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시크릿 파일
박영규
1장 1대 태조 온건한 승부사, 배신당한 아비
1335년 음력 10월 11일 이자춘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성계는 타고난 힘과 용맹으로 힘이 장사였고 담력이 매우 뛰어났다. <동각 잡기>에 보면 함흥에서 두 소가 서로 싸우는데 이성계가 손으로 두 소를 붙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기에 가까운 궁술 실력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은 잡았지만 집안에서는 장남이 반대하여 인연을 끊고 형은 음독자살을 하는 등 불행한 일을 겪어야 했다.
2장 3대 태종 영리한 책략가, 뒤끝 대마왕
태종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년) 함경도에서 이성계의 첫 부인 한 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의 용모와 성격을 닮은 인물은 2대 정종 이방과였다 그는 태조처럼 무인이었고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태종에게는 이성계가 지니고 있던 온화함이나 너그러움은 없었다. 태종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잘했다.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자신은 비록 학문을 익히지 못해 변방의 무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방원이 학문을 하여 과거에 합격하자 눈물 흘리며 좋아했다. 이성계는 연회가 있을 때마다 방원을 불러 자식 자랑을 했다.
이성계의 둘째 부인 강 씨는 형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였는데 이방원은 정몽주 척살 사건도 두 사람이 함께 했을 정도로 아버지보다 강 씨와 죽이 잘 맞았다. 그들은 계모와 아들의 관계가 아닌 정치적 동지였다. 후에 세자 책봉 문제로 정치적 관계는 끝이 나고 이방원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가장 무서워하였다. 정적 강 씨가 죽고 아버지 태조마저 병세가 악화된 틈을 노려 그는 6년간 숨기고 있던 자신의 야망을 드러냈다. 정몽주를 격살하듯 정도전을 격살하고 방석의 장인 심효생, 남은, 세자 방석, 형 방번, 매형 이제를 모루 하루 동안 죽였다. 그리고 많은 처첩들을 두고 부인과의 갈등 사이에서 네 명의 처남을 죽임으로써 처가를 철저하게 응징했다. 그리고 태조가 죽은 뒤 계모 강 씨의 능을 파서 없애버리고 땅에 묻었던 돌을 캐내 광교 돌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고 죽인 것도 모자라 그들의 신분까지도 모두 격하시킨 것은 그의 끈질긴 보복과 뒤끝 대마왕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태종 옆에서 신하들은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없었다. 태종과 다른 의견을 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태종의 정치는 독존의 리더십이었다. 복종이 아니면 죽음이었다.
3장 4대 세종 팔방미인, 깐깐한 가부장
세종(충녕대군)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왕이다. 사람들이 다른 왕들은 잘 모른다고 해도 세종만큼은 기억하며 한글을 만드신 세종의 업적을 기억한다. 책벌레, 독서광, 인자한 성품, 신분을 초월한 실용적 인재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던데 어떻게 태종에게서 이런 성품의 아들이 태어났는지 신기하다. 세종은 인정 많고 너그러웠으며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우리의 완벽한 세종 그에게 다른 면은 없을까?
세종은 한 명의 왕비와 12명의 후궁을 두었다. 그는 비정한 남편이었고 후궁들에게도 매우 깐깐하고 며느리를 넷이나 내쫓는 엄한 시아버지였다. 조선왕조의 어느 왕도 세종처럼 여러 차례 며느리를 내쫓는 경우는 없었다. 아들에 대한 지나친 사랑은 며느리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졌지 않았을까 싶다.
'가지가 많으면 바람 잘 날 없다'라고 세종의 아들들 중 뛰어난 인재는 모두 요절하였다. 18남 7녀의 자녀 중 여섯이 죽어 왕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고 기록된다.
4장 7대 세조 음흉한 괴짜, 기분파 냉혈한
세조(유, 수양대군)는 1417년 세종과 부인 심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칭찬하다가도 뒤틀리면 가차 없이 상대를 죽이는 기분파에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좋아하여 아부에 혹하는 성격으로 동복이든 이본이든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면 봐주고 쳐들면 가차 없이 죽였다. 세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신숙주, 한명회 그리고 충성하지 않아 죽은 인물은 성삼문, 박팽년 등의 사육신이다.
영화 속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라 세조 하면 관상 이정재가 떠오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Jd0o-wXKRjw
5장 9대 성종 낮에는 도덕군자, 밤에는 호색한
성종(혈)은 1457년 세조의 장자 덕종과 한 씨(인수대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의경세자)가 죽은 뒤 할아버지 세조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성종은 정무 처리에 밝고 선비를 좋아하는 왕이었으나 술과 여색을 가까이했다. 많은 여자를 거느렸으나 여복은 없었다. 여성편력 때문에 비극을 겪기도 했다. 성종은 조선 왕 중에서 가장 경연에 많이 참여했던 왕이라 하니 그가 낮에는 얼마나 열심히 신하들과 함께 공부했던 왕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6장 10대 연산군 살 떨리는 낭만주의자, 살인귀
1476에 연산군(융)이 태어났고 그가 네 살이 되던 해 윤 씨는 폐출되어 3년 뒤 사약을 받게 된다. 연산군은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버지(성종)이 키우던 사향이 자신을 핥자 사슴을 발로 차서 꾸지람을 듣는다. 후에 그 앙갚음으로 사슴 새끼를 쏘아 죽이는 잔인한 성정이 <오산 설림>에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생모 윤 씨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폐비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참수하고 죽은 사람은 관을 파내 다시 죽이는 부관참시 형에 처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으며 후궁 엄 씨와 정 씨를 때려죽이고 할머니 인수대비는 머리로 받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연산군의 광기는 색욕과 살인으로 귀결되었는데 전국에 신하들을 파견하여 기생을 뽑아 궁에 들이고 그중 마음에 드는 여자는 모두 후궁으로 삼았다. 그중 가장 총애하던 여인 셋이 장녹수, 전전비, 백견이었다. 모두 전비 출신의 기생들이다.
이 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죽기를 각오하고 직언을 했던 김처선이다. 이미 김처선은 직언을 하다 곤장 100대를 맞고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몸을 치르시자마자 사람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입궁한다. 그리고 죽기로 각오하여 왕에게 말한다.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도 대강 통했는데 고금을 통틀어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연산군은 바로 화살을 꺼내 그를 쏘았으나 그는 계속 뒷말을 잇는다.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죽이십시오 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연산군은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대고 그가 쓰러지자 칼을 뽑아 김처선의 양다리를 내리친다.
“일어나 걸으라! 어명이다 걸으라!”
그러고도 말을 하는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그의 배를 잘라 창자를 꺼내들었다.<소문쇄록>에는 숨이 멎을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일로 김처선과 관련된 사람은 7초까지 모두 죄인으로 다스리고 부모의 무덤을 없애고 김처선의 아내를 관비로 삼았다. 그 이후 김처선과 같은 이름을 쓰는 자들은 모두 개명시키도록 하며 모든 문서에 이름 ‘처’자를 쓰지 못하게 했다. 죽음을 각오한 용기를 높이 사지만 한 사람이 왕궁에 나간다는 것이 잘되면 집안의 경사지만 잘못되면 아주 관계없는 사돈에 팔촌까지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이 참 마음이 아팠다.
연산군이 만든 금지법 중에서 가장 최악은 ‘우어 금지법’이다. 이웃은 물론이고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도 서로 말을 섞지 못하게 했으니 연산군이 얼마나 사람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지 두 달 만에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사인이 전염병이라고도 하고 화병이라고도 한다.
7장 11대 중종 우유부단한 이기주의자, 두 얼굴의 통치자
중종(역, 진성대군)은 1488년에 성종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연산군의 칼부림의 공포 속에서 늘 숨을 죽이며 살았다. 실록의 평가로는 중종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신하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의리와 정이 부족하여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나온다. 그가 두 얼굴의 통치자라는 것은 친분을 떠나 왕위를 위협한다고 느껴지면 냉혹하고 단호하게 돌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이중성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 조광조와 김안로를 비롯하여 이복형제 진성 군, 큰아들 복성 군, 경빈 박 씨를 죽일 때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결단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이뤄지고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8장 13대 명종 매 맞는 군주, 절망에 빠진 마마보이
명종(환)은 1534년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인종은 부왕 중종의 간병 그리고 중종이 서거했을 때 무려 6일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울었으며 3개월 동안 소금과 간장조차 입에 대지 않고 죽만 먹으면서 건강이 안 좋았다. 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에 올랐으니 모든 왕권은 어머니 문정왕후 윤 씨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마마보이로 어머니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허수아비 왕이었다. 그리고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윤원형은 대윤 세력을 역적으로 몰아 100여 명을 제거하면서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로 조정은 피바람이 몰았다. 그는 문정왕후가 죽고 2년 뒤 지극 정성으로 삼년상을 치르다 죽는다. 이미 하나뿐인 아들은 먼저 보낸 후였다.
9장 14대 선조 눈치 빠른 처세가, 영리한 현실주의자
선조(균)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 씨의 소생으로 명종보다 네 살 많은 이복형이다. 선조는 모친상 중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선조 하면 비겁한 왕으로 인식된다. 임진왜란 때 도성을 버리고 도주한 일 때문이다. 하지만 선조는 학문에 밝고 명민하며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선조가 만약 도망하지 않고 일본군과 맞섰다면 어떤 결과를 얻었을까? 그랬다면 병자호란 때의 인조처럼 되었을 수도 있다. 일명 ‘작전상 도주’ 당시 조선이 의존할 군대는 수군과 명나라의 원군밖에 없었다. 그는 무명옷을 입는 검소한 임금이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흔히 선조를 질투가 심하고 옹졸한 왕으로 안다. 그것은 이순신의 백의종군과 연결된다. 선조 시대는 이이, 정철, 류성룡, 이항복, 이덕형, 이순신, 이원익 등 조선 역사상 인재가 가장 많았던 시기임을 볼 때 선조는 출신보다 실력을 중시하고 다양한 인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10장 15대 광해군 가련한 영웅, 고독한 실리주의자
1575년 선조와 공빈 김 씨 사이에 광해군(혼)이 태어났다. 김 씨는 광해를 낳으며 생긴 산욕열로 2년 뒤 사망하였으니 흔히 말하는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아기가 된 셈이다. 광해군은 얼굴도 모르는 생모 공빈 김 씨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남달라 왕위에 오른 뒤 생모 공빈 김 씨를 왕후로 격상하고 김 씨의 묘를 능으로 조성하였는데 조선 왕조 이해 죽은 후궁을 왕후로 추존한 예는 없었다. 광해 하면 그가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일을 떠올리게 된다. 아들과 며느리 아내마저 죽고 광해군의 가족은 시집간 옹주 한 사람이 남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유배 생활을 하며 수차례 광해군을 죽이려는 세력들이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까닭에 18년이나 넘게 생을 이어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8pcpLo1Lz0I
11장 16대 인조 불안한 군주, 좀팽이 아비
인조(종, 능양군)는 1595년 선조의 5남인 이부와 구씨 사이에서 선조의 첫 손자로 태어났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선조 후궁 인빈 소생인 정원군은 능창 군(인조의 동생)이 열일곱 살의 나이에 죽은 뒤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해가 뜨면 그제야 지난밤에 아무 일이 없었던 줄 알게 되고, 해가 지면 비로소 오늘이 편안하게 간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지금은 다만 일찍 죽어서 선왕을 저승에서 모시기를 원할 뿐이다
월사집
두려움 속에 살던 정원군도 결국 생을 마감한다. 정원군의 장자가 인조다. 그런 반정 가운데 왕위에 오른 인조는 문장이 좋고 시도 잘 지었으나 자신의 글씨체를 밖으로 절대 내보내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글씨를 흉내 내어 모략이라도 꾸밀까 봐 노심초사했던 인조의 친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인조는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 굴욕을 당했다. 인조의 항복 이후에도 청은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갔다. 소현세자는 청에서 8년간 외교관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청에서는 조선 임금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세자가 왕이 될 거라는 풍문이 인조의 귀에 들리자 인조는 소현세자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속내를 모르는 소현세자는 고국으로 돌아왔고 아버지와의 갈등 가운데 앓아누워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인조는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죄 없는 아들과 며느리에 궁녀들까지 무려 십여 명을 죽였다. 그 후 인조도 뇌줄중으로 사망한다.
12장 17대 효종 아부를 싫어한 대장부, 도 넘은 효자
인조와 한 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효종(호, 봉림대군).
왕위를 잇지 못할 왕자는 어떻게 처신하는 게 현명한가? 봉림대군 이호가 스승 윤선도에게 던진 질문에 ‘어차피 왕이 되지 못할 신세이니 재주와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 행동하여 왕을 안심시키며 살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그는 사는 동안 늘 그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효종은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을 신뢰했고 그중에는 내시 김언겸같은 사람도 있었다. 효종은 이름답게 효성이 지극한 왕이었다.
인조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왕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인조가 승하하였다. 왕은 맨땅바닥에 거처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물이나 간장도 들지 않았다.
효종은 이날 손가락을 너무 심하게 잘라 손가락이 잘려나갈 뻔했을 정도라 한다. 효종은 어머니의 임종 전에도 그리했는데 그런 효심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범하기도 했다.효종은 주색을 멀리하고 검소했으며 금욕생활을 했다. 효종은 마흔한 살에 의료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13장 18대 현종 인정 넘치는 도인, 일편단심 민들레
현종(연)은 조선 왕 중에서 유일하게 출생지가 외국인 인물이다. 그는 효종이 인선왕후 장 씨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잡혀있을 때 태어났다. 현종 시절에는 역모로 죽은 사람도 없었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없었다. <공사 견문록>에는 현종은 심지어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까지 포용했다고 한다. 또 현종은 재위 기간 15년 동안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은 왕이다. 원래 후궁을 두는 군은 단지 여색을 탐해서라기보다는 후사 때문인데 현종은 명성왕후의 질투심이 많았기에 온화한 성품의 현종이 후궁을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4장 19대 숙종 직진 기질 사랑꾼, 분노조절 장애 정치꾼
현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숙종(순)
숙종은 열한 살에 혼인하고 14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나이와 다르게 명민하고 판단이 분명하여 모든 신하가 벌벌 떨 정도로 엄격하고 무서운 왕이었다.
그는 타고난 정치 천재다. 사극에서는 장옥정을 악녀로 인현왕후는 천하에 둘도 없는 마음씩 착한 왕비로 설정하는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국민 정서상 만든 허구에 가깝다. 숙종과 힘 싸움을 벌인 쪽은 오히려 인현왕후이고 오히려 장옥정은 숙종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이용당한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노론들에 의해 숙종은 스스로 장옥정에게 자진 명령을 내린 것이 이 사랑꾼인지 치졸한 것인지.
15장 21대 영조 두 얼굴의 정략가, 고독한 가장
숙종과 숙빈 최 씨 사이에 태어난 영조(금).
금의 생모가 무수리(궁궐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노비)였기 때문에 늘 잡다한 소문이 돌았고 영조는 평생 그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30년은 경종의 생모 장 씨와 모친 최 씨의 세력 다툼으로 왕위 계승을 위한 가시방석 생활을 했는데 숙빈 최 씨의 승리로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세간에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또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도 많았다. 그렇게 성장했던 영조는 의심이 많고 한번 의심한 인물은 절대로 믿지 않는 성품으로 자랐다. 자신을 공격하면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했다. 탕평은 당색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여 조정을 장악하기 위한 영조의 전략이었다. 영조는 여자 복도 자식 복도 없었다. 두 명의 왕비와 네 명의 후궁으로 2남 12녀를 얻었으나 적자와 적녀도 없고 영조보다 오래 산 아들은 한 명도 없었다.
선은 영특한 아이로 일곱 살에 이미 한문을 익혔고 효경, 소학을 익혔다. 조광조의 표현대로 하면 <소학>은 유학의 요체가 모두 들어 있는 책이었다. 이는 세자가 천재적인 학습 능력을 갖춘 아이였음을 말해준다. 늘 세자(선)를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한번 세자가 거짓말을 한 이후로 심하게 야단을 맞게 되는데 그 사건 이후로 세자는 아버지를 극도로 무서워하는 공포, 일종의 공황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설 때는 언제는 청심환을 꼭 먹어야 했다. 영조는 싫어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귀와 손을 씻었는데 세자 선에게 그러했다. 세자의 생모 영빈 이 씨가 아들의 광기를 더는 보지 못하고 영조를 찾아가 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요청하고 영조는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7일 만에 굶어 죽는다.
16장 22대 정조 절대군주를 꿈꾼 완벽주의자, 뒷거래 정치꾼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정조(산). 세손 이산은 할아버지 영조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지만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손에 죽는 것을 다 보고 자랐으며 그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한 뒤에도 미치광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따라다녔다.
이 장면 영화에서 본 장면이다. '역린' 현빈의 대사가 들린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3W1-HH9NbQ
즉위식이 열린 1776년 정조 이산은 가장 먼저 이 말을 했다.
이 말은 즉 아비를 죽인 노론 세력들 그리고 자신의 왕위를 반대한 자들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정도는 본인을 치밀하고 뛰어난 왕이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정조는 이중 플레이를 하는 뒷거래 정치꾼임을 보여주는 밀서들이 남아있다. 정조가 생을 마감한 뒤 정순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을 하자 노론 벽파의 세상이 되었다. 그 이후 왕권은 모두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같은 외척들이 장악했고 외척 독재도 결국 조선을 망국으로 치닫게 했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은 허수아비 왕으로 살아야 했고 더는 조선에 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철종 이후 고종이 왕위에 올라 잠시 외척을 물리쳤으나 고종 역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받아야 했고 흥선대원군이 10년의 섭정을 끝내고 물러난 뒤에는 다시 민씨 외척들이 왕권을 장악했다. 이렇듯 조선은 정조를 끝으로 더는 왕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이후의 왕들은 그저 허울뿐인 왕이었다. 그러니 별달리 왕만의 비밀을 밝힐 일도 없게 되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정조..작년에 다녀왔던 수원 화성의 추억도 떠오른다.
이것이 조선의 왕을 정조로 끝내는 ‘조선 왕 시크릿 파일’의 마지막 구절이다. 조선 500년의 역사를 이렇게 뒷이야기들로 풀어서 만나니 매우 흥미롭다. 영화나 사극에서 본 이미지와 사뭇 다른 모습들에 놀라기도 하고 과연 그 선입견을 벗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역사는 허구보다는 사실에 가깝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책들을 여럿 비교하며 읽어야 하는 이유기도 하고 그게 또 재미기도 하다.
왜 그렇게 그들은 많이 죽어야 했던가?
그들이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은 왕이 되고자 힘도 있겠지만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가 더 컸다. 미치거나 미친척하거나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왕들도 참 많았고 여자들은 최 씨 윤 씨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존재감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기도 했다. 그들은 왕의 여자 또는 왕의 어머니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임금 27명의 임금 중 16명의 임금만을 만났다. 그들은 덕이 있으면 '종', 업적이 있으면 '조' 붙고 자질이 부족한 왕에겐 '군'이 붙었다. 이 책은 다른 책과 병행해서 읽으면서 쳅터씩 밤마다 읽으며 생각하곤 했다. 나라를 이끄는 리더의 덕목 중 어진 성품, 타고난 바탕이 참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뛰어난 능력과 리더십 그리고 주변 환경까지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유독 어떤 왕들을 높이 평가하고 칭송하는 것은 그 업적에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인격이 겸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업적을 배제하고 인성과 사생활을 중심으로 조선의 대표되는 왕들을 파헤쳐 보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보다 흥미로운 이유로 추천하고 싶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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