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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한 권의 책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by 북앤라떼 2020. 10. 2.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드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돌려놓으라.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이 책은 서른여섯의 나이에 폐암에 걸려 한 살이 되지 않은 딸과 아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신경외과 의사의 회고록이다. 폐암 판정을 받고 죽기까지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폴은 1977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했고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삼촌, 형 모두 의사지만 의사를 고려한 적이 없었던 폴 그러나 자신이 탐구한 학문의 교차점에 있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해 그 역시 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 졸업 후 모교인 스탠퍼드로 돌아와 신경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연구원으로 일했다. 연구 성적을 인정받아 최우수 연구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중 최고의 의사로 손꼽히고 여러 대학에서 교수 자리 제안을 받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그 완벽한 타이밍에 샴페인을 터뜨리려는 때에 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 얼마나 짓궂은 장난인가.

나는 CT 정밀검사 결과를 휙휙 넘겼다. 진단은 명확했다. 무수한 종양이 폐를 덮고 있었다. 척추는 변형되었고 간엽 전체가 없어졌다. 암이 넓게 전이되어 있었다. 나는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마지막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난 6년 동안 이런 정밀검사 결과를 수없이 검토했다. 혹시나 환자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지만 이번 검사 결과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 사진은 내 것이었다.

20쪽

암 판정을 받기 전에도 폴은 삶과 죽음,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많이 해 왔다. 그러나 문학으로는 죽음의 의미를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의사의 길을 선택했고 의사로서도 환자의 입장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폐암을 발견하게 되었다. 6년 차던 2013년 5월에 폐암이 발병하였으나 항암치료를 받으며 힘들지만 약을 먹으며 7년 차 수련의를 수행하던 중에 암이 더 확산되어 2015년 봄에 생을 마감한다.폴이 살아있다면 나와 비슷한 또래,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라는 가까운 곳에서 떠난 한 젊은 의사를 보며 마치 암이 진행되는 과정처럼 나도 폴의 행동을 보며 ‘나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폴의 삶을 주목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암 판정 후 시험관 시술로 자녀를 낳으려고 서두르는 부부를 보면서 삶의 의지를 보게 된다. 물론 폴과 아내 루시는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될 줄은 추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에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옳은 일일까? 혼자 딸을 키워야 하는 루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도 했지만 만약 나였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나 사이에 아이가 있음이 그를 떠나보내고 그래도 살아가야 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내 루시도 내과 의사였다. 의사 부부는 너무 바빠서 사실 암 발병 전에는 부부 사이에 갈등도 있었다. 그러나 루시는 이후 폴을 더 사랑하게 됐고 아내로서 의사로서 폴 옆에서 끝까지 폴을 지지하는 한 사람이 되어주었다.

두 번째는 폴이 항암치료를 하면서 쓰러지는 순간이 오기까지 그 시간을 의사로서 살았다는 점이다. 건강한 몸으로도 피곤하고 지치는 의사의 스케줄을 평소 하던 대로 하는 폴을 보는 것은 너무 안타까웠다. 더 나아갈 목표가 있을까? 남은 시간에 주변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저런 스케줄이라면 당해낼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의연하지?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면서 폴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폴은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 그저 똑같이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는 “I can’t go” 대신에 “I’ll go on”으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환자를 위해 죽음에 맞서 싸워야 했던 의사가 정작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임박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폴의 태도를 보면 삶과 죽음이 얼마나 경이롭고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숙연해진다.마지막에 목에 삽관을 해야지 생을 유지할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폴은 삽관을 거부한다. 즉 자발적인 죽음을 선택한다는 의미다.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평소 고찰해 온 폴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가족들이 존중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그가 남긴 것들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수술했던 뇌 수술 환자는 영원히 폴이 죽는 순간까지도 생명을 살리고자 했던 의사로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것의 의미를 책을 읽는 중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리뷰를 쓰면서 이제야 ‘그 의미’가 보인다. 안타까운 나이에 정말 공부만 하고 수련만 하다 아내와도 한번 편안하게 쉬어보지 못한 그가 왜 그렇게까지 병원에서 환자가 아닌 환자를 돌보고 살리는 일에 목숨을 걸었는지를, 그것이 그의 마지막 발자국임을 알게 되었다. 생을 걸어가며 남길 발자국. 누군가가 그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멈추지 않고 그 발자국을 계속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 폴에게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큰 의미로 남았다.

폴이 마지막 수술을 위해 손을 씻을 때 그는 지겹도록 반복했던 그 일상의 행동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직감을 한다. 그때의 손 씻음과 수술은 어땠을까? 그 이후 집으로 돌아간 폴은 어쩌면 마무리할 수 없을지도 모를 유한의 시간을 이용해 이 책을 위한 글을 쓰는 일을 이어간다. 실제로 폴은 이 책을 마무리하지 못했고 아내 루시가 덧붙여서 마무리를 했지만 그 책을 이어갈 사람들은 다음 독자들로 남겨두고 떠났다. 이 책은 그래서 미완성이지만 어느 책 못지않게 의미가 있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을 위해 더 유익하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기록이 가져올 영향이 아니다. 그저 기록해 놓는 것 까지다.

폴은 어려서부터 문학소년이었다. 죽는 날까지 그는 T.S 엘리엇의 글귀를 읊었다.

웹스터는 너무도 죽음에 사로잡혔기에

피부밑에 있는 두개골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땅 밑의 가슴 없는 존재들이 입술도 없이 활짝 웃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T.S 엘리엇<불멸의 속삭임>

나도 책을 매일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만 죽는 순간까지 글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마음은 그러고 싶다. 그럴 수만 있으면 좋겠다.

인문학은 그의 의사 철학의 기본 바탕이었다. 그는 환자의 생사가 걸린 문제를 지식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늘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덕적 명확성과 지혜를 지식과 함께 생각하며 환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했다.

가장 잘 죽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내가 살아온 시간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대청소를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정리라는 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학창 시절에 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유서를 써 보라고 하셨다. 수업이니까 유서를 써야 했지만 철없던 나이에 유서를 쓰기 위해 억지로 감정을 복받치게 하려고 죽음을 상상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예전에 어떤 분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여행을 가거나 집을 비울 때 항상 마지막 뒷모습처럼 정돈을 하고 가신다는 이야기였는데 정말 교통사고로 예고 없이 떠나시게 되었다.

그 뒤로 가끔 이 정돈되지 않는 내 상황이 마지막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면 누가 나의 짐들을 다 정리를 해 줄까 걱정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폴을 보면서 그냥 마지막까지 죽는 날처럼이 아니라 살날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 속에서의 글귀들

졸업이 가까웠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가 너무 많아 여기서 공부를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스탠퍼드의 영문학 석사 과정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나는 언어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언어는 고작 몇 센티미터 두께의 두개골에 보호받는 우리의 뇌가 서로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삶의 의미와 미덕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인생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적 측면, 즉 ‘인간의 관계성’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뇌와 신체 그 자체의 생리적인 명령에 따라 일어나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열정, 갈망, 사랑 등 우리가 체험하는 삶의 언어가 신경 세포, 소화관, 심장박동의 언어와 연관되는 뭔가 복잡한 방식이 틀림없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책 54쪽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P91

나는 한 산모에게 그녀의 갓난아이가 무뇌아여서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알린 후 차를 몰고 집으로 가면서 라디오를 켰다.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이 캘리포니아에서 계속되고 있는 가뭄을 보도하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런 순간에 환자와 함께하는 건 분명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왜 내가 이 일을 하는지,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의문을 품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생명을 지켜줘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이 일의 신성함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수술에 헌신적인 노력에는 큰 대가가 따랐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실패는 참기 힘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부담감은 의학을 신성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영역으로 만든다. 의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P 107

내 삶은 그동안 잠재력을 쌓아왔으나 그 잠재력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정말 많은 걸 계획했고 그 계획이 곧 성사될 참이었다. 내 몸은 쇠약해졌고 내가 꿈꿨던 미래와 나 자신의 정체성은 붕괴되었으며, 내 환자들이 대면했던 실존적 문제를 나 역시 마주하게 되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하는 동안 무척이나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P 127

서른여섯 살에 폐암에 걸릴 확률은 0.0012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서른 여섯 살에 폐암에 걸릴 확률은 0.0012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P138

그때 문득 내가 저질렀던 실수들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나는 한 가족에게 아들의 생명 유지 장치를 떼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2년 후 아이의 부모가 나를 찾아와 아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아들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컵케이크를 주었다.

p142

14세기 철학에서 환자라는 단어는 그저 ‘행동의 대상’을 의미했고 나는 딱 그런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의사였을 땐 행위의 주체이자 원인이었으나 환자인 나는 그저 어떤 일을 당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p146

죽음의 단조로운 황무지에서 방황하던 나는 수많은 과학 연구들, 세포 내 분자 통로, 생존 통계의 끝없는 곡선에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결국 다시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죽음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정의하고 다시 전진하는 방법을 찾는데 도움이 될 어휘를 찾고 싶었다(...) 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p152

죽음은 단 한 번 있는 일이지만,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는 건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다. 나는 문득 내가 슬픔의 5단계(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를 이미 다 겪었지만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p164

암 진단을 받은 지 9개월째 나는 어떻게든 레지던트 생활을 끝내려는 마음에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까지 수술을 했다. 몸은 크게 축나고 있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밥 먹을 힘조차 없었다. 나는 타이레놀과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제, 구토 방지제의 양을 서서히 늘려갔다. p165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엄청난 일이란다.

p199 딸 케이티에게

이 책은 문학에 대한 그의 사랑이 맺은 결실이다.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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