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정신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1881~1942)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고 1919년부터 1934년까지 잘츠부르크에서 살았다. 유대 혈통이던 그는 독일에서 기승을 부리던 히틀러의 나치가 오스트리아로도 그 막강한 세력을 뻗어오던 시기에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전쟁의 광증에 사로잡힌 유럽에서 견디지 못하고 1941년에 브라질로 망명했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문학박사로서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번역으로 문학을 시작했으나 각종 평전을 통해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지금도 독일어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손꼽힐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우리가 사랑하는 헤르만 헤세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즐겨 일었고 그의 서재의 책으로 소개했다.
이 책은 그가 남긴 유언이자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지만 완성하지 못한 미완성 작품이다.
그가 마지막 시기에 붙잡고 있었던 인물은 16세기 종교 전쟁 시대의 인문학자인 몽테뉴다. 그는 ‘에라스무스’나 ‘카스텔리오’와 같은 16세기 인문학자들을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동지로 여겼다. 지난번 카스텔리오 평전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로 만나보았다.
유럽의 16세기는 어떤 시대였길래!
1517년을 기점으로 루터의 종교개혁과 뒤이어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를 기반으로 개신교는 카톨릭과 맞서던 시기다. 한 뿌리였지만 둘은 다른 의견으로 피를 부르는 종교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카톨릭은 이단을 화형에 처했으며 개신교도 몇 건의 이단자 화형을 남겼다.
16세기 후반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를 물들인 위그노 전쟁과 스페인 절대주의에 맞서 일어난 네덜란드 전쟁 등이 모두 종교전쟁의 성격을 띤다. 17세기에는 30년 전쟁으로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츠바이크는 자신이 놓인 광기의 시대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광기를 부렸던 16세기 시대를 비슷한 상황으로 인식했고 그 시대에 관용과 온건함을 실천하였던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 몽테뉴 같은 인물들을 스승으로 여긴 것이다. 그의 눈에는 비슷한 상황으로 보였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지만 광기와 신앙을 구분하고자 하는 나에게는 츠바이크의 시선도 이해하고자 한다. (츠바이크와 세 사람은 다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종교전쟁과 이단 화형은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다른 의견을 가졌다 해도 죽지 않을 권리가 있는 시대에서 그렇지 않은 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츠바이크가 놓였던 1940년대 역시도 내가 책에서만 경험한 역사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공포를 짐작하는 것만 가능하다. 그는 그 광기를 견디지 못하고 1942년 2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면서 <발자크 평전>과 이 책등 몇 권의 미완성 작품을 남겼다.
<수상록>으로 알려진 몽테뉴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죽기 전 앙리 4세가 되는 인물의 개종을 알리는 역할을 했고 그가 왕이 되는 과정에 몽테뉴가 중개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후에 앙리 4세가 발표하는 낭트칙령(1598)에는 몽테뉴가 추구하던 관용의 정신이 들어있다. 츠바이크는 16세기 르네상스가 가져온 예술과 문명의 발달과 자신이 성장했던 20세기의 초반의 희망을 (국경선을 넘는 통신 수단과 비행기가 하늘을 점령하고 물리학, 화학, 기술과 학문이 모두 열리는 성장의 희망)의 시대를 비슷하게 보았다. 그러나 그 희망은 1-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광기 시대를 겪으며 그 희망이 비극으로 바뀌었다.
츠바이크는 어떻게 몽테뉴를 만났는가!
그가 청년 시절에 오스트리아에서 <수상록>을 통해 만났지만 사실 그땐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우리 시대에 몽테뉴는 진작 부수어 버린 쇠사슬을 무의미하게 쩔그럭거리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당시 우리는 운명이 우리를 위해 이 쇠사슬을 전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잔인한 모습으로 새로 주조하고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청춘이 사라져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고 건강이 없어져야 그 귀중함을 알고,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핵심인 자유를 뺏기는 중이거나 이미 빼앗긴 다음에야 비로소 그 귀함을 안다는 것이 인생의 비밀스러운 법칙이다. 몽테뉴의 삶과 기술과 지혜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그의 싸움의 필연성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세계에서 가장 절실한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14쪽
가벨(소금세)에 맞서 일어난 민중봉기가 잔인한 폭력을 통해 진압되는 것을 봤던 열다섯 살의 몽테뉴는 그 시절 인간의 잔인함을 마주해야 했다. 목매달아 죽이고, 말뚝에 박아 죽이고, 바퀴에 매달아 죽이고 사지를 찢어 죽이고 머리를 베어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는 꼴과 고문당하는 사람의 외침을 듣고 불에 탄 인육 냄새를 경험했다. 그리고 카톨릭과 개신교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를 보았다. ‘샹브르 아르당트’는 개신교들을 화형에 처했고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에는 8천 명의 사람이 죽었으며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들은 분노에 분노로 잔인함에 잔인함으로 응수했다. 1560년에 스물일곱이던 라 보에시가 몽테뉴에게 쓴 편지는 그들의 심정을 대신해 준다.
“대체 어떤 운명이 우리를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나게 했단 말인가! 나라의 붕괴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나는 이민을 떠나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구나. “
몽테뉴는 국가, 교회, 정치가 둘로 양극화되는 상황과 시대의 요구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을지를 자문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 어떤 기술보다 자신을 지키는 기술을 가장 높이 생각하며 자신의 내면을 자유하고자 했다. 그가 한 일은 그저 방어로 자신을 지키는 방어에서 한 투쟁이 전부였다. 그는 괴테가 ‘치타델레’라 불렀던 성을 만들고 외부와 단절되어 시대를 초월하여 내면의 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미셸 쇠르 드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1533년 2월 28일~1592년 9월 13일) 프랑스 철학자, 사상가, 수필가 몽테뉴라는 마을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후, 보르도 법원에서 법관을 지냈다. 그 후 1571년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몰두하여 1580년 < 수상록>을 완성시켰다.
몽테뉴의 아버지는 천주교도였고 어머니는 위그노 신자였다. 몽테뉴는 특별한 어린 시절을 지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인문주의 학자 친구들을 모두 불러서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논의했고 젖을 떼자마자 당시 귀족 가문에서 하는 방식이 아닌 아기를 몽테뉴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인 벌목꾼에게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단순하고 까다롭지 않은 ‘사람으로 키우면서도 신체적으로 단련시키고 민중으로 보내서 민중의 삶을 그대로 배우도록 했다. 그래서 몽테뉴는 가난한 숯쟁이 오두막에서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검소하고도 엄격한 시간을 보냈다. 몽테뉴는 후에 자신을 그렇게 키워준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아버지는 다시 몽테뉴를 데려와서 교양과 학문을 익히도록 했다. 그러나 그 방식도 시절에 유행하던 가혹한 교육 방식이 아닌 스스로 흥미를 키우도록 하는 교육이었다. 그에게 금지된 것은 없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성향대로 충분히 교육받을 수 있도록 했다.
“선생들이 책에 담긴 지식을 강제로 암기시키고, 또 그들이 말해주는 내용 대부분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최고의 학생들에게 그런 책 속의 망상을 설명해 주는 게 싫었다. 받아들인 지식이 지나치게 많아서 학생 스스로 자신의 세계상을 만들어나가는 능력을 죽이고 있었다. 47”
몽테뉴는 아버지의 명예욕으로 공직 생활에 내몰려 법관을 지냈지만 아버지가 죽은 1568년에 그 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대법원장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몽테뉴는 이 시대가 어느 한쪽 편을 들 것을 강요하는 시대임을 알았고 그는 그것을 피하고자 했다. 그의 성향으로는 두 당파를 화해하고 중재하는 역할뿐이었다. 몽테뉴는 아버지의 성에서 하나의 성을 개축하여 자기의 거처로 삼았다. 자신은 나갈 수 있지만 아무도 그 성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10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 성에서 보냈다.
“책이란 삶이라는 여행에 가져갈 수 있는 최고의 양식임을 깨달았다.-몽테뉴의 자서전 131”
“나는 책을 쓰는 저자가 아니다. 내 과제는 내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직업이며 유일한 소명이다”
그는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하는 질문만을 하며 살았다. 누군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바꾸려 하지 않았다. 가르침이 아닌 스스로 앎을 추구하고 깨닫는 삶이었다.
자신이 성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싸움은 끝났다고 믿었지만 후에 그것이 오류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성을 나와서 <수상록>을 출판하고 여행을 떠난다. 몽테뉴도 에라스무스나 칼뱅처럼 쓸개에 문제가 있었다. 그의 병은 심각한 상태여서 때로는 고통 때문에 자살을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여행 중에 많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가난한 사람이든 공작이든 사리지 않았다.
여행 중에 그는 보르드 시민들이 그를 시장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고 왕은 “미루지도 말고 변명도 하지 말고 임무를 맡으라"라고 명령한다. 시장직을 수행하는 중에 앙리 3세와 4세의 위기를 중재하였고 후에 앙리 4세가 왕좌에 앉아서 그에게 직위를 주었을 때 깨끗한 손으로 공직 생활에 물러나고 싶던 꿈을 이룬다.
1592년 9월 13일 몽테뉴는 중증 후두염으로 사망하여 종부성사를 받고 보르도의 교회에 묻혔다.
이후 수상록은 1676년에 금서 목록에 등재되었다가 1800년에 프랑스 혁명 정부가 몽테뉴를 영웅으로 인정하고 그의 무덤을 보르도 과학 문학 예술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으나 시신이 바뀌는 어이없는 실수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1803년에 수상론 판본이 발견되었고 1854년에 수상록이 금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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