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정희재
당신, 참 애썼다.
끝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새벽잠을 설친 순간을 기어이 이겨 내며 우린 참 치열하게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 마음 다치지 않고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이도 있으리라. 나는 이제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 나는 또 감히 안다. 당신이 무엇을 꿈꾸었고, 무엇을 잃어 왔는지를. 당신의 흔들리는 그림자에 내 그림자가 겹쳐졌기에 절로 헤아려졌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런 책 제목을 즐겨 읽지는 않는데 이 책을 열게 만든 것은 독자들이 남긴 리뷰 때문이었다.
이 책이 나를 위로하거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준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글들이 참 좋았다. 언어라는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새겨진 문신과 같은 패턴이라는 것, 버스에서 만난 타인의 호의를 끝내 거절한 남자로 시작하는 글이 좋아서 한 권이 다 끝날 때까지 숨죽여 읽게 되더라.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리커버 양장본)저자정희재출판갤리온발매2020.04.27.
자취를 하며 받아보는 시골 부모님의 택배 이야기는 내가 해 보지 못한 것들이지만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따뜻한 엄마의 밥 냄새가 났다.
지방에서 올라와 독신으로 살고 있는 친구 D에게 들은 기억에 남는 명절 이야기는 대학교 때의 어느 해였다. 연휴 바로 다음날 일이 있어서 도저히 집에 갈 형편은 못되고 명절이면 원칙적으로 닫는 기숙사에 몰래 숨어서 지냈던 이야기였다. 전날 마트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다 사 놓고 기숙사 문을 닫기 전 순찰할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도 쉬지 않으며 그렇게 스스로 기숙사에 갇혔던 이야기다. 그러다 똑같은 형편의 ‘동지’를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의 섬뜩함이란. 명절 풍경도 다르고 기숙사 생활도 안 해본 나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딴 세상이다.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지만 나라면 그런 발상을 전혀 못해봤을 것 같아서 타인의 영웅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왜 우린 롯데월드를 떠나지 못할까. 롯데월드를 우리 생에서 지워 버린다는 건 그때 나이로선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우린 롯데월드가 낳은 아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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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 그래 나는 롯데월드가 낳은 아이까지는 아니어도 추억의 중심에 롯데월드가 있었다. ‘누군가에겐 추억의 성소, 누군가에겐 청춘의 유적지, 내 청춘의 타지마할, 열정의 무덤, 타인의 기쁨과 눈물로 얼룩진 사화산’이라고.
왜 그렇게 거길 갔었나 생각하니 4계절 그곳처럼 따뜻하고 시원하고 많은 사람이 있으면서도 단둘이 있는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던 곳이 없었던것 같다. 교통편 좋고 스트리트형 멀티몰에 놀이공원까지. 한 곳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번 들으면 떠나지않는 중독되는 롯데월드 홍보쏭처럼 거기가 그냥 세계월드였다. 세계 각국의 의상을 차려입은 춤추는 행렬들을 보고 그런 풍경 속에서 어우러지는 축제 분위기에 취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미국에 디즈니랜드가 있다고 해도 나에게도 역시 롯데월드가 아니겠나. 작가의 감칠맛 나는 묘사 덕에 넋을 놓고 추억을 떠올려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연인이 아니라 전우로 기억된다는 말에 어찌나 코끝이 찡해지도록 공감이 되는지. 나도 가끔은 나의 전우가 그립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수유리에 살았던 그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성신여대 근처에서 초. 중, 고 대 거의 4호선으로 해결했던 터라 수유리도 반가웠다. 4 19 묘지에서 북한산까지 가는 코스. 잘 아는 동네라 생각했지만 오고 가는 선상에 있었을 뿐 사실상 이름만 익숙한 동네였다. 그녀의 그리움이 가득한 그 동네 선상에서 나도 그리움이 가득 밀려왔다. 북한산에 갔다가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차를 마신 일. 나의 모교 선생님은 수유리에 사신다. 그녀는 그곳을 죽은 자의 동네라 불렀다. 4.19묘지를 비롯하여 이준, 송시열 등 역사 책에서 보는 분들의 묘가 있다.
가을날의 북한산은 온통 불을 지른 것처럼 단풍이 한창이었다. 이리저리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데, 한 집 건너 한 집씩 돗자리에 도토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만 이 동네에 정이 옴팡 들고 말았다. (....) 방향을 몇 번 틀어 멋스러운 가지를 뻗은 소나무가 골목길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구석 양옥집에 딸린 작은 정원과 텃밭들, 안티푸라민을 코끝에 바른 것처럼 알싸하게 후각을 자극하던 나뭇잎 냄새, 산 밑의 서늘한 기운…. 이런 모든 것들에 반해서 아카데미 하우스 바로 밑에 셋집을 얻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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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었다.
행복에 관한 한, 우리는 일용직 신세였다. 비정규직이었다.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두기 힘든 것, 그게 행복이었다.
책 속에서 여행을 가는 이유가 여행 다녀오면 내 집이 그렇게 편해서 내 집을 사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데 몇 달을 비워도 나는 그런 느낌보다는 여행에 대한 아쉬움이 크니... 난 정말 역마살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담담한 언어에도 따뜻함과 공감의 언어를 담아낼 수 있구나
그런 언어로 내 마음속 어딘가를 속 시원하게 긁어준다.
그런 생각들로 읽어내려간 책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작가의 언어 그대로 나눈다.
-나에게서 받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크고 깊은 사랑이라는 걸 살면서 새록새록 느낀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 ‘쓸모’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이 있어야 ‘잘 쓰이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확신은 자신을 믿고, 재능이 꽃 필 시간을 기꺼이 기다려주는 일부터 시작된다. 42
-하지만 내게 부족한 것을 알고, 내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도 능력이고, 재능이 아닐까. 사람들이 쉽게 행복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의 허구를 간파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가 어디 있을까 73
-어린아이에겐 다소 벅찬 미덕이었던 최선이
어른의 세계에선 당연한 전제였다.
과연 어느 선까지 해야 최선일까 89
-생각해 보면 코미디 같은 일이다. 운동에 중독돼 허리를 삐끗하고, 삐끗한 허리를 고치겠다고 다시 새로운 운동에 빠지다니.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내게는 그게 늘 어려웠다. 우리는 외로워서 중독되는 것일까, 아니면 중독된 끝에 외로워진 것일까. 139
-친구들과 둘러앉아 도시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이미 도시 중독자... 도시 생활의 각박함과 덧없음에 마음이 떠나거나 타의로 밀려나기 전까지는 치유할 길이 없는 중독이었다. 중독은 무의식과 충동이 이성을 이길 때 생긴다. 142
-어떤 면에서 우리는 도피자들이다 우리의 혼은 끊임없이 외로움과 갈망, 불안, 충격으로부터 달아나 숨을 만한 곳을 찾는다. 중독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이 현실의 전면에 나서서 지휘권을 갖는 것이다 145
-밥이 단순히 끼니 잇기 차원이 아니라 친교와 정을 나누는 의식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에선 혼자서 밥 먹을 때 감내해야 하는 시선이 만만찮다. (...) 나도 같은 처지면서 혼자 밥 먹는 남자나 나이 든 이들을 보면 저편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괜히 마음이 짠해진다. 노점에서 밥 먹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내 목구멍에도 모래로 지은 밥이까끌거리는 것 같다. 다 세끼 편히 먹자고 이토록 절절한 것인데, 거리에서 어설프게 해결하는 허기는 지레 불완전하고 지레 고독하다 195
당신 정말 애썼다는 말 역시 정말 내가 듣고 싶은 말일 것이다.
특히 요즘은 셀프로 그 말을 열심히 하고 있다.
'너 정말 애썼어. 이 정도면 애쓴거야. 괜찮아'
지금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지쳐가고 메말라감을 느낀다.
서로를 위해 위로의 말 해 줄 수 있다면 더욱 좋겠고
없다면 스스로라도 셀프 서비스 해 주자.
애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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