아내가 생일 선물을 반가워했듯 나 역시도 이 작품을 다 읽고 곱씹으며 이 책이 '생일에 주는 선물'로 굉장히 의미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이야기의 착상은 실화에서 왔다. 톨스토이의 영지 가까이에 있는 툴라라는 도시에서 1881년 이반 일리치 메치니코프란 이름을 가진 판사가 아직 젊고 한창 일할 나이에 위암으로 죽었다. 톨스토이는 판사의 판결로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는 사람과 그들을 멀리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가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했다. 톨스토이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 죽음의 판결을 받게 됐다는 것을 골격으로 착안하게 됐다.그래서 처음에는 제목이 ‘판사의 죽음’으로 하려고 했으나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게 됐다.
프랑스 작가 드 모파상은 이 소설을 읽은 뒤 이것이 그가 죽기 전에 읽은 최후의 문학작품이라고 말했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무의미하며 내가 쓴 열 권의 책 역시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 모파상
그가 극찬했던 이 소설은 이반 일리치가 죽었음을 알리면서 시작된다.
소설에서도 여러번 언급되지만 사람은 모두 죽기 마련인데 한 사람이 죽은 것이 뭐 대수일까? 그런데 어쩐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가끔씩 죽음을 생각하며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과연 누가 슬퍼할 것인가를 떠올린다. 사람은 죽고 난 후에야 더 잘 보인다는데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걸까?
이반 일리치는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마흔다섯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관리의 아들이었던 그는 똑똑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법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출세와 성공의 가도를 바쁘게 달려왔고 결혼해서 딸과 아들도 두었다. 하지만 부부의 사이가 각별하거나 행복하지는 않았다. 사소한 문제로 자주 다투었고 결혼생활은 그저 표면상으로나 완벽하게 보이면 될 뿐이라 여겼다. 그가 유일하게 즐긴 놀이는 친구들과 얼마의 돈을 걸고 하는 카드놀이가 전부였다.
이반 일치리는 결혼이란, 인생은 원래 그래야만 한다고 자신이 믿는, 편안하고 기분 좋고 즐겁고 늘 고상한 생활, 즉 상류사회의 지지와 동의를 얻는 생활 방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튼튼하게 지탱시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달콤한 환상은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65쪽
어느날 돈을 더 벌 수 있는 자리가 생겨서 이사를 했고 이반은 새집에서 커튼을 달려고 올라간 사다리에서 살짝 떨어지는 사고로 인해 옆구리에 혹이 생긴다. 이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이 발생한다. 본인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가족들도 그의 병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점점 입안의 쓴맛을 느끼고 먹지 못하면서 서서히 죽음으로 다가간다.
커다란 법원 건물, 멜빈스키 사건을 심리하던 재판관들과 검사가 휴정 시간을 이용해 이반 예고로비치 셰베크의 집무실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화제 삼아 대화를 나누었고, 대화의 주제는 어느새 그 유명한 크라소프 사건으로 옮겨 가 있었다. 표도르 바실리예비치는 한사코 크라소프 사건은 결코 사법부에서 관할할 일이 아니라고 증거까지 대가며 이야기에 열을 올렸고, 이반 예고로비치 역시 표도르 바실리예비치의 의견에 팽팽히 맞서며 조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한편 처음부터 두 사람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은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그들의 열띤 공방에도 전혀 아랑곳없이 방금 배달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여러분”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 -책 시작하는 첫 문단
이반의 정확한 병명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어떻게 죽음의 선고를 받아들이는지 그 과정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의사의 말도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병이 진전되고 패닉 상태를 거쳐 결국에는 죽음의 임박을 자각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판사였던 그는 의사가 병을 선고하는 일을 자신이 늘상 해왔던 법정의 선고와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무수한 사람들에게 선고를 내렸던 이반이 이제는 의사에게 재판을 받고 죽음을 선고 받고 있었다.
의사는 이반 일리치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오직 유주신과 맹장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반 일리치가 보는 바로 앞에서 맹장염 쪽으로 가닥을 잡음으로써 자신의 고민을 해결했다. 단, 소변 검사를 해보아서 새로운 증거들이 나오면 재검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모든 것들은 그 하나하나가 이반 일리치 자신이 피고들을 대할 때 수천번도 더 넘더록 써먹었던 방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의사 안경 너머로 환자를 바라본 후 엄숙하게, 심지어 얼핏 쾌활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자신의 결론을 멋지게 요약했다.의사에게 들은 간략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반 일리치는 현재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동시에 자신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의사에게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이며, 아마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자 그의 마음속에 자신을 향한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또한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 앞에서 냉혹할 정도로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의사에게 크나큰 적개심이 일었고, 가슴 아프도록 고통스러운 충격에 휩싸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95페이지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얻게 될 자신의 이익에 주목했다. 그의 동료들은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들은 하나같이 타인의 죽음일뿐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고 죽음이 나에게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반의 부인 역시 남편의 사망으로 받게 될 연금과 국가 지원금을 계산하고 있었다.
사실 이반은 죽기 전, 질병으로도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 주변인들의 거짓된 태도때문에 더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잠시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하인 게라심과 함께 할 때였다. 마지막까지 고통스럽게 몸부리던치던 이반에게 유일하게 편안함을 주는 것은 게라심이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이자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 철학에는 대가없는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을 통해 이반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죽음 또한 맞이할 수 있었다.
“메멘토모리”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게라심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제가 나리를 위해 수고 좀 못 하겠습니까?”
그는 이 말을 통해 ‘자신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수고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으며, 또 언젠가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서도 똑같은 수고를 해주기를 바란다’는 속내를 내비치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137페이지
또 한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아들은 죽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아 자기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이반 일리치는 한줄기 빛을 발견했고 그 빛은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살았고 잘못을 바로 잡을 기회가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평생 출세와 성공 그리고 화려한 생활을 목표로 달려왔던 그는 죽음의 문 앞에서 처음으로 뒤를 돌아다보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마지막 마음조차 가족들에게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아편에 의지하다 생을 마감하는 이반.
소설에서 의사들이 병명을 알지 못하고 의사마다 소견이 다르다는 부분이 계속 나오는데 그것은 톨스토이가 의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평소의 불신이라고 여겨진다. 이반 일리치가 새집을 꾸미는 일에 얼마나 행복했는데! 아픈 뒤에도 죽음을 앞두고도 그 단장한 집을 보면서 흐뭇했었건만. 그 집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병을 얻다니.
똑똑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던 이반의 가족은 행복이 매우 가까이 있었음에도 그 행복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더 화려하게 부자처럼 보이기 원했고 모든 에너지를 허영심을 채우는데 다 소비하느라 정작 가장 사랑해야할 자신과 가족들을 가까이하지 못했다.
새집은 꾸몄지만 새집에 함께 할 가족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반에게 유일한 기쁨이 친구들과 하는 카드놀이였다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무엇때문에 사는가?" 한참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죽기 직전에, 아들이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그때는 정말이지 “용서해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용기내줘”라는 엉뚱한 말을 남기는 이반을 보면 잘못을 깨닫기도 힘들지만 만회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은 늘 맞닿아 있다. 단지 사는데 급급해서 죽음의 존재를 잊을 뿐이다. 죽음을 묵상하는 사람은 우울하지 않다. 죽음을 느낄수록 삶은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또 "어떻게 죽어야할까?"
타인의 죽음앞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었나? 앞으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책 속에서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부분을 나누며 책을 덮는다.
나는 지금까지, 키제베터의 논리학에서 배운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유명한 삼단논법의 일례가 카이사르에게나 해당하는 진리였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120쪽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죽는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121쪽
그리고 무엇보다 기분이 나쁜것은 죽음이 그를 자꾸 죽음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이란 놈은 그에게 무슨 일이든 하도록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은 채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며, 그것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124쪽
모든 것을 꿰뚫고 치고 들어오는 죽음을 막아설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124쪽
결국은 죽음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순간, 그때는 기쁨으로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그의 눈앞에서 허망하게 녹아내리면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더러는 구역질 나도록 추한 것으로 변해 버렸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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