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습관
도리스 레싱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은 영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영국령 남아프리카 로디지아(잠바웨이)로 이주해서 살면서 식민지 원주민들의 삶을 목격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후 1948년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여러 작품 활동을 하였고 200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2013년에 뇌졸중 투병중 9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1957년에 출간된 <사랑하는 습관>에 실린 작품들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1940년대~1950년대 초반의 영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19세기 말부터 자본주의의 폐해가 증가하고 있었고 그 반동으로 공산주의가 힘을 얻고 있었던 시기였다. 레싱은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를 목격하며 영국으로 오기전부터 공산주의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도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56년에 스탈린이 반대파를 숙청하는 것을 목격하고 공산당에 회의를 느끼고 탈퇴하게 된다.
그런 마음은 작품집 <스탈린이 죽은 날>을 통해 나타나 있다. 전쟁은 승리자와 패배자로 나누었다. 패배자인 독일인들은 비굴할 정도로 미국과 영국에 굽신거리면서도 여전히 히틀러를 찬양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경우도 많았다. 사람들간에는 색깔 이념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영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전쟁과 전쟁후 후유증으로 개인적 문제를 비롯하여 가정이 붕괴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그러나 레싱은 그런 잣대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그가 본 세상은 승리자와 패배자로 나뉘는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잘못이 있고 모두가 희생된 비극이다.
#사랑하는 습관
첫번째 단편 <사랑하는 습관>에서는 습관적으로 사랑하는 조지라는 남자와 여자들이 등장한다. 조지는 전쟁에 나가지 않았지만 연인이 전쟁을 피해 떠나면서 전쟁의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런 시기에 남자들은 가정을 두고 바람을 피는 경우가 많았다. 조지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보다는 습관적으로 사랑한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젊은 부인 보비를 옆에 두었는데 보비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앓이를 하면서 결혼을 습관적 의무로 유지한다. 보비가 자신을 대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굳게 믿었던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서 깨어져 나오는 과정의 심리묘사를 잘 표현해준다.
봄이라 벚꽃이 피어 있었다. 첫날 저녁 그는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하얗게 꽃을 피운 벚나무 가지 아래를 그녀와 함께 걸었다. 한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싼 채, 잃어버렸던 행복의 문안으로 곧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32
“있잖아요 당신은 그저 사랑이 습관이 되었을 뿐이에요.”
“꼭 뭔가를 품에 안고 싶어 한다는 뜻이에요
사랑이 습관이 되었다는 표현이 조지의 마음속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 말이 맞다. 충격이 너무 커서 자신의 맨살에 누군가의 맨살이 닿는 느낌. 보비가 지금껏 알던 그 사람이 아닌것 같았다. 지금까지 사실상 그녀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38
조지는 좋은 친구이자 아내인 보비와 함께 살았고 보비는 모든 면에서 그에게 커다란 자랑거리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웠다. 48
스위스 어느 호텔 테라스에서 숄츠씨와 포스터 대위가 앉아있다.남편을 잃은 쉰 살의 아름다운 로사는 주문을 받으려고 그들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일주일 전 같은날 도착해서 호텔에 머물고 있는 숄츠씨와 포스터 대위는 1차 세계 대전에서 같은 전선에서 서로 적군에 소속되었던 사이다. 숄츠씨는 팔을 걷어 부상을 포스터 대위를 향해 내밀었다. 포스터대위는 2차 세계대전에서 북아프리카로 파병될 뻔 했다. 그랬다면 다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을텐데 인도로 파병되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났지만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은 웃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이 호텔에서의 어떤 특별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1913년 그 둘은 열 여덟, 스물 다섯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이 호텔에서 서른살의 아름다운 여인과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잊지못할 사랑으로 평생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닐수도 있다니..
#동굴을 지나서
해변가에서 어머니는 11살 아들 제리가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만 외동이로 키우고 있다. 제리는 조금 더 큰 아이들이 수중에서 오래 잠수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도 고글을끼고 깊이 잠수를 한다. 다이빙 바위 아래에서 구멍을 발견한 그는 그 자리에 몸을 숨겨 본다 그러고는 끈적거리는 이파리 때문에 순간 공포가 생겨 수면으로 올라온다. 숙소로 돌아갔지만 소년은 밤새 ‘바위 속 동굴’을 보았다. 그 다음날 다시 바다로 나가 소년은 숨 참는 법을 배우려고 몇 시간이나 물 속에 있었다. 온 몸에 힘이 없고 코피가 나고 어지러울 때까지.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소년은 물에서 오래 참을 수 있는 법을 연습했다.
백, 백하나...물 색이 옅어졌다. 승리감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제리는 정신없이 숫자를 셌다. 이제 한계였다. 저 앞의 어둠 속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여기서 죽을 것이다. 제리는 어둠 속에서 힘없이 바위를 붙들고 몸을 앞으로 끌었다. 곧 죽을것 같았다. 98
메리는 매년 여름 휴가와 크리스마스 휴가를 위해 1년을 준비하고 프랑스 남부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한 호텔을 찾아왔다. 예약없이 그 부부를 위해 방을 비워둔 직원이 있었는데 다시 찾은 호텔은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25년동안 매년 여기로 왔어요” 그녀는 지난 4년 딸이 어려서 여행을 하지 못했던 시간은 무시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호텔에서 불편하지만 휴가를 보내야했다. 해변에 나와 햇볕을 받으며 생각했다.
두 사람이 이곳에 오면서 바란 것이 바로 이거였다.
이말이 몇번이나 반복된다.
해변에서 자신들처럼 온 젊은 베티부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저녁 만찬을 플라자 호텔에서 하게 된다.
“제가 보기에 프랑스는 과대평가되어 있어요. 프랑스 사람들은 먹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두 아내는 비슷한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다. 프랑스 바닷가에서 3주를 즐기기 위해 1년내내 준비를 한다. 그 외의 시간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유행을 따르는 베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메리.
<스탈린이 죽은 날>은옛 공산당원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다. 저자가 이 작품을 썼을 때 공산당 고위인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공개적으로는 싫어하는척을 했다고 한다. 골수 공산당원 진, 공산주의 동조자, 미국의 매카시 선풍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 온 빌, 자본주의 지지자 사촌 제시와 에마 숙모를 통해 당시 영국의 다양한 이념의 색깔을 보여준다.
<와인>은 4년짜리 연애의 증류과정이라는 말을 덧붙인 작가. 사랑을 습관처럼 하는 연인이 등장하는데 여자는 남자를 두고 15년전의 그날 밤을 회상하고 있다. 남자 또한 과거의 그녀를 떠올린다. 자신이 거절했던 한 여자를. 두 사람은 그렇게 과거를 생각하며 진홍색 액체를 함께 마신다.
<그 남자>에서도 바람난 남편을 용서하려고 하는 여자 주인공 애니가 나온다. 그래서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품고 있는 진짜 감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른 여자>에서도 바람으로 인해서 지미의 결혼생활은 파탄이 난다. 그럼에도 또 로즈를 옆에 두고도 끊임없이 거짓말로 결혼을 유보하며 또 다른 사랑을 목말라 한다. 사랑보다는 습관적으로 누군가를 옆에 두고 싶고 책임은 거부하려는 상태다.로즈는 전쟁으로 엄마와 아빠를 순차적으로 잃고 마음을 둘 곳 없어 지미를 의지하고 있던 여자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검은 폭탄, 착한 청년이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폭탄, 화물트럭이 누군가를 치고 지나가는 어이없는 일, 이런 것들은 차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삶의 표면 아래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포들이 가득한 검은 심연이 있었다...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단조롭고 평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지미가 있었다. 213
그런 여자에게 지미가 무슨 짓을 하는것인지. 결국 로즈를 책임지고자 하는 것은 지미의 전처다. 두 여자는 지미를 버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연대하며 살아가기로 결정한다.그리고 로즈는 전쟁으로 고아가 된 질을 입양해서 키우기로 선택한다. 전쟁은 사람들을 고아로 만들고 피폐하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어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낙원에 뜬 신의 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슬프고 겁에 질린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때 작가는 실제로 독일에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에서 사람들을 실제로 겪었고 정신병동에도 직접 가 보았다고 한다. 한 영국인 부부가 전쟁 후 독일을 찾았다. 거기서 만난 슈뢰더 박사는 독일인의 자부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크롤 박사는 히틀러 통치 기간에 의료 행위를 히틀러의 행위를 암묵적으로 동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뒤 그는 조울증을 앓게 됐는데 조증이 있을 때는 밝은 그림을 그리고 우울증이 있을 때는 어두운 그림을 그리며 예술로 자신의 심리를 나타낸다.
오래된 핏자국처럼 어두운 색, 녹슨 쇠 같은 빨간색이었다. 이 그림들은 모두 훌륭하고 우울했다. 묘지, 해골, 시체, 전쟁 장면, 폭격을 맞은 건물,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 불타는 창문에서 불꽃 속으로 개미처럼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369
마지막으로 선물받은 그림 <낙원에 뜬 신의 눈>을 들고 나오는 길은
무겁고 검은 군화를 신고 행군하는 발소리의 기억이 땅속 깊은 곳에서 박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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