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사랑하러 갑니다
박완서 외 9명의 작가들
열대는 건기와 우기 딱 둘로 나뉜다. 마치 사랑처럼 말이다. 작열하는 태양, 혹은 미친듯이 쏟아지는 폭우가 그렇다. 두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하는 이들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초록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같은 게 있었던 때를 생각하면 로망의 실현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젠 초록이라면 한때 늘 입에 달고 살던 콜라 맛 츄파츕스처럼 물려버렸다. 저멀리 초록빛 야자수가 바람에 흔들리기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
사랑도 그렇다. 마치 내가 사랑이란 걸 했던 적이 있었을까? 혹은 ‘과연 그게 사랑이었을까? 척했던 건 아니고?’ 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엔 더 그러하다. 너무 아득해서 선사시대, 그 어느 즈음에 내가 사랑을 했던 것 같은 기분이다.
로망의 빈자리는 냉큼 얄미운 현실이 어느새 꿰차고 앉아서 낭만의 시대는 가고 실용주의 시대가 왔다. 사랑은 가고 추억만이 남은 일상을 겨우겨우 이승철의 목소리로 어찌 해보려 하는 찰나 사랑에 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 우체통에 연애 편지는 없고, 각종 카드 고지서만 날아드는 시절에 사랑이라…..-
작가의 말( 유춘강)
사랑이라는 단어만 던져주어도 일반적으로 모두 할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소재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도 밤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의 이야기가 그 분량의 이야기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사랑이란 걸 드라마와 연애소설로만 알았던 시절에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괜스레 잠을 자기 싫을 정도로 설레기에 충분하였으니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존재인듯하다.
그런 사랑의 이야기라니 어찌 재밌지 않을까. 9명 작가의 사랑 이야기가 모두 다 다양한 색깔로 저마다의 색을 빛내는 이야기다. 누구나 열정적인 색으로 통하는 붉은색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듯 사랑도 그러하지 않을까. 사랑 이야기는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그땐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그때 그 애절했던 사랑의 감정은 어디로 증발하고 남은 것은 덤덤한 기억일 뿐이다. 그 기억 속에 사랑의 빛깔은 퇴색되었는지 몰라도 한때 사랑했던 추억까지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나는 사랑하러 갑니다저자박완서, 우애령, 유춘강, 유덕희, 김정희, 권혜수, 노순자, 박재희, 이남희, 조양희출판예감발매2010.02.25.
박완서/ 그 여자네 집
2019년 3월에 읽은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수록되었던 책. 정말로 만득이는 곱단이를 못 잊었을까?
내가 곱단이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건 순전히 우리 집사람이 지어낸 생각이에요. 난 지금 곱단이 얼굴도 생각이 안 나요. 우리 집사람이 줄기차게 일러 집어 주지 않았으면 아마 이름도 잊어버렸을 거예요.
배우자의 과거, 배우자가 사랑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틀 속에 갇혀서 평생을 그런 상상(?)을 키우며 남편을 믿지 못하고 살지는 않았을까 싶다. 이런 스토리가 주변에 종종 있다. 심해지면 의처증이나 의붓증이 생기는 일종의 병인데 이건 누가 말릴 수도 없는 것이고 스스로 행복을 버리고 불행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우애령/정혜
이 책은 영화 <여자 정혜>의 원작 소설이다. 열세 살에 친척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평생 트라우마로 마치 조명이 꺼진 무대에서 살아가는 정혜의 이야기. 그녀는 우체국에서 일하며 단조롭지만 나름 규칙적으로 혼자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다. ‘아무에게도 신세 지지 않고, 아무에게도 이용당하지 않고..’ 그녀의 좌우명만 봐도 그녀의 삶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체국에서 원고를 보내는 무명작가 김준석이 던진 한 마디 “옷 색깔이 참 좋군요” 그 말이 그녀의 건조한 일상생활에 가벼운 진동을 준다. 그녀의 삶에서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어본 기억이 없는 정혜. 그리고 몇 주 후 다시 우체국에서 만났을 때 정혜의 심장은 뛰게 된다. 마음의 빗장이 조금 열린 정혜는 용기를 내서 그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지만 그는 오지 못하고 그로 인해 정혜의 마음의 빗장이 다시 닫힐 것 같다. 자기의 인생을 다 부서뜨린 가해자는 지방 유지가 되어서 행복하게 잘 사는데 정작 피해자인 자신은 우울하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정혜가 과연 과거를 벗어 나와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유춘강/러브레터
따뜻한 사랑 vs 뜨거운 사랑
평범한 사랑 vs 운명적인 사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오류가 사랑에 대한 환상이 아닐까 싶다.
그녀도 그랬다. 늘 자신의 옆에서 있어주는 친구 이준보다는 얼굴도 모르는 동경에 산다는 남자 야스무사가 더 가슴을 뛰게 한다고 느낀다. 몇 번 주고받은 이메일로 일본까지 가서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결국 그녀가 만난 것은 야스무사가 자살한 뒤 이메일을 대필해 준 친구였다. 이런 블라인드 사랑에 대한 환상은 실제 여행 중에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일상이 아닌 곳에서 만났을 때 사람은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왜 내 사랑은 특별해야만 되는 것일까.이제 나는 누군가를 만날 시기를 벗어난 자의 여유로움으로 평범하고 익숙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너무 뜨거우면 더 금방 식는 것을 느끼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덕희 /엄마는 베네치아로 떠났다
문득한 불길한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지.
인도를 방랑하는 중에 느꼈던 불안함이 그대로 적중했다. 엄마가 죽었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 그리고 두 사람에게 각자의 다른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평생 엄마를 용서할 수없고 방황하게 했다. 그런데 엄마가 일방적으로 가버렸다. 교통사고라 했지만 엄마는 사랑하는 남자와 마지막까지도 함께 하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다. 어려서부터 버려짐에 대한 상처가 컸는데 엄마는 죽어서까지도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 버림받은 자, 사랑을 거부당한 자가 짊어져야 할 슬픔의 무게는 죽음 보다 더 무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김정희/바람 부는 날 우체국 가는 길
바람 부는 오후엔 바바리코트 깃을 펄럭이며 신촌이나 대학로의 붐비는 골목 어귀에 서 있어야 한다. 실패한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더욱 좋다. 눈물을 머금은 채 행인들을 바라보라. 아직 젊은 그들이 걸어 다니기 위해 걸어 다니는 것을 성심성의껏 지켜보라. 당신의 시선에 도취되어 그들은 더욱 활기차게 걸을 것이다. 그들은 첫사랑의 한가운데 서 있다. 당신은 두 손을 꼭 맞잡은 그들이 지나간 후에 자신의 늙고 추레함을 발견하고 치밀어 오르는 슬픔 때문에 옅은 미손을 지을 것이다. 가끔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시작된 것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빛을 향해 뛰쳐나오던 차디찬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예고도 없이 첫사랑이 다가왔던 달콤하고 따뜻한 순간이었다고. 인생이 쓰디쓰다는 것을 알기 전의 당신은 첫사랑의 찬란함에 매료되어 어수룩한 눈동자로 관대하게 세상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125쪽
신촌, 대학로라는 지명만 나와도 어느 시점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심쿵한다. '너는 내 인생의 전부'라 말하던 시절이 있었더랬는데 어느 날인가 이런 대사를 나의 자녀에게 듣게 된다면 그렇게 나는 늙어가는 것이되리라. 홍익문고, 그랜드 백화점 그 시절의 추억의 장소들이 하나씩 간판을 바꿀 때 이렇게 빨리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아쉽다는 작가의 글귀에 나도 내 추억의 장소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랑도 그렇게 바뀌어 버린 간판처럼 추억으로 머물렀다가 또 어느 날인가 소환된다. 바람이 부는 날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라니.. 아 옛날이여
권혜수/길은 가야 한다
아버지의 내연녀와 살아가는 나. 내가 아니면 기저귀 하나 바꿀 능력이 안되는, 온전히 나에게 맡겨진 그녀의 인생을 나는 손에 쥔 채 악몽 같은 그녀와의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포르노 작가를 벌이로 생활하며 죽음조차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이 깊이 엮여버린 두 사람의 운명공동체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본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휠체어를 타고 대소변을 가릴 수 없게 되기까지, 그 인생을 오로지 타인의 증오와 자비심에 의지하게 되기까지, 그 고통의 근원은 과연 어디일까.
171쪽
사랑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며 삶도 아름답기만 하겠는가. 사랑은 내가 수고를 하는 것이다. 그게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간에 내가 누군가를 책임지고 같이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내 분노가 정당하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내 증오도 정당하다고 나는 외칠 수 있다. 그러나 정당한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증오와 분노에도 지쳐 껴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운명도 우릴 버리고 신도 우릴 외면했다면 남은 것은 그녀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81쪽
사랑에 무게를 잴 수 있다면 이 사랑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용서할 수도 없는 상대를 용서하지 못해도 끌어안아주어야 하고 사랑할 수 없어도 손을 잡고 가야 하는 길이 있다면 그녀는 묵묵히 그 길을 가려고 한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꿈에서도 칼을 겨누고 싶은 상대를 칼이 아닌 밥숟가락을 내밀며 가장 추한 것까지도 받아내며 안아줄 수 있을까.
노순자/착각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만큼 가능한 것인가? 사람이 사람을 봐 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분량은 또 얼마나 될까?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염치라는 게 도무지 없는 아내를 그래도 아이의 엄마라고 정나미가 떨어진 것도 내색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아내가 용서를 빌 거라 생각했던 것은 그 남자의 착각이었다. 어쩌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 조차도 착각은 아니었을까
박재희/백학
어제저녁 송별연에서 영서는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골랴는 단 한 곡 ‘백학’을 불렀다. 어찌나 정성 들여 부르는지 사람들은 꺽다리 러시아인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라도 놓칠까 봐 상체를 세웠다.( …..) 그 금강석 같은 단어가 온몸에 박히는 것을 느끼며 영서는 전율했다. 그녀가 아는 한 그에 버금가는 선물은 이 세상에 없었다.
231쪽
백학은 유명한 러시아의 민요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드라마 “모래시계” 때문에 사랑받은 곡이기도 하다. 러시아 글자로 zuravli (주라블리. 백학- Cranes)
만남은 진양조로 해도 이별만은 자진모리로 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이별의 자리는 늘 한배(속도)를 잊고 축축 늘어지기 일쑤다
러시아 여행에서의 짧은 인연도 어떻게 생각하면 사랑의 감정일 수 있을까. 잠시라도 설레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말이다. 아~백학을 부르는 러시아인의 모습이라~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누가 나를 위해서도 백학을 불러주었으면.
https://www.youtube.com/watch?v=JYX9lpQWv6E
이남희/어두운 열정
이 책이 출간할 때 동성애를 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작가는 세상이 변했듯이 성의 개념도 변해간다고 이야기한다. 원래의 성이 생식을 위한 것이었다면 피임의 발달 이후로 성은 놀이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여름에 말이죠. 왜 날 만나려고 했어요? 혹시 내게…… 그걸 기대했었나요?"
순간 최 여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으나 곧 활달한 미소가 대신 나타났다.
"그거? 섹스 말인가요? 왜요? 생각 있어요?"
은명은 얼굴이 빨개졌다. 성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녜요. 난 여전히 성욕에선 대상이 필요해요. 개별성을 고집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같이 자고 싶어 하는 상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저 어떤 개인적인 한 사람이라는 뜻이죠……."
252쪽
조양희/ 빈사의 백조
마지막 소설이 이 책의 이야기 중 가장 가슴 아프다. 작가가 실화를 취재하여 쓴 소설로 의사의 오진으로 아내를 잃은 사건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병원은 의료사고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진료 기록을 없애고 오진을 부인하지만 남편은 억울하게 죽은 아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고발한다. 남편 재욱은 대학 시절에 발레를 전공한 아내 미영을 만났다. 백조같이 유연했던 미영은 산부인과에서 받은 소파수술이 잘못돼서 범발성 복막염이 유발하였고 빨리 손을 쓰지 못해서 사망까지 이르게 되었다. 실제로 젖멎이를 두고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야 했던 이 사건은 그래서 승소했을까? 승소했기를 바라본다.
사랑..
왜 ‘지금 사랑하러 갑니다’라는 제목이 붙었는지 알겠다.
사랑은 잠시 머물러 간 감정이기도 하지만 아주 오래 그 감정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행동이기도 하다. 우린 그것을 그저 '사랑'이라고 동일하게 부르지만 저마다 다른 빛깔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있다. 나도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야지 생각하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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