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고 신영복 교수의 책이다.
옥중에서의 편지를 모아서 엮은 책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고, 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 <더불어 숲>인데 이 책은 성공회 대학 교수로 강의를 했던 녹취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마지막 강의인 셈이다.
강의록을 책으로 내면서 강의실 밖으로 떠나서 다닐 책이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 걱정이 된다는 서문의 이야기에 신영복 교수가 책을 집필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의 책을 그냥 한번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강의다. 20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터득한 삶의 철학은 일방적으로 혼자 하는 강의가 아니라 학생과 교수가 함께 사고하는 소통의 강의다. 강의를 들어보면 많은 학문과 공부로 진정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 오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 그대로다. 70이 넘은 노학자의 언어는 겸손한 언어, 존중의 언어, 공감의 언어다. ‘시대의 스승’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출소 후 1년 뒤부터 성공회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정년퇴임 후에는 석좌교수로 특강을 하며 25년간 강의를 한 신영복 교수가 마지막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평생을 공부하고 강의한 노학자의 ‘공부’에 대한 철학을 본받아서 그런 마음으로 듣는다면 배울 것이 많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14쪽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동양 고전 독법’을 통해 관계론의 사유로 인식하는 세계사를 이야기한다. 동양 고전의 사상은 무엇보다 인간 중심이다. 선생의 바탕이 동양 고전에서 왔다. 그러나 동양 사상을 들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세계를 인식하는 유연한 사고의 틀이다.
첫 강의는 <가장 먼 여행>으로 시작한다. 공부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공부의 시작이다. 고전 공부는 고전 지식을 습득하는 교양학이 아니라 인류의 지적 유산을 토대로 하여 미래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실천이다. 텍스트를 읽고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이어야 한다. 완고한 인식틀을 깨는 공부,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인 실천으로 마무리하는 공부.
[시경]에서는 세계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진실’을 담는 것이다. 개념이 아닌 감수성으로 세계를 담는다. 학부 강의에서는 끝나기 5분 전에 그날 강의의 요지를 적게 한다고 한다. 안다는 것은 복잡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즉 시적인 틀에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역]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관계론, 다양성을 존중하는 [논어]의 화동 담론, [맹자]를 들어 설명하는 사회의 본질인 인간관계, 자연을 기반으로 하고 민초의 정치학인 [노자 사상], 기계보다 인간을 중시하는 [장자]의 인간학, [묵자]의 겸애사상.
무감어수(물에 비추어 보지 마라)의 원전은 묵자다. 묵자는 전쟁과 전쟁 문화에 대해 비판한다.
신영복 교수가 설명한 고전 중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이 [한비자]다.
[한비자]는 10만 자의 방대한 책이다. 노자가 5천 잔, 논어가 1만 2천 자, 맹자는 3만 5천 자, 장자가 6만 5천 자다. 그만큼 한비자에는 많은 예화가 담겨 있는데 그 방대한 양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통찰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감옥 독방에서 읽었던 기억을 되새겼다. 예화 중 하나만 담자면 신발을 사러 간 정 나라의 차치리라는 사람은 신발을 사러 갈 때 직접 신어보지 않고 두고 온 ‘탁’을 가지러 집에 돌아갔다. 시장에 왔을 때 장이 닫혀서 신발을 살 수 없었다. 그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자신의 발은 믿을 수 없다는 한 말이 압권이다. 눈앞에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현실을 본뜬 ‘탁’을 찾는 것을 비판하는 예화다.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1부의 산을 넘으면 2부는 그래도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다. 2부는 신영복 교수가 통학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 받고 그 후 무기수가 되어 20년 20일의 수형생활을 하면서 느낀 마음들, 만난 사람들 그 안에서의 이야기들을 나눈다. 옥중 서신으로 알려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수형소 밖으로 보내는 편지였다면 이 책은 실제로 감옥에서의 사색이 담겨있고 특히 편지에 담지 못하고 담았다가도 검문 때문에 걸려서 빛을 보지 못했던 내용도 담겼다. 이야기는 '청구회 추억'으로 시작한다. 신 교수는 감옥에 가기 전 '토요일 오후 5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아이들을 만나왔다. 감옥에 온 뒤로 그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없어서 안타깝고 미안했다. 그 마음을 담아 쓴 기록이 '청구회 추억'이다. 교도소에서는 볼펜도 회수하고 노트도 없었기 때문에 재생 휴지에 볼펜을 얻어 청구회 기록을 써 내려갔다. 그 글을 적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고 한다. 그 메모는 교도소 이송 때 짐을 소유할 수 없어서 헌병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부모님께 부쳐졌고 출소 후에 나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청구회 추억을 기록하던 시기는 그의 수형 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던 시기였다. 함께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사형이 다 집행되는 시기였으니 마지막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이의 심정이 담겨있다. 그때 유일한 위안이라면 교수형 보다 총살형 받기를 바라는 것 하나였다.
감옥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사회학 교실이었고, 역사 현장의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역사학 교실이었고 사람을 공부할 수 인간학의 교실이었다.
교도소는 변방의 땅이며 각성의 영토입니다. 수많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있고, 성찰의 얼굴이 있고, 환상을 갖지 않은 냉정한 눈빛이 있습니다. 대학입니다.
274
지난번 신영복 교수의 책을 소개하며 그가 처음 세상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심정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리뷰를 쓴 기억이 난다. 신교수의 한 친구는 감옥에 나오자마자 여행 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계획을 세워주었지만 20년 자식을 옥발이 한 부모님을 생각하면 도저히 떠날 수 없었기에 두 분이 다 돌아가신 뒤에야 여행을 시작한다. 감옥에 있는 자식 생각에 20년을 한 시도 편하게 마음을 가지지 못했을 부모의 마음과 또 자식의 송구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품성을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단연 ‘양심적인 사람’을 뽑는다. 양심은 관계를 조직하는 장이고 인간과 세계를 아우르는 최고 형태의 관례론이면서 동시에 가장 연약한 심정에 뿌리내리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품성이라는 것이다.
강의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당부한다
자살하지 않는 이유와 살아가는 이유.
수형소에서 자살하는 사람을 보며 무기징역을 살아오는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를 고민할 때 그것은 ‘햇볕’때문이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간다. 길어야 두 시간이고 가장 커 봐야 신문지 크기지만 한 햇볕을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절정이라는 것. 그러면서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햇볕 때문에 아랍인을 죽였다는데 자신은 그 햇볕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루 40명이 자살하는 사회에서 교도소의 무기징역으로 햇볕 때문에 자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고백을 들으니 매일 쏟아지는 햇볕을 기다리고 감사해 보았던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다. 한 뼘의 햇살과 매일의 공부와 성찰이 있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살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어려운 고전도 강의도 다 잊어버릴 것 같으나 햇볕과 성찰로 하루하루 살아왔다는 고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당부는 잊지 못할 것 같다.
책 속으로
*나는 20년의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p10
*위로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위로는 전체의 구도를 보수적으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게 된 여러 가지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적극 의지를 기피하는 대응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기존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자위보다는 신랄한 자기비판이 더 필요합니다. 냉정한 자기비판은 일견 비정한 듯하지만 자기를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서바이벌의 가능성을 훨씬 높여줍니다.
P47
*연대는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대입니다.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입니다.
p141
*무릎 위에 달랑 책 한 권 올려놓고 하는 독서. 며칠 지나지 않아서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시루에 물 빠져나가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하지만 사오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야 이미 읽은 책이란 걸 뒤늦게 알아차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책 제목마저 기억 못 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독서가 독서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화분 속의 꽃나무나 다름없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실천’이 제거된 구조입니다.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한 발 보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p233
*세월도 많이 흘렀고 외모도 변했지만 인간적 자질이라든가 생각하든가 틀 이런 것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왈칵 겁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불안했습니다.
P248
어느 감방이든 감방마다 ‘싸가지 없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씩 있습니다. 싸가지 없는 사람이란 무례하고, 경우도 없고, 하는 짓이나 하는 말 어느 것 하나 밉지 않은 구석이 없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사회라면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징역살이는 다른 곳으로 피할 수도 없습니다.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저 자식 만기가 언제지? 얼마 남았지?’ 드디어 그 친구가 출소하고 나면 참으로 행복한 밤을 맞이합니다. 앓던 이 빠진 듯 시원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행복한 날도 며칠 뿐, 어느새 그런 사람이 또 생겨납니다. 나가면 또 생기고, 나가면 또 생기고...여러 사람을 보내고 난 다음에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이 그런 표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처한 혹독한 상황이 그런 공공의 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p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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