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니모 Jeronimo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임은조씨의 삶을 그린 영화다.
2018년도 낙스 시카고 학회에서 만난 전후석(Joseph)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중에 영화에서 담고자 하는 그의 꿈이 담긴 기조 연설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전우석 감독님과 함께 찍었던 사진
이렇게 영화가 제작되고 청와대 초청을 비롯하여 방송에서도 많이 소개가 된 것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이번 주 한글학교 고등 학생반에 내가 준 과제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었다.
헤로니모의 간추린 영상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글을 써 보라는 숙제다. 외국에 사는 재외 동포 2세 3세들에게 정체성을 찾는 뿌리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일, 그것이 내가 한글학교에 열정을 쏟는 이유다.
원래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전후석 감독은 체 게베라와 쿠바 혁명에 함께 하고 고위공직자까지 올라간 한국인이 있었다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2015년 쿠바에서 3대 한국계 쿠바인 택시 기사 패트리샤를 만나게 된다. 택시 기사 아버지 헤로니모(임은조) 임 씨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쿠바에서 한국계 쿠바인의 역사를 탐구하였다.
1926년 쿠바에서 독립운동가 임천택의 아들로 태어난 헤로니모 임(Jeronimo Lim Kim 임은조 1926~2006). 아버지 임천택씨는 1905년 가난하던 시절에 황성신문에 멕시코에 노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1,033명의 사람들과 함께 꿈을 안고 멕시코로 도착한다. 그런데 지상낙원이라 생각했던 그곳은 도착하자마자 뿔뿔이 농장으로 팔려가고 실상은 노예생활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조국은 이미 일제의 식민지가 된 후였다. 돌아갈 나라를 잃은 그들은 멕시코보다 환경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희망을 안고 쿠바로 가게 된다. 그러나 쿠바는 멕시코보다 더 사정이 안좋았고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 생활로도 입에 풀칠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환경에서 열심히 정착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던 쿠바 이민 1세들. 그들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1925년 마탄사스 농장에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여 이민 2세들에게 한글과 한국의 문화를 가르치며 한국혼을 일깨웠고, 카르데나스 지역에도 `진성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932년에 청년학원, 1938년에 대한 여자애국단을 세워 조국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임천택의 자금 후원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헤로니모 임은 임천택의 9남매 중 장남이다. 쿠바 한인 최초로 마탄사스 종합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는데 같은 해 같은 대학에 입학한 피델 카스트로와의 인연이 그 대학에서 시작된다.
젊은 이상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는 쿠바인의 평등을 위해 한국인이지만 빈곤의 종식을 꿈꾸며 1950년대 쿠바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많은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순한 혁명가가 아니라 신념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고 이데올로기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를 꿈꾸었던 사람이었다. 쿠바의 상황에서 모두의 빈곤이 종식되는 길이 혁명밖에는 없다고 믿었다.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에 함께 하며 경찰 공무원, 산업부 차관, 시장까지 고위공직자로 30년을 지낸다. 1967년에는 쿠바 정부의 비밀 임무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은퇴 후 그는 택시 운전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 한인회를 조직하고 한글과 문화를 가르치는 일에 주력한다.
1995년 한국 광복 50주년 행사로 아버지 임천택의 꿈이었던 조국의 땅을 밟는다. 그때 그는 잘 사는 대한민국을 보며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었지만 쿠바가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쿠바로 돌아온 그는 죽기까지 남은 시간을 한국인의 정체성 교육을 위해 바쳤다. 그는 쿠바에서의 첫 한국인 이민 역사를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학교와 한인회를 설립했다.
임천택의 3녀도 마탄사스 교수를 지냈고 차남 역시도 경제학 대학교수였다. 가난한 농장 일용직으로 생활하던 그들의 가문이 어떻게 쿠바의 한인들로 뿌리를 내렸는지 보게 된다. 임천택은 1985년 쿠바에 묻혔다가 국외 안장 독립유공자로 유해로나마 고국에 돌아와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치되었다. 평생 소원인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지만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3대의 꿈
그의 증손자 임운택은 가족과 함께 임천택 할아버지 현충원을 찾았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소원하던 고국의 땅을 증손자가 찾아왔다. 그는 할아버지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며 할머니께서 강조했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교육을 잊지 않고 이어가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역사가 바로 자신의 역사의 일부라고. 한국에서 6개월을 머물며 문화를 배우고 자신의 뿌리를 찾는 모습을 보면서 정체성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누가봐도 남미 얼굴은 한 외국 학생이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한국 노래를 열창하는 얼굴이 참 인상적이다.
그와는 반대로 얼굴은 누가 봐도 한국인이지만 "나는 미국인입니다"라고 말하는 한국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도 이런 말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하기도 하고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미국에 오면 이제 한국어 자체를 못쓰게 하며 키우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이야 BTS가 그 큰일을 해 놨고 K POP을 비롯하여 한국의 위상도 높아졌다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한글학교에서도 그런 아이들을 종종 마주한다. 자신이 미국에 사는데 왜 한국어를 배워야 하느냐고. 그러나 아이를 가르치기에 앞서 그것은 아이의 문제라기보다는 부모의 문제인 경우도 많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의 정체성이 곧 아이의 정체성으로 아이들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모르는 사이에 깊이 스며든다. 스스로 미국인이라 생각하며 자라다가 사회에 나가보면 자신을 미국인으로 봐 주지 않고 그때 뿌리째 흔들리며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몰라 방황하는 시기를 겪으면서 나중에서야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
유태인과 한국인은 인구 비율 대비 전 세계에서 재외 동포가 가장 많은 나라다. 유태인들의 뿌리교육은 세계에서 인정한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2세 3세들 앞으로의 후손들에게 우리는 어떤 뿌리교육을 물려줘야 할까.
재미보다는 감동으로
자극보다는 울림으로
단상보다는 사색으로
쿠바 이름, '헤로니모' '임은조' 님의 삶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조국'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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